새마을금고 월간 매거진의 <인문학 식탁> 코너에
칼럼을 정기 연재하고 있습니다.
음식 속에 문학을 녹여내어 맛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하고 깊은 의미까지 담고자 합니다.
4월호 음식 주제는 '봄나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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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금고 월간지 MG magazine.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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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물은 강렬한 향과 맛으로 그 어떤 음식보다 가장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최근에는 유통과 재배기술의 발달로 제철음식의 개념이 옅어졌지만, 봄나물만은 예외이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봄나물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은 지금에서야 제 시기를 맞아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따스한 공기 속에 진한 흙냄새와 싱그러운 봄나물 향이 넘실댄다. 거부할 틈도 없이 온 몸의 감각을 통해 봄이 왔음을 전해준다.
선비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던 봄나물
봄나물은 ‘봄에만 먹을 수 있는 보약’이란 말이 있다. 그 풍부한 맛과 뛰어난 영양효능 때문일까,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따스한 봄이 돌아오면 봄나물을 캐는 것을 중요한 일상으로 삼았다. 특히 나물 문화가 정착한 조선시대부터는 밥상 위에 주식인 밥과 함께 나물반찬이 꼭 함께 나갔다. 이에 선비들은 집 근처에 직접 채소밭을 가꾸며 식사시간 마다 나물을 가까이 했다.
봄나물은 청빈한 사대부의 끼니를 채워주는 음식이도 하면서 동시에 풍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비들은 나물을 소재 삼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계절의 변화가 선물하는 자연의 풍경을 만끽했다. 특히 산과 들에서 봄나물을 채취하러 갈 때는 직접 만든 나물 노래를 부르곤 했다. 율곡 이이의 작품으로 알려진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의 봄편을 보면 이러한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졌으니
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을 들어가니
주먹 같은 고사리오 향기로운 곰취로다
빛 좋은 고비 나물 맛 좋은 어아리다
도라지 굵은 것과 삽주순 연한 것을
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취한 쌈 입에 넣고 국 한 번 마시나니
입 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 율곡 이이>
그는 광주리를 하나 들고선 전날 밤 봄비가 내려 촉촉이 적셔진 산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도라지, 고사리, 고비, 마름, 곰취를 캐어 봄나물 만찬을 즐긴다. 국, 나물 무침, 쌈 등 봄나물을 이용해 온갖 요리를 해먹는 것만 보아도 조선시대 최고 학자였던 율곡 이이가 얼마나 자연과 채소를 가까이 했는지 알 수 있다.
서민들의 생존을 책임져준 고마운 존재
나물은 선비들의 일상뿐만 아니라 굶주림에 허덕이던 서민들의 생계까지 책임졌다. 굶주림을 뜻하는 ‘기근’에서 기(飢)는 곡식이 아직 덜 여물어 발생하는 굶주림을, 근(饉)은 채소가 자라지 않아 겪는 굶주림을 의미한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의 수천 년 식생활 역사에서 곡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채소로 만든 나물이었다. 오죽하면 99가지의 나물 노래만 외우면 3년 가뭄도 견뎌낸다는 옛말이 있겠는가.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나물은 가난한 서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고마운 먹거리였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자면, 일례로 아일랜드에서는 19세기에 먹을 음식이 없고 전염병이 퍼져 고통 받던 국민들이 결국 다른 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무리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산나물만 먹어도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떠난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지천에 깔린 나물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 민족의 생존여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곧 지나갈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생명력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입 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진하다 못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봄나물의 향과 맛을 접하게 되면 이 시를 쓴 율곡 이이의 마음에 절로 공감이 간다. 혹독하리만치 차가운 겨울 땅 속에서 견뎌낸 이 생명력이야말로 수 천 년 동안 서민들의 생존부터 선비들의 풍류까지 책임져준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쉬이 꺼지지 않는 이 싱그러운 기운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고단한 우리들의 삶에도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란다. 봄나물은 먹고 나면 입 안에서도, 마음속에서도 그 여운이 참으로 오래 가니 곧 지나갈 이 계절이 벌써부터 아쉬울 따름이다.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