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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29. 2020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혹시 어젯밤에 깜빡하고 끄지 않은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작동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청난 빗소리였다. 퍼붓는 게 뭔지 확실히 체감하는 날들이다. 지구를 함부로 다루는 것에 격노한 날씨의 신이 내리는 벌이라는 생각도 든다. 

새벽 5시. 남편도 덩달아 일어났다. 여름인데도 아침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 필요할 만큼 스산한 날씨다.     


“남편아, 올해는 비가 너무 오네. 습도도 장난 아냐. 바닥도 끈적끈적한 게 풀 발라놓은 것 같아.”

“그러게. 어제도 퇴근하는데 비 때문에 도로 통제해서 차 엄청 막혔는데.”

“계속 이렇게 퍼부으면 진짜 우리 방주라도 하나 만들어야 되는 거 아냐?”

“방주는 무슨. 14층 우리 집이 방주다.”     


남편 말대로 우리 집은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아빠가 젊었을 때 이 근처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우리 동네가 전부 달동네였다고 했다. 달동네의 흔적은 사라지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 여러 개가 들어섰지만 언덕이 많은 지형은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 동은 단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아파트 입구부터 약간의 등산을 해야 오를 수 있다. 층도 꼭대기 층 바로 아래 14층이니 우리 집이 잠긴다면 서울시내 어지간한 아파트는 다 잠긴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인류까진 아니더라도 우리 동네 사람들을 구하고 봉사할 절호의 기회.     


“그러네. 우리 집이 방주네. 지금 역병도 창궐하고 비도 이상하리만치 퍼붓고 이 길로 지구 종말로 접어들면 어쩌지? 남편아, 그래서 말인데, 동네 사람들이라도 구하게 옥상에 방주 하나 짓는 건 어떨까? 어제 어느 대학 지구환경학과 교수 인터뷰를 봤는데 앞으로 여름은 과거랑 패턴이 완전 다를 거래. 폭염 아니면 폭우래. 매년 여름은 고통스러울 거라고 대놓고 말하더라고. 그러니까 이왕 짓는 거 폭염과 폭우에 완벽하게 대비할 수 있게 지어서 노아의 방주처럼 사람들이랑 동물들 살아남을 수 있게 하자. 폭염에는 시원하게, 폭우로 홍수가 나면 땅이 마를 때까지 안전하게 머물 수 있게. 우리가 일단 시작하면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줄 수도 있어.”


방주를 만들자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남편이 남은 차를 후루룩 들이키고는 대답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 걸. 우리 동 옥상에 지으면 되겠지? 일단 옥상에 접근이 가능해야 하니까 옥상 열쇠를 입수해야 하는데. 경비아저씨한테 잘 말씀드리면 우리의 의도를 이해해주시려나?”

“키 작은 아저씨는 안 된다 할 거 같고, 키 큰 아저씨는 우리랑 친하니까 잘 말씀드리면 옥상 열쇠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아저씨한테 방주 탑승 우선권 드린다고 하자. 만약에 키 큰 아저씨도 안 된다고 하면.... 음... 내 친구 할아버지가 생활의 달인에 나온 열쇠 명인이야. 그분 설득해서 옥상 마스터키 하나 만들던가 하면 될 것 같아.”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남편이 손으로 받쳐 든 턱을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보니 이건 너무 중요한 프로젝트 같다. 경비아저씨가 옥상 열쇠 안 준다고 해서 그냥 포기할 프로젝트가 아닌걸. 인류를 구할 최후의 방주라.... 그래, 시작해보자. 자재 수급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자재를 옥상으로 올릴 것인가, 공사 소음은 어찌할 것인가, 해결할 문제가 너무 많긴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그리고 뭐든 시도하다 보면 다른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일단 시작해보자.”     


생각만 길고 실행력 없는 나와는 달리 결심한 일에는 전광석화인 남편이 당장 자기 방으로 달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검색하며 정리하기 시작한다. 남편은 아침식사도 거르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 통화를 하며 사람들을 모았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이제야 허기를 느낀 남편이 뭘 좀 먹어야겠다며 거실로 나와 그동안의 진행상황을 알려주었다. 짧은 시간에 그가 설득해서 섭외한 이들의 목록이 놀랍다.

“좀 있다 4시에 선박기술자랑 줌으로 화상 회의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자기도 세수 좀 하고 상의만 셔츠로 갈아입어. 나도 이제 씻고 옷 갈아입을 거야.”     


와우. 새벽 5시에 차 마시면서 꺼낸 방주 이야기가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반나절 사이에 여기까지 오다니! 놀랍고 정신없지만 이런 급작스런 흐름에는 그냥 올라타 몸을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자신 없지만 일단 덤벼보기로 했다. 남편이 섭외하며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선박기술자에게 ‘가칭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 취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내가 맡기로 했다. 더듬거리지 않기 위해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어떤 어투가 신뢰감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몇 차례 연습도 해보았다.     


드디어 시작된 줌 화상회의. 나는 선박기술자를 뱃사람으로 상상했었나 보다. 파도와 맞서 싸우는 <노인과 바다>의 노인 같은 이미지로. 나의 예상을 깨고 화면 속에 나타난 사람은 자외선 차단제와 비비크림까지 꼼꼼하게 챙겨 바를듯한 뽀얀 피부의 30대 남자였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연일 내리고 있는 이 비는 단순한 장마가 아니다, 기후변화다, 지금도 폭우 피해가 막심하지만 이게 올해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구 종말의 전조증상 같다, 언제 닥칠지 모를 감당 불가능한 홍수에 대비하고 싶다, 올여름이 아니라 내년, 내후년, 종말까지도 대비하고 싶다, 일단 우리가 이렇게 시작하지만 방주 프로젝트가 확대되어서 아파트 각 동 옥상마다 하나씩, 아파트가 아닌 경우 각 주민센터를 기점으로 인근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하나씩 설치되기를 희망한다, 방주 제작은 기후변화 시대에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것이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이 아이디어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힌트를 얻었다 등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실무적인 부분을 이야기했고 선박기술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솔직히 기술적인 설명은 이해 못한 부분이 많았다. 선박기술자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설명한 내용과 앞으로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몇 시간 내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준다고 했다. 선박기술자라기보다 발라드 노래 작사를 한다고 하면 더 어울릴법한 남자였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조곤조곤 필요한 설명들을 조리 있게 해 주었다. 처음 만남에서 인상이 결정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모르겠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후자였다.     


회의가 끝나자 긴장이 풀렸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선박기술자 섭외가 끝났으니 시작이 좋다며 남편이랑 안도했다. 회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니 어느덧 해는 저물어 있고 비는 여전히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길 기원하는 의미로 아껴두었던 와인을 따고 8시 뉴스를 시청했다. 넘쳐버린 섬진강 물에 떠내려가다 가까스로 지붕 위로 대피한 소들을 구출하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

“어휴. 저 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남편아, 우리 방주 지으면 저 소들도 꼭 태우자.”     

그때 핸드폰 메시지 도착 알림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아까 낮에 줌으로 화상 회의했던 선박기술자 김선박입니다. 아까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제가 사실 노아의 방주 에피소드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업의 근원이 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회의 끝나고 찾아보았는데요. 창세기 6장 19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고 몹시 절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자 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주를 설계해도 제가 그 방주에 탑승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물론 방주 설계자 자격으로 탑승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꼭 암수 한 쌍씩 태우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이미 저 구절에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저는 제 나름대로 ‘솔로들의 방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저는 두 분이 진행하시는 프로젝트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식 계약을 체결한 것도 아니니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전에 제가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나름의 ‘솔로들의 방주’ 프로젝트를 진행하겠으니 두 분은 ‘암수 한 쌍들의 방주’ 프로젝트 잘 진행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멋지게 방주를 지어 물 찰랑거리는 정상에서 만나길 기원하겠습니다.”     


남편과 나는 메시지를 읽고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잔에 담긴 와인을 삼켰다. 와인이 참 쓰게 느껴졌다.     



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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