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찰
연인들 간에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자기가 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전적으로 이러한 의견에 반대한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사람은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 가족이란 무엇일까? - 어떻게 같이 보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를 7년간 키우고 자신의 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뒤바뀐 사실을 알고 “아이교환”이 이루어진다. 아이를 교환 대상쯤으로 여기는 이러한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7년간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고 가족은 피보다는 같이 보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가족’에서는 노부요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버려진 이들을 주워 하나의 가족을 구성한다. 쇼타나 쥬리는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을 더 가족처럼 따른다. 그러나 이들의 유대관계는 피만큼 진하지는 못하다. 이는 거리낌 없이 범죄를 쇼타나 유리에게 시키는 장면, 경찰에 잡힌 쇼타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즉, 단순히 시간만 같이 보냈다고 가족은 아닌 것이다. 쇼타나 쥬리가 끝까지 오사무와 노부요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도 가족과 같은 유대가 생기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쇼타는 마지막에 오사무에게 아빠라 혼잣말로 조용히 속삭인다. 이는 오사무나 노부요가 쇼타를 버리고 도망가려고 한 행동에 대해 후회한 뒤이다. 가족이라는 유대가 생긴 것이다.
가족이란 피보다도 물리적 시간보다도 어떤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도 가족이란 단어를 피만 연결되어 있다고 시간만 같이 보냈다고 아무 데다 붙일 수 있는 가벼운 단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2) 일본사람의 본성 - 일본도 변할 수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가 두 아이 모두 키우겠다고 하자 유다이가 화가 나서 료타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 머리를 때리는 양 소극적이고 힘이 없는 제스처이다. 한국영화였으면 아마 풀스윙으로 얼굴옆면을 가격해 맞은 사람은 뒤로 나자빠지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일본인이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인은 순하고(실제로 심한 욕이 “빠가야로(바보)”이다) 겸손하며 예의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일본인이란 관동대학살이나 난징대학살로 비추어지는 잔인함의 표상이다. 이렇게 다른 두 가지 모습 모두 일본인의 모습이다.
나는 여기서 일본인이 실제로는 잔인한 본성을 가지고 있느니 어떠니는 믿지 않는다. 그보다 어떻게 사회화가 되었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즉, 사람은 사회화의 동물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은 변한다. 일본도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 확증편향 - 어떻게 사회화될 것인가?
얼마 전에 CNH포럼이라는 고액의 강연을 들었다. 주제는 “미디어는 어떻게 소비되어야 하는가”였고, 유명한 CNN리포터인 앤더슨 쿠퍼가 2시간 정도 연사로 나왔다. 내가 유심히 들은 키워드는 “확증편향”이었다. 요새 빅데이터니 뭐니 모든 정보가 맞춤형으로 제공됨에 따라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에만 노출된다. 따라서 사고의 스펙트럼이 양극화되는 확증편향현상이 일어난다. 사람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국민으로, 가족으로, 사회인으로 유대관계를 유지하려면 확증편향을 피하고 잘 사회화될 수 있도록 많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 2018.8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