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들을 다음 음악은 있는가?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by 묵온

(원서 초판 1996. 1. 10., 한국어 초판 2017. 6. 29. 발행)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문체와 내용 양쪽으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일단 밀도가 유례없이 높다. 작가는 논지를 전할 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을 일체 생략한다. 그리스·로마 신화, 중국과 일본의 고전 및 야화, 단어의 형성 기원이나 철학 담론을 다양하게 인용하되 그 이야기들을 해설하거나 앞서 제시한 논의와 연결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아귀가 어긋나는 파편들로 남은 글은 웅장한 풍경화 한 점보다 정교한 세밀화의 모음에 가깝기에 철학서처럼 읽으려 하면 곤란하다. 키냐르는 ‘A는 B다.’의 외형을 띠는 문장을 즐겨 쓰지만, 독자가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를 건지고 작가가 글의 어느 위치에 배치하는지에 따라 가부(可否)를 뒤집으니 이를 수학에서 말하는 명제로 보기는 어렵다. 작가는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에서 로마의 수사학자 프론토를 인용하며 철학이 이미지 없는 말의 논리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한다.¹ 번번이 도약하는 작가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문장과 문단을 일일이 독해하기보다 여러 책을 넘나드는 편이 낫다. 그만두기 쉬운 일이다.

‘옛날’에 천착하는 세계관도 책을 붙들기 어렵게 한다. 키냐르에게 ‘옛날(jadis)’이란 우주 차원에서는 빅뱅 이전, 개인 차원에서는 수태 이전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고 천체나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다. 인간은 자신의 탄생을 초래한 성교의 장면을 보지 못한 채 모체에서 떨어져 나와 대기권의 세계에 들어오는데, 이런 출생 이후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옛날’이라 부를 수 없는 ‘과거(passé)’로 묶인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키냐르는 옛날을 ‘최초의 왕국’으로, 과거를 ‘마지막 왕국’으로 부르고, 모든 인간이 생물학적 결합에서 비롯하지만 그 장면이 우리의 기억에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우리—언어를 배우며 옛날과 분리되는 7세 이후의 인간—가 늘 과거를 살고 있으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등 특별한 순간을 통해 이따금 옛날로 돌아간다고—혹은 옛날이 솟아오른다고—말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옛날 예찬이 노작가의 회고적 취향으로 비치기도 하고, 출생을 불러오는 합일에 대한 언급의 이면에 고질적 반페미니즘 및 이성애 중심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도 하다.

반세기 넘도록 변하지 않는 관점이 아집이 아닌지 의심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과 기법이나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비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공동체와 거리를 두는 자세는 오히려 사회가 은폐하는 폭력을 선연히 드러내는 렌즈로 작동할 수 있다. 연속적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하는 보통의 글이 하나의 논리로 수렴하면서 진실을 제시하는 양한다면 키냐르가 지향하는 ‘소론’ 혹은 ‘단상’이라는 형식은 결코 매끈하게 융합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어수선하게 늘어놓으며 의심의 여지를 드리운다.² 그런 문학적 틀에 걸맞게 작가는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성이 로마 정치에 편입해 국민을 관리하는 제도가 된 과정을 성실히 탐구한 《섹스와 공포》에서 과거 미화는 찾을 수 없다. 적어도 키냐르가 문학을 무기로 삼아 현학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음악 혐오》는 파스칼 키냐르의 새로운 글쓰기로 평가받는 《은밀한 생》의 직전에 나온 저서다. 1997년 1월에 폐출혈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뒤 돌아온 작가는 이듬해에 출간한 《은밀한 생》에서 소설과 시, 수필 등 어느 범주로도 분류할 수 없으며 그저 단장(斷章)의 모음이라 일컬어야 할 형식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이후로 이와 유사한 꼴로 쓰는 책들을 ‘마지막 왕국’ 연작으로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이 시리즈가 키냐르를 다른 작가들과 가장 뚜렷이 구별하기에 1996년 이전 저작은 주목을 덜 받는 편이지만, 분기점의 바로 앞에 해당하는 《음악 혐오》 또한 다음을 예비한다는 점에서 탐구할 가치가 크다. ‘마지막 왕국’에 속하는 작품만큼 장(章)의 구분이 세밀하지는 않으나 각 장의 안에서 서로 맞물기 어려운 조각 글들을 병치하는 특성은 이미 완연하다. 군더더기 없는 단문으로 소재를 꿰뚫는 솜씨는 마찬가지로 음악을 다루는 비(非)-‘마지막 왕국’ 책인 《부테스》와 더불어 가장 탁월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책이 키냐르의 유장한 궤적에서 돌연한 요동을 그리는 이유는 작가가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던 다른 저서와 달리 음악을 매섭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반감을 넘어 혐오에 이르는 일은 가까웠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을 흔히 전제한다. 음악가 집안의 후손답게 각종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했다고 알려져 있는 작가는 1987년에 《음악 수업》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음악 연주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논한 바 있다. 태초로 돌아가는 일에 가치를 두는 작가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긍정적 진술이다. 당시에 음악의 부정적 특성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든 혹은 이미 알아챘으나 언급을 자제했든, 이전에 다룬 소재에 대해 판단을 뒤집어 글로 밝혔다면 그사이에 모종의 계기가 발생했다고 짐작할 만하다.

작가는 평생에 걸쳐 음악에서 두 번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청년기에 가업과 결별한다. 《부테스》의 마지막 장에 따르면 키냐르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지도 아래 논문을 준비했으나 68혁명의 물결에 오르며 교수의 길을 포기한다. 음악가 집안인 부계의 어른들을 따라 오르가니스트가 되기로 하고 남는 시간에 에세이를 쓰지만, 그 글의 진가를 알아본 시몬 갈리마르의 요청에 따라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며 다시 음악과 멀어진다.³ 이후 중년이 되어서는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지속하는 데 실패한다. 1992년에 키냐르는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이었으나 소속 기관과 별도로 프랑수아 미테랑, 필리프 보상 등과 함께 페스티벌을 추진하다 반발에 부딪히고 이내 모든 공직에서 사임한다.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고 싶은 물결 혹은 열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⁴는 《행복한 시간들》의 고백에 기대 정확히 표현하자면 키냐르 자신이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일을 의도했다고 말해야겠다.

작가가 음악을 떠난 것은 두 사건에서 같지만 양쪽의 방향은 정반대다. 어린 키냐르에게는 음악이 가문의 일이자 태어나자마자 떠맡은 과제였다. 학업을 단념하고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렀으나 작가는 이내 부름을 받아 세상으로 나간다. 소음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옛날을 되찾고자 축제를 기획하지만 ‘음악’이라는 이름 뒤에는 타인이나 조직과 힘겨루기하는 데서 생기는 권력관계가 도사리고 있었고, 이에 신물이 난 키냐르는 집 안에 은거하기를 택한다. 《음악 혐오》의 저자는 이렇게 사람의 의지를 꺾거나 조종하려 하는 힘이 음악을 포섭하고 이용할 때 얼마나 큰 재앙을 일으키는지 예시하고 그 위험성이 음악의 본성에 내재함을 논증한다. 음악이 변질해 비극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파괴력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 논지는 작가가 인간들의 집단에서 물러난 뒤에야 책을 출간한 사실은 물론 특정 시기 이후에 만들어진 음악을 주로 비판하는 지향성과도 모순을 빚는다. 나는 그 긴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여전히 《음악 혐오》를 생각한다.


키냐르는 소리를 음악과 구분한다. 소리는 빛과 달리 웬만한 장애물을 만나도 그 너머까지 이동한다. 함부로 침범하는 자극을 “귀에는 눈꺼풀이 없”⁵는 인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수태로 인해 태아가 뱃속에 들어선 직후, 빛은 아직 뜨이지 않은 눈에 도달하지 못해도 소리는 모체를 비롯한 외부에서 날아와 끊임없이 귓속을 파고든다. 출생 이후로도 습격은 도무지 끊이지 않는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구도가 불평등하다. 손을 들어 귀를 막지 않는 한 수신자는 발신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한다. 심지어 소리는 발신자가 염두에 두지 않은 다른 여러 수신자에게도 닿는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신과 인간의 관계로, 강요와 복종에 기반한 폭력적 관계로 확장한다. “신들이 말씀으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⁶

소리를 들을지 말지 선택할 시간이 수신자에게 주어지지 않기에 청각은 즉각적이다. 또한 청각은 인간이 대기 중으로 나오기 전부터 훈련하는 감각이므로 어떤 소리는 사람을 옛날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키냐르는 이를 보여 주는 일화로 수탉 소리에 우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꺼낸다. 예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을 세 번째로 받은 뒤 베드로는 다시 부인하지만 곧 들려오는 수탉 울음을 듣고 오열한다. 만찬이 끝나면 수탉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낚던 시몬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을 만나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억양은 이름처럼 바꾸지 못해 정체를 들킨다. 어머니의 몸 안에 있을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 따라 하게 된 음의 높낮이. 그물을 던져 버리고 새 이름을 얻어 신을 따라나선 여정이 무색하게 수탉 울음은 별안간 베드로를 덮쳐 그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린다. 공기의 떨림인 소리는 인간이 걸친 옷에 개의치 않고 몸을 떨게 하는 공포를 자아낸다.

이런 야성의 소리를 길들인 것이 음악이다. 예측할 수 없이 쏟아지며 고통을 주는 무수한 소리 중에서 인간은 서로 잘 어울리는 음을 선별해 온음계와 협화음을 고안한다. 듣기 좋은 소리만 온전히 울리게 하려면 그 밖의 소리는 사라져야 하니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작가는 완벽한 청취의 예로 소설 읽기와 클래식 음악 듣기를 제시한다. 사회적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는 반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은 말을 멈추고 저자나 작곡가가 만든 것에 수동적으로 몸을 내맡겨야 한다. 작품의 연대가 오래될수록 지금의 번잡한 인간 집단과 멀리 떨어진 세계로 잠기기 좋다. 행동하지 않고 수용하기만 하는 이 행위들은 양수 속 태아가 어머니의 소리를 듣는 일과 비슷하지만, 의지를 품고 하는 실천이므로 퇴행과 거리가 멀다. 언어를 배우기 전에도 음악을 듣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클래식 음악 듣기는 소설 읽기보다 옛날과 더 가깝다.⁷

물론 현대 사회의 잡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폭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듣는 이는 고통을 회피해도 연주하는 이는 가해의 현장을 직시하고 살육을 직접 행한다. 조화로운 소리를 듣기 위해 인간은 곰의 뼈에 구멍을 내 피리를 제작하고 양의 창자를 매달아 금(琴)을 고안한다. 산 것을 죽여 만든 악기로 아름다운 음률을 구현해 새와 사슴을 유인하고, 포로가 된 동물—사람을 포함하여—을 먹거나 제물로 바친다. 불거나 퉁기는 악기가 먹잇감을 끌어당기는 동안 때리는 악기는 사냥꾼과 구경꾼의 움직임을 통제한다. 소의 가죽을 늘여 거북이의 등딱지에 고정해 북을 만든 다음, 그 막을 일정 간격으로 두드려 제의에 참여하는 자들의 정신을 홀리고 발놀림을 조종한다. 소리를 교화해 음악을 만들었으나 강요와 복종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악기의 재료가 동물의 신체에서 금속과 혼합 섬유로, 음악을 연주하는 사건이 제의에서 공연으로 바뀌었을 뿐 발신자와 수신자의 불평등은 21세기에도 동일하다.

20세기에도.


이성을 발견한 뒤로 이제 끝없이 발전할 일만 남았다고 믿었던 인류가 바로 그 머리의 힘을 써서 제풀에 절멸을 두 번이나 불러온 시대. 그중 두 번째 전쟁의 한가운데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예술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알프레트 칸토르는 그림을 그려 공포에서 눈을 돌렸고,⁸ 샤를로트 델보는 벗들과 함께 연극을 하며 자신들이 현실 대신 무대 위의 세계에 있었음을 믿었다고 회상한다.⁹ 파스칼 키냐르는 음악이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¹⁰이라고 단언한다.

책과 같은 제목을 붙인 장에서 작가는 시몬 락스와 프리모 레비의 서술에 기댄다. 폴란드의 유대인 음악가인 락스는 1942년에 아우슈비츠로 옮겨져 수용소 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출처 표기에 괘념하지 않는 작가의 말을 믿는다면) 레비는 락스가 지휘하는 연주를 듣는다. 지휘자는 성탄절 전날 어느 여성 병동에서 연주회를 진행했다가 그만하라는 환자들의 비명을 들은 경험을 풀어놓으며 음악이 “그 스스로 수동성을 부가”¹¹한다고 주장한다. 화학자는 음악이 “생각을 없애고 고통을 완화하는, 끊임없는 리듬의 최면”¹²이라고 적는다. 리듬은 물리적 시간을 무시하고 자기 고유의 시간을 정초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똑딱이는 메트로놈 소리를 들으면서도 인간은 그 소리들을 둘(똑, 딱), 셋(똑, 딱, 딱), 혹은 그 이상의 수로 묶고, ‘똑’과 ‘딱’의 간격보다 ‘딱’과 다음 ‘똑’의 간격이 더 길다고 인식한다. 물리적 시간을 기각할 만큼 강력하다면 개인의 몸에 깃든 떨림이야 쉽사리 뭉개는 것이 당연하다. 음악이 들리는 즉시 수감자의 몸은 불수의적으로 일어나 리듬에 실려 작업장으로 향하고, 통각의 둔화에 마지못해 만족하며 고통의 연장을 감내한다. 걸음이 동기화되며 개인 간의 차이가 지워진다. 사람이 흐릿해지고 부리다가 고장 나면 내버릴 도구만 남는다.

전쟁 후에도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녹음이 연주를 대체한다. 수신자는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발신자는 인간도 아닌 환경. 연주는 인체의 움직임으로 행해지는 만큼 매번 바뀌지만 녹음은 흐트러지는 일 없이 판박이로 소리를 재생한다. 음악을 담을 용기(容器)로 쓰여야 할 원반이 산업적 규모로 쏟아져 나와 오히려 내용물의 규격을 정하고, 그 결과 한 트랙의 길이가 3~4분으로 굳어진다. 동일한 노래가 이곳저곳에서 메아리치고 서로 다른 곡마저 분별하기 어려워지는 도시에서 개성은 설 자리를 잃는다. 모든 인간이 노동으로 힘을 소진했다가 들려오는 음악에 마취당하기를 반복한다. 교회에서 신이 신도들에게, 수용소에서 SS가 수감자들에게 그랬듯 도시에서는 자본이 시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며, 그 매개의 자리에는 찬송가와 행진곡에 뒤이어 테크노가 들어선다. 앞의 두 가지보다 마지막이 도달하는 범위가 단연 가장 넓다. 홀로 있는 시간을 갈구하는 작가는 귀를 막는다. 《음악 혐오》 출간 후 30년이 흐른 지금, LP나 CD의 용량을 아득히 초과하는 플레이리스트가 아파트 수만 세대를 똑같이 파고드는 시대에 은자는 또 무엇을 밀폐해야 할지.


이상의 논의가 작가의 취사선택에 강하게 의지하는 경향은 곧잘 눈에 띈다. 키냐르는 《세상의 모든 아침》, 《사랑 바다》 등 여러 저서에서 바로크 음악에 호감을 드러내고 당대 음악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이야기를 써 왔고, 이는 현대인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 그때의 곡들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현재 바로크 음악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그 시절에는 급진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바로크’라는 단어가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단어에서 기원한 만큼,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 예술의 조화를 벗어난 과장과 자유분방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음악대학에서 바흐를 화성학과 대위법의 표준으로 교육하는 상황 때문에 자주 잊히는 사실이지만 바로크 음악의 핵심 또한 규칙에서 이탈하는 화성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태동한 음악 이론이 17~18세기에 가장 복잡한 수준으로 발전하다 못해 틀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협화음으로 소리를 감싸는 천이 음악이라면 바로크 음악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불량품이다. 이 관점에서는 단순한 화성으로 돌아간 18세기 말의 고전주의 음악이 르네상스 이전과 더 닮았다고 볼 수 있으나 키냐르는 고전주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반주 형태인 알베르티 베이스를 “견딜 수 없는 것”¹³이라며 거부한다. 한 마디에서 ‘도’와 ‘미’와 ‘솔’ 건반을 한꺼번에 누르지 않고 ‘도-솔-미-솔-도-솔-미-솔’로 여덟 번에 나누어 누르면 더 시끄럽기 때문에?

악곡 내 음표의 나열은 논외로 하더라도, 음악 자체의 증식은 정말로 인간을 마취하기만 했는가? 작가는 “실재를 극단적으로 모사한 것이 진짜 소리를 대체하게 되었다”¹⁴고 하지만 물리적으로 따지면 기계를 통한 공기의 진동도 엄연히 소리다. 우리는 사본을 듣고도 울컥할 수 있고, 그렇게 감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게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꾸짖지 않는다. 음반의 보급은 공연에 갈 여력이 없는 청자에게 작품을 향유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무대에 오르기 여의치 않은 음악가에게도 청자와 만날 장을 제공한다. 더욱이 어떤 음악은 모사가 실재요 음반이 무대다. 음파를 발생시키지 않고 전자 신호를 합성하는 기계를 지금의 음악가들은 ‘악기’라 부른다. 전자 악기 혹은 가상 악기로 곡을 만드는 음악가는 일단 기계 안에만 들어 있는 소리들을 조합해 음반의 형태로 완성한 다음, 공연 시에 그 음원(音源)들을 음반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욱 인상적인 효과로 재생할 방법을 궁리한다. 음반이 원본이고 무대가 사본인 이런 음악에는 작가가 ‘테크노’라 칭한 장르뿐 아니라 그 어떤 전통음악보다도 평온한 음향으로 침묵을 탐구하는 갈래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책을 쓰기 전까지 평생 음악을 곁에 두었을 작가가 위와 같은 비판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도발로 느껴질 만큼 뻔한 편향을 감수하는 데는 의례의 측면이 있다. 무엇이 진정 본능적으로 싫다면 아무 언급 없이 외면하면 그만이건만, 음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고대의 사료에서 출발해 그 잠재력이 가장 잘못된 방향으로 폭발한 사례를 이토록 수고롭게 부각하며 책 한 권을 쓰는 까닭은 자신이 음악을 혐오한다는 결론을 미루기 위해서다. 1996년의 키냐르는 “나는 언제 음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는지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¹⁵라며 말을 삼가지만, 거의 30년이 지난 후에는 자신이 꾸었던 꿈과 그 희망이 실패로 돌아간 경위를 어렴풋하게 밝힌다. “이처럼 바로크 음악 센터가 기계장치를 사용했던 음악과 공연을 발굴하고, 간신히 판독해 출간한 그 악보들을 녹음하면, 그 음반들이 점점 더 많은 애호가를 불러들이고, 그 영화들은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¹⁶ 《음악 혐오》에서 숱하게 공격하기 직전에 작가는 음반으로 집단을 움직이는 현장을 구상하고 있었다.

《음악 혐오》의 마지막 장면은 몰락한 어느 후작 부인이 강가 모래사장에서 홀로 낚시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정경이다. 앞서 지적한 모순에도 이 유유자적이 위선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현재 범람하는 음원과 달리 음악 담론이 미미할뿐더러 그토록 희소한 이야기를 곱씹는 데 적막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입식 알고리즘을 클릭하는 것을 넘어 곡에 관한 진심 어린 감상을 나눌 여지, 소리를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악기를 잡거나 춤을 출 겨를. 키냐르에게는 읽기와 쓰기가 하나이고 청취와 연주도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지만, 현대 도시 사회는 청취를 끝없이 허용하는 대신 연주를 심각히 제한한다. 다가구 주택의 세입자가 방에서 악기를 다루거나 음악에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요즈음 시장의 주류를 이루는 곡들을 듣고 연주 방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필사를 넘어 글쓰기로 독자를 안내하는 책처럼, 연주는 물론 작곡의 즐거움까지 청자에게 연상시키는 음악이 등장할 때 기업이 소비자에게 소리를 난사해 돈을 착취하는 체제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음악일지 예측하는 일은 아르페지오를 못 하도록 망가진 오른손 검지를 지닌 채 2010년대에 그저 그런 앨범 두 장만 낸 나의 몫이 아니다.


첫 연주회를 마친 뒤, 절반 이상의 신입생은 보통의 학교생활로 돌아가고 악기에 정을 붙인 이들만 간간이 들르는 가을의 동아리방. 다행히 학생회관이 아닌 건물에 있어 쉰 명도 넘는 사람이 들어가 시끄럽게 음계 연습을 하던 곳이 이제 휑하고 고요하다. 칠판과 지휘자 선배를 향해 반원형으로 포진했던 의자들은 어지러이 흩어졌으나 기타를 품은 케이스들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 한 줄, 첫째 줄 케이스에 기대 다시 한 줄을 이루며 가지런히 쌓여 있다. 그 옆 벽면의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난 창문을 통해 말간 햇살이 시원스레 들어오니 불을 켜지 않아도 괜찮겠다. 내 악기가 없으니 나를 레슨해 주는 선배의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창 쪽 의자에 앉아 연습한다. 다음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았다.

선배 두 명이 들어온다. 학번 차이가 얼마간 나서 말을 많이 붙여 본 사람들은 아니다. 안녕 정도의 인사만 내게 건네고 공용 컴퓨터 앞에 앉는다. 무엇을 들어 본 적이 있냐고, 이 사람이 잘 친다고 얘기하는가 싶더니 어떤 유튜브 영상을 튼다. 잠시 듣다가 자기들은 갈 테니 나보고 들어 보라 권하고는 자리를 뜬다. 싱겁다고 생각하며 방금까지 선배들 몸으로 가로막혀 있던 모니터를 본다. 연습하던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왼쪽 다리를 발판에 올리고 기타를 품에 안은 자세를 유지하며. 아까와 같은 공간에 나의 서투른 탄현 대신 16분음표로 꽉 찬 선율이 울린다. 조(調)도 불확실해 곡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안갯속에 빠진다.

세르지우 아사드의 〈수채화〉 1악장 디베르티멘토란다. 정식 음원이 아닌 연주 실황이고, 뒤쪽 벽면 전체에 거울이 달린 점을 보면 공연 장소도 그럴듯한 리사이틀 홀보다는 연습실에 가까워 보인다. 연주자가 재킷 없는 정장을 입었으니 그래도 약간의 격식은 갖춰야 하는 공연, 음대 학생의 졸업 연주회 정도일까. 대중없이 추측하는 와중 묵직한 E 음이 한순간 울리더니 선율이 장조로 바뀐다. 연무가 걷혀 환해진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수수한 흰색 꽃이 흐드러진 벌판이구나. 피부가 그슬리지 않을 만큼 볕이 적당히 내리쬐고 있으니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걸어도 좋겠구나. 어느새 16분음표가 멎고 템포가 느려지며 박자표가 4/4에서 3/4으로 넘어간다. 칠흑 같은 밤, 하늘에 하모닉스 별. 누워서 높은 음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셋잇단음표 풀벌레 울음을 언제까지나 듣고 싶지만, 곧 아첼레란도. 조금 전에 들었던 벌판으로 다시. 그다음은 또 밤인가 짐작하지만, 이번에는 16분음표의 묶음 개수가 줄어들어 호흡이 짧아지더니 선율이 급강하해 E 화음으로 끝을 맺는다. 연주를 마친 이가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청중의 박수에 화답한다. 영상이 그치고 도로 적막이 깔린다.

고개를 돌려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수채화 속 벌판을 덮고 있던 하늘이 바로 저보다는 약간 더 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방금 나는 세상의 다른 누구도 듣지 못했고 이후로 나 자신조차 영영 듣지 못할 음악을 들었다. 그 기쁨을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2025. 12. 22.


¹ “프론토는 철학자들이 말할 수 있는 추론은 이미지 없는 논증이어서 혀 차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중략) 철학자들은 말을 하고, 탐구하면서 자신들 말의 원천을 잊고, 길가에 말의 재료를 버려두고, 자신들의 뒤늦은 전문화의 토대가 되는 속닥이는 충동을 옭아맨다. 철학은 존재자에만 집착하고, 종교재판처럼 엄밀한 취조를 하며 수사학을 세분하면서도 그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철학이 기본 수사학의 한 지류일 뿐인데도. 이미지들은 문자들 틈에서 부단히 솟아나지만, 철학자들의 담론은 기를 쓰고 이미지들을 멀리한다.” (파스칼 키냐르, 〈프론토〉,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백선희 옮김, 을유문화사, 2023, 18~19쪽.)

²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문제시하는 것뿐이죠. (중략) 나는 누군가가 인류 전체의 진실을 다룰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총체적인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진실이란 매우 분열된 상태에 있는 것이니까요. 나는 분열된 진실,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진실을 문제시함으로써 그것에 조금 접근하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파스칼 키냐르·송의경 대담, 〈프랑스 상스에 은둔해 있는 파스칼 키냐르를 찾아서〉;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241~243쪽.)

³ 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97~99쪽 참조.

⁴ 파스칼 키냐르, 〈제38장 1991년 눈 내리는 베르사유궁〉, 《행복한 시간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238쪽.

⁵ 파스칼 키냐르, 〈2장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음악 혐오》, 김유진 옮김, 프란츠, 2017, 104쪽.

⁶ 위의 책, 110쪽.

⁷ 키냐르가 음악과 문학을 비교하며 은연중에 드러내는 입장은 미묘하다. “음악은, 집단 언어의 학습 이후에 느껴지는, 발성과 숨결과 생명과 아니마와 프시케의 이전 상태에 대한 노스탤지어이다. (중략) 열정과 격정이 최초인 까닭에 음악은 가장 본래적인 첫번째 예술이다.” (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101쪽.) “문학은 공간에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심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를 좋아한다. 말이 없어진 입들은 어떤 음악으로도 부를 수 없는 들리지 않는 노래를 좋아한다.” (파스칼 키냐르, 〈제5장 알프alf 혹은 알레프aleph의 A〉,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9쪽.) 두 인용문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옛날에 가깝다고 해서 반드시 지고의 예술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지만, 작가의 세계관에서 ‘옛날’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때 이런 절충이 궁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⁸ “돌이켜 보면 아직 너무 어려서 더없이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그토록 되바라질 수 있었기에 그림을 그려 혼자 힘으로 아우슈비츠를 ‘드러내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과제가 훨씬 거대한 목적을 이루게 해 주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내면 깊은 곳에 있던 자기 보존 본능에 따라 그림에 열중하는 일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던 당시 생활을 외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 것이다. ‘관찰자’ 역할을 자처하면서 나는 몇몇 순간에나마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는 일과 나 자신을 분리해 실낱 같은 정신을 그나마 잘 붙들 수 있었다.” (〈알프레트 칸토르의 ‘아우슈비츠 도착’〉, 유대 유산 박물관 홈페이지, https://mjhnyc.org/blog/rendering-witness-arrival-at-auschwitz-by-alfred-kantor/, 번역은 필자.)

⁹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두 시간 동안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인육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우린 우리가 연기하는 세계를 더 믿었기 때문이다.” (샤를로트 델보, 〈처음엔, 노래 부르고 싶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류재화 옮김, 가망서사, 2024, 254쪽.)

¹⁰ 파스칼 키냐르, 〈7장 음악 혐오〉, 《음악 혐오》, 김유진 옮김, 프란츠, 2017, 187쪽.

¹¹ 위의 책, 211쪽.

¹² 위의 책, 195쪽.

¹³ 〈9장 저주를 풀다〉, 위의 책, 243쪽.

¹⁴ 위의 책, 241쪽.

¹⁵ 위의 책, 255쪽.

¹⁶ 파스칼 키냐르, 〈제38장 1991년 눈 내리는 베르사유궁〉, 《행복한 시간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