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우와 오다이르 아사드, 《여름정원 모음곡》
(1994. 3. 발매)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형 출판사 부스를 제외하고 가장 붐볐던 곳을 꼽자면 아침달이 떠오른다. 아침달 편집부와 친구들이 지은 책인 《여름어 사전》이 도서전 첫날부터 지금까지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올라오는 현상을 보면 손바닥에 땀이 금세 차올라 여름을 나기 버거운 사람도 조금은 흐뭇해진다. 하늘색 바탕 위에 녹색 제목을 얹고 네모진 얼음 주위에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글자 배치로 형상화한 표지. 책의 내용 대신 외면만 이야기하는 것이 멋쩍지만, 그동안 기성 등단 제도의 바깥에서 새로운 감각을 지닌 작가들을 발굴해 오면서 출판사가 쌓아 온 신선한 인상이 싱그러운 표지 이미지를 입고 현실감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조짐으로 보인다.
지면 바깥에서, 코엑스가 아닌 야외 공간에서는 이 청량한 색이 한층 직접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작열하는 햇볕이 피부를 꿰뚫어 강한 고통을 줄수록 사물을 부딪고 눈에 이르는 빛이 더욱 황홀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유동 인구가 많다는 상권조차 이미 주말 한낮에 텅 빈 살풍경을 면치 못하니 몇 년 후에는 거리에 나와 느릿하게 돌아다니며 가로수를 구경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지 않을지. 지금의 일상이 훗날 회고로만 남으리라는 위기감에 추억을 그러모으는 행위는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소멸하는 것을 남기려는 안간힘이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더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쓴 뒤, 오래전에 동경하는 마음으로 구입하고 연주한 악보를 찾았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옛날을 돌아볼 짧은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내가 지금 살지도 않는 집의 장서 더미를 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일함, 음원 보관함, 검색 결과에 기대 기억을 꺼내는 데 만족하며 이어 적는다. 공교로운 복원 연습.
《여름정원 모음곡》을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어렴풋하지만 그 계기가 여름과 무관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 모음곡의 악보를 일본의 클래식 기타 악보 출판사에서 주문한 시기가 2010년 9월이었는데, 그때 나는 동아리의 이듬해 2월 연주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진짜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을 기타 합주나 중주로 편곡해 무대에 올렸으나 이제는 나의 취향에 더 잘 맞고 처음부터 기타를 위해 쓰인 악곡을 연주할 기회라는 생각에 설렜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골라야 할 때였다.
치밀한 작품이 너무나 쉽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속절없이 무력해진다. 앨범으로만 들었을 때도 연주하기 어렵겠다는 예상은 했지만 모음곡 악보를 배송받아 펼쳐 보니 처음 두 곡부터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여는 곡〉은 선율과 반주를 따로따로 읽어 이해하기에도 구조를 이해하기 만만치 않은데 양쪽을 어느 시점에 맞물려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고, 비교적 선율이 분명하게 들리던 〈여름정원〉에는 7/16이라는 생소한 박자표가 적혀 있었다. 작곡가가 그 모든 곡을 일주일 남짓에 작업했다는 악보 머리말의 설명을 보자 혼란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녹음 당시 두 연주자 중 한 명은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한다¹.
세르지우 아사드는 1952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동생 오다이르 아사드와 함께 십 대 시절부터 듀오로 활동해 왔다. 피아졸라, 빌라로부스, 히나스테라 등 라틴아메리카 작곡가들의 레퍼토리를 기타 두 대에 맞게 편곡해 연주하며 악기의 가능성을 넓혔고 직접 작품을 쓴 후로는 특유의 리듬을 지닌 브라질 음악을 예술음악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오다이르는 작곡은 하지 않지만 듀오뿐 아니라 솔로로도 활발히 연주한다. 두 사람의 동생인 바지 아사드는 클래식 기타를 이용하되 바닥에 누이거나 현과 지판 사이에 막대를 끼우는 등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연주하며, 가수, 보디 퍼커셔니스트, 타 아티스트의 세션으로도 활동한다. 세르지우의 딸 클라리시 아사드 또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자 가수다. 혈연으로 이어진 이들이 음악계에 함께 종사하고 저마다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가족과 공유하는 바가 그리 많지 않은 내가 보기에 아직도 의아하고 경이롭다.
반세기 넘게 활동하면서 세르지우와 오다이르 형제가 남긴 수많은 음반 중 1994년에 발매한 《여름정원 모음곡》은 영화음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현역으로 연주 활동을 하는 클래식 음악가가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사례도 그리 흔치 않지만 그 음악에 쓰인 악기가 단 기타 두 대라는 점은 더욱 놀랍다. 장면의 정동을 억누르거나 북돋우고자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영화음악의 특성을 생각하면 클래식 기타는 음량도 작고, 음의 지속 시간도 짧으며, 구현할 수 있는 음색도 폭넓지 못해 제약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음표 하나를 미약하게 발음했다가 활에 점점 힘을 실어 음량을 키울 수 있고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는 손가락이나 피크로 현을 퉁긴 후 악기의 노브를 돌리거나 이펙터를 이용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지만 클래식 기타리스트는 작게 탄현(彈絃)한 뒤 그 소리를 연장하거나 증폭할 방법이 없다. 음 하나가 금세 사라지는 데 대응하기 위해 클래식 기타 음악 작곡가나 편곡가는 다른 악기의 곡보다 악보에 음표를 많이 적어 넣거나 빠른 템포를 취해 음표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방법을 써야 한다. 내가 받은 악보에는 그런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돼 있었다.
함께 이중주를 하기로 한 선배와 연주할 만한 곡으로 〈초대〉와 〈작별〉을 추렸다. 〈초대〉는 클래식 기타 작품으로서는 드물게도 즉흥 연주를 취한 곡이다. 한 명이 8분음표와 16분음표의 조합으로 흡사 부점 리듬 같은 반주를 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유로운 선율을 얹는다. 산뜻한 텍스처가 적당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점이 처음 만난 사람과 어렵지 않게 풀어 가는 대화를 닮았다. 〈작별〉은 작곡가가 사별한 부인에게 헌정한 곡이다. 마치 약식 변주곡처럼 여덟 마디짜리 프레이즈가 모습을 바꾸며 총 네 번 되풀이되지만, 조금씩 다른 각각의 프레이즈 뒤에 동일한 여덟 마디짜리 후렴구가 붙는다. 이 후렴구에서 B음 점2분음표와 E음 4분음표 및 2분음표로 이루어진 마디가 세 번, 그다음에 또 세 번 반복되는데, 이 단순한 음표의 나열을 들으면 나는 한국 전통 장례의 고복(皐復)이라는 의식이 떠오른다. 김소월의 〈초혼〉을 다루던 고등학교 국어 시간, 상을 당한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 고인의 이름을 ‘아무개 복’이라고 세 번 외쳤다던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². 직접 본 적이 없어 상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의례가 음악과 만나 더욱 애달픈 감정을 자아냈는지도 모른다.
연주회를 마친 지 11년이 넘은 2025년 8월, 소마이 신지의 1994년 영화 〈여름정원〉을 한국 개봉일에 보았다. 세 남자아이와 할아버지가 우정을 나눈다는 시놉시스만 알고 평생 보지는 못할 거라 여겼던 영화를 실제로 감상하는 기분은 감격스럽지도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여름에 시골로 떠나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 아니라 노인이 소년들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목가적 정경 대신 생활 밀착형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며, 아름다운 교류가 벌어질 줄 알았건만 어린이들이 어른에게 일방적으로 많은 일을 해 주는 등 제멋대로 했던 짐작과 다른 면이 재미있었을 따름이다. 머릿속에 그린 환상이 깨졌다기보다는 감독이 만든 영화도 존재하면서 그와 다른 별개의 작품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듯해 달갑다.
곡을 들으며 연상한 영화의 모습이 실제와 어중간하게 닮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음악의 한계이자 가능성이 새삼 신기하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정하지 못하면서도 어떤 이미지에 입혀질 때 더없이 맞아떨어진다는 쾌감을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어쩌면 선율마다 각각 굵기가 다른 붓을 들고 있어 어떤 가락은 선명한 유화를, 어떤 멜로디는 엷은 파스텔화를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들어간 〈초대〉와 〈회상〉의 선율은 앨범 녹음보다 음높이의 변화 폭이 훨씬 좁아 집중을 도울 만큼만 분위기를 돋우고, 그 결과 관객은 음악 대신 오롯이 인물의 대사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연주자들이 영화 장면을 보면서 그 배경으로 기능할 음악을 녹음한 뒤, 영상 없이 소리만 담아야 하는 앨범에는 악곡 스스로 청취자의 감정을 일으키게끔 선율을 더 역동적으로 매만졌으리라 헤아릴 만한 대목이다. 〈작별〉 독주가 영화에 삽입된 반면 음반의 다른 수록곡에 비해 유독 애상의 정서가 짙은 〈작별〉 이중주가 누락된 것도 음악의 붓질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앞에 오는 정물이 두드러지려면 뒤를 이루는 소리의 획은 적당한 빈틈을 허용할 만큼 얇아야 한다.
영화를 보다가 내게 익숙한 음악을 감지하면서 곡의 제목과 스크린 속 상황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다른 관객은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우쭐해지기도 했다. 마트에서 나와 쭈쭈바를 먹는 할아버지를 소년들이 관찰하는 장면에서는 악보에 “느리고 피곤하게”라는 빠르기말이 적힌 〈노인〉이 흘러나오고, 할아버지가 다니는 병원에 한 아이가 따라 들어갔다가 지하에서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시신 처리 과정을 보고 기겁해 물러날 때는 〈영안실〉이 종지(終止)를 미루며 미스터리를 키운다. 할아버지의 집에 수박을 자를 칼이 없어 생선 가게 아들이 집에서 냉큼 식칼을 빼내 달려가는 광경의 뒤에서는 두 기타리스트가 꼭 한 몸이 된 듯 〈수박〉의 쏟아지는 16분음표를 매끄럽게 연주한다. 세 친구가 힘을 모아 집 마당에 웃자란 잡초를 뽑고 문짝 수리공의 설명을 듣는 시퀀스에서는 아사드 형제가 다른 앨범에서는 거의 들려준 적 없는, 노동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곧은 리듬을 띠는 〈도움의 손길〉이 펼쳐진다. 이 모든 정보를 알지 못하고 배경의 소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영화를 본 사람들도 보통 상업영화에 쓰일 만한 스코어보다 훨씬 소박한 음악이 덧칠해 준 비가시 물감 층의 깊이를 느꼈으리라 믿는다.
비유는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말하는 일이기에 거짓말이라고 쓴 적이 있다.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돌파해야 했던 그 시기에는 주어진 환경을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 묘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 기준에 따르면 오직 소리일 뿐인 음악이 구체적인 사물을 나타낸다고 주장할 수 없으니 위 문단까지 적은 문장 대부분이 삿된 말이 된다. 지금 간단히 자문하자면 매개 없는 묘사가 가능한지, 그런 직접 묘사에 흔쾌한 구석이 있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언어의 맹점은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논리를 그럴듯하게 담지하지만 논리만으로 자기 완결성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었나. 어떤 낱말이든 사전에서 찾아 그 뜻풀이에 든 단어를 다시 참조하기를 되풀이하면 어느새 아까 보았던 항목으로 돌아가고 만다. 말이 아닌 것만이 이 순환을 깰 수 있다.
아이가 세상을 처음으로 배우려 한다면 말의 박물관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가 숲을 보거나 파도를 듣거나 햇볕에 타야 한다. 눈과 귀와 피부로 쏟아지는 자극을 온전히 보존하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연 속에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곳에서 받은 느낌까지 생생히 전하기 위해서는 비약을 감행해야 한다. 이때 마음 놓고 간극을 뛰어넘도록 징검다리가 되어 주는 것은 전달자와 수용자의 공통 경험, 그리고 그 경험으로 미루어 하는 추측이 서로 다르더라도 받아들이는 도량일 테다. 겹치는 배경이 없는 이에게 자신이 겪은 바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행위는 개울을 헤엄쳐 건너는 일인 반면, 상대의 의중을 가늠할 생각 없이 알아듣게 얘기하라며 윽박지르는 행태는 돌을 밟거나 옷을 물에 적시지 말고 건너편에서 소리만 지르기를 강요하는 짓이다.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방어일 뿐이지만 말만 신봉하는 것은 수동 공격이다. 이 문장에 ‘말’ 대신 ‘소리’나 ‘색’을 넣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단 하나의 감각으로 환원되지 않는 총체이므로.
《여름정원 모음곡》은 연주 테크닉이 뛰어나고 작업 기간이 짧았다는 점보다도 말과 소리의 빈틈을 가로질러 영화 속 감각을 전하는 데 성공했다는 면에서 훨씬 귀할 듯하다. 구상에 얽매이지 않고 음표를 배열하는 기술을 중요시하는 클래식 음악계 출신의 작곡가가 이토록 시각적으로 선연한 곡들을 썼으며 이후로 비슷한 종류의 작품을 남긴 이력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모음곡은 더욱 돌연하다. 브라질 음악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매진해 온 아사드 형제의 대표작으로 이를 꼽기는 어렵겠으나, 두 사람이 정교하게 구축한 음악의 집을 바로 구경할 준비를 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 앨범이 마당이 되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소년들이 노인과 친해지기 전,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울타리 너머로 건너다보며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마음대로 넘겨짚었듯이.
영화의 배경이 시골이라고 착각했던 이유는 앨범의 표지 이미지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닮았고 하나같이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은 세 남자아이가 풀밭에 서 있는데, 크레파스로 칠한 듯 듬성듬성한 그림의 농도 때문에 옷의 소재가 모시겠거니 지레짐작하고 어린이가 모시를 도시에서 입지는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굳혀 버린 탓이다. 실제 영화에서 세 소년은 외모와 복장 모두 제각각이었다.
손발에 땀이 많은 나는 이 계절에 책을 읽기도, 자판을 치기도, 집 안에서 몇 걸음을 떼기도 버거워하지만 두 달 후에는 짧아진 낮을 아쉬워할 것이다. 이 징그러운 나날의 새벽빛과 매미 소리와 찬 커피 맛이 너무 그리워지지 않도록 해마다 사나워지는 열기가 조금이라도 꺾이기만 바랄 뿐이다.
2025. 8. 24.
¹“녹음 며칠 전, 오다이르는 어린 아들 구스타보와 놀아 주다 넘어져 다친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심하게 아프고 부은 상태였다.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예정일에 그대로 녹음을 하기로 하고 상당한 불편을 참아 가며 이틀간 계속 작업했다. 녹음이 끝나 오다이르가 진료를 받았을 때 의사는 오른손을 최소 4주는 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두 손가락이 부러졌던 것이다!” (GHA Records 홈페이지, 《여름정원 모음곡》 설명, https://www.gharecords.com/en/catalogue/natsu-no-niwa/)
²“「초혼」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행위’이다. 시의 제목 ‘초혼’은 전통적인 장례 의식의 한 절차인 고복(皐復) 또는 초혼(招魂)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고복은 상(喪)을 당했을 때 사자(死者)가 생전에 입던 옷을 들고 마당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죽은 이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의식이다. ‘초혼’은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혼이 돌아오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시 「초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시의 화자는 “떨어져 나간 앉은 산 위”, “하늘과 땅 사이”만큼 떨어져 있다. 시의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행위를 통해, 둘 사이에 놓인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시의 화자가 보여주는 간절한 호명 행위와 극복 의지는, 전통적인 초혼 의식을 배경으로 개인적인 이별의 슬픔에서 민족 정서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혼(招魂)〉 항목,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