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왜'로운 사람의 첫 글

대충 넘기지 못하는 사람의 납득을 위한 글쓰기

by posh

"왜?"

고3 기숙사 룸메이트 수빈이는 내가 말을 끝낼 때마다 "왜"라고 묻곤 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와 하루 안부를 물으면, 나는 수빈이의 "왜"에 끊임없이 이유를 대답해야 했다. 어느 날은 내 이불 색에 대한 이유까지 설명해야 했다. 언제까지 수빈이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지? 솔직히 조금 귀찮았다. (수빈아, 미안.)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수빈이가 됐다. 머릿속에 늘 "왜?"를 띄워놓고 다니는, "왜"로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도, 물건을 사용할 때도, 브랜드와 서비스를 경험할 때도, SNS와 뉴스에서 사회를 볼 때도 '결과'보다 이 반응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먼저 찾는다.


누군가가 그 말을 꺼낸 타이밍, 브랜드가 네이밍을 하는 방식, 로고의 자간, 호텔 로비의 조도와 동선. 대부분은 지나치지만, 나는 무심코 지나치지 못한다.





출처: 핀터레스트

좋고 싫음은 분명히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가 "좋아."라고 말하면 거기서 멈추질 못하고 꼬치꼬치 파고든다.

언제 좋았는데? 어디서 좋았는데? 무엇이 좋았는데?


좋았던 경험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선택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나는 감상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좋다'는 감정이 만들어진 경로를 확인하고 싶다. 감정은 갑자기 솟아난 것 같지만, 누군가의 의도와 설계 위에서 생겨나기도 하니까.


이를테면, 체크인이 길어졌는데도 불만이 덜 나오는 날이 있다. 직원이 더 친절해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종종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다. 웰컴 드링크 한 잔, 기다리는 동안 시선이 머무르는 작품, 체크인 당일 오전에 도착한 알림톡, 호텔 정보를 읽어볼 수 있는 짧은 안내물.

기다림을 '그저' 기다림으로 두지 않으면, 사람은 같은 시간을 더 짧게 체감한다.


나는 이런 디테일을 '감성'으로 부르지 않는다. 시간, 인력, 비용 같은 리소스가 들어간 '선택'으로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의도는 밤새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은 "그럴 수도 있지"하고 대충 넘길 때가 있다.


새벽 두 시에도, 다섯 시에도, 나는 머릿속에서 연구와 재판을 연다. 엄마는 왜 나에게 그 말을 했을까? 엄마의 심리, 엄마의 의도, 엄마의 인격. 상처받은 내 마음이 괜찮은지 들여다보지 않은 채, 나는 혼자 심리학자가 되었다가, 탐정이 되었다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되었다가, 가족상담가가 되었다가, 그 말이 나오게 된 환경까지 수색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재판관이 되어 판결을 내리고 끝맺음을 한다. 땅, 땅, 땅!


감정보다 분석이 앞선다. 그래서 기록한다.

글은 나에게 납득 가능한 형태로 세상을 정리하는 도구다. 정리를 해두면, 다음에는 반응이 아니라 판단으로 움직일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 덜 휘둘리고, 더 정확하게 고른다.





출처: 핀터레스트

앞으로 브런치에, 내가 일상에서 포착한 "왜"를 차곡히 쌓아가보려 한다. 사람, 브랜드, 호스피탈리티, 사회현상. 주제가 달라도 질문은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이 누군가에게는 생각의 단서가, 누군가에게는 납득의 근거가, 누군가에게는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네(?)'라는 확인이 되길 바란다.





[연재 안내]

l♡ve or hate, 인간 lab: 관계를 감정으로만 보지 않고, 구조를 분석합니다.

진상進上이 아니고, 진상眞相입니다: 전직 마케터·호텔리어의 시선으로 브랜드와 서비스의 진상을 기록합니다.

'왜'로운 사람의 '왜'노트: 일상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왜?"를 인과로 정리해 기록합니다.


To. 독자
당신도 '왜'로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적당히 넘기는 편인가요?
최근 "이건 왜 그렇지?"라고 생각한 게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p.osh

안녕하세요. p.osh입니다. 병실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투병 이후 "내가 뭘 해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았어요. 작은 일인데도 신기하게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습니다. 누군가 읽지 않더라도, 이 작은 성취감을 기록해두고 싶었어요.


p.osh는 person, patterns, proof 같은 p로 시작하는 단어들에서 딴 'p'와 제 이름의 이니셜을 붙여 만든 필명입니다. 앞으로 저의 'p'의 글을 차곡히 쌓아볼게요.

오늘 노트북을 닦다가 gram의 r이 뜯어져 gam이 됐어요. 좋은 글gam과 영gam이 함께할 거라는 좋은 시그널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