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붙잡은 8할은 글쓰기였다

한국을 떠나는 게 정답은 아닌데

by 이긍정

스물넷, 그때 나는 자신이 있었다. 한국을 떠날 자신. 그해 나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해줄 만한 책은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와 김경희 작가의 에세이 <회사가 싫어서> 딱 두 가지였다. 그 두 가지로 스물네 살이었던 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다.


패션 에디터를 꿈꿨던 그때 잡지는 사양산업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었고, 풀타임으로 일하고도 어시스턴트 월급은 30만 원이라고 했다. 당시 꿈을 생생하게 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자기 계발서가 유행이었다. 자기 계발서 말을 따르면 밤새 야근하고 사비로 택시를 타도 꿈에 가까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 됐다. 어린 취업준비생을 부려먹는 열정 페이가 판을 치고 있었고 4년제 대학을 나와도 어시스턴트를 거치지 않으면 에디터가 될 가능성은 적다고 했다. 내가 열정 페이를 자처할수록 또 다른 희생자를 배출하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기에 오랜 꿈을 신문지를 구기듯 구겨 버렸다. 그리고 나는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한국에서 꿈을 이룰 수 없으니 더 이상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6개월 동안 스웨덴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스물넷 나의 마음은 한국을 멀리 떠나 있었다. 당시 남자 친구는 사대주의에 제대로 빠졌다며 놀려댔다. 복잡한 한국의 버스에 올라타면 한산했던 스웨덴 대학 도시의 버스 풍경이 떠올랐고, 어디서든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자전거의 페달을 밟던 때를 기억했다. 몇 년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닌데 나는 한국에 돌아오니 갑갑했다. 간신히 틔운 영어 회화 실력으로 해외 취업을 간절히 바랐지만 해외 인턴 나부랭이라도 소개해줄 수 있는 교수님과의 관계는 소원했고, 유학을 떠날 집안 사정도 못 됐다. 동시에 도대체 누가 승자인지 알 수 없는 취업 경쟁에 휩쓸려 취준생의 길을 걷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 직업만큼은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준비하고 싶었다. 스물네 살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해 신문에서는 탈조선을 꿈꾸는 청년들 때문에 감소하는 청년 취업률을 염려스럽게 다루었다. 의류 디자인학과에 수석으로 들어왔던 동기 A는 나보다 한 학기 먼저 국내 패션 기업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동기 A가 피 터지는 인턴 경쟁에서 가까스로 정직원으로 붙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 나는 끝없는 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실감했다. 나는 두 번 다시 저렇게는 못 할 거야. 그래서 실패하기보다 포기하기를 택했다. 취업 전선에서 멀찌감치 떨어지기. 그러면 나는 적어도 실패한 게 아니니까. 우리 세대 보고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다며 신문과 뉴스에서는 N포 세대라 불렀다. 포기 목록에 만약 한 가지 더 추가할 게 있다면 국적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국내 기업에 문을 두드리기를 포기하고 해외 취업을 계획했다. 내가 정한 노선은 나름대로 이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외국계 패션 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자금을 모은 뒤 해외로 나가자. 해외 곳곳에 매장을 가진 기업이니 취업도 쉬울 것이고 일하며 남는 시간에 해외에서 여행하듯 살아봐야지. 아주 간단해 보였다. 매주 매장직 파트타이머 채용공고가 뜨는 글로벌 패션 회사의 사이트만 들락거렸고 듣도 보도 못한 창의적인 면접 과정을 거쳐 서울 청담에 위치한 의류 매장에 입사했다.


입사 후 나는 단호했다. 내게 필요한 건 급여와 진급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일주일에 20시간 남짓 일하다 보니 급여는 대학생 한 달 용돈 수준인 40 만원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고 진급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경력이 없다 보니 매니저로는 채용하질 않았고 어린 졸업예정자였던 내가 합격할 수 있는 직무는 고작 주당 20시간 아르바이트 일자리뿐이었다. 당시 동료들에게 내 노선에 대해 귀띔했을 때 열에 아홉은 파트타이머로 일한 경력으로는 해외 취업을 하기 힘들다고만 했다. 적어도 매니저까지는 하고 가야 받아줄 거라는 게 그나마 귀담아들을 수 있는 조언이었다.


그즈음 나는 파트타이머 경력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매장 진열과 연출을 맡은 비주얼 매니저로 진급하기로 목표를 변경했다. 하지만 오랜 경력이 있는 동료들도 모두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진급을 꿈꿨고 주 30시간 일자리를 따내는데도 치열한 경쟁이 뒤따랐다. 그때부터 나는 매니저 눈에 들기 위해 수능을 준비하는 모범생처럼 애쓰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아르바이트생이 알지 않아도 될 정보들을 꼼꼼히 메모해두었다. 출퇴근마다 메모장을 꺼내 입으로 되뇌며 외웠다. 미팅 때 매니저가 불시에 물어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기 위함이었다.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 날카로운 성격의 매니저 AJ는 불같은 사람이었다. 평소 호탕한 성격의 그녀는 일할 때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었던 언니 J는 그녀를 조심하라고 내게 일러주었다. 미팅 때마다 그녀가 시시때때로 업데이트되는 매장 상황에 대해 불시로 물어보고 모르는 직원들에겐 면박을 준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본 순간, 그 타깃은 어느새 내가 되어있었다. 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진흙탕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노력하면 그녀는 다그쳤고 화를 냈다.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잘하려고 앞선 마음이 괴로운 마음으로 얼룩져 우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료들은 매니저가 없는 자리에선 나를 위로했고 모두가 보는 미팅 자리에서 나를 찍어 내리면 눈알만 굴렸다. 그때 나는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상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신입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목표는 점차 흐릿해져 갔다. 나는 매니저 AJ 눈 밖에 난 탓에 진급에서 누락되었고 그녀에게 예쁨 받는 동료들은 승승장구했다. 나는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외국계 기업에서조차 라인 타기는 필수인 듯 느껴져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럴수록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매장 일에 점차 질려버렸다.


나를 괴롭히는 매니저를 피해 계열사의 다른 브랜드로 이직했을 때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매니저에게 추천서를 받아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추천서 덕분에 비교적 쉽게 가자마자 일을 구했고 빠르게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내가 계획한 해외 취업 로드를 그대로 밟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계획했던 일을 척척 해내는 그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가 그 마음을 서비스직은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덮어버렸다. 내가 갖지 못할 걸 가진 그들이 미웠다.



그즈음 나는 회사를 나왔다. 매니저가 되기까지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고 느꼈을 때 내가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퇴사할 때쯤 우연히 가게 된 국제도서전에서 나는 은유 작가의 책 <글쓰기의 최전선>을 만났고 첫 회사에 다니며 다친 내 마음을 글로 풀어보고 싶었다. 일하며 얻은 생채기를 더듬더듬 글로 써내면서 나는 자주 울었다. 밟히고 구겨진 내 마음을 글로 표현했는데 그동안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던 위로를 내가 털어놓은 글에서 얻었다. 6개월 동안 일을 쉬면서 글쓰기를 배웠다. 글을 쓰기 전엔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기쁨이 점차 깊고 넓어졌다. 얼마 뒤 나는 잡지 에디터로 일자리를 구했다. 운이 좋았다.



에디터로 일을 시작한 뒤에도 꾸준히 쓰는 삶을 살고 싶어 글쓰기 모임을 통해 글을 썼다. 우리는 3주에 한 번 같은 책을 읽고 한 편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삶의 유일한 기쁨이 책 읽고 쓰는 삶인 것처럼 살았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도서관을 찾았고 매달 다른 책을 끼고 감응하는 문장에 주욱 밑줄을 그었다. 우리는 모여서 자주, 함께 울었다. 글 덕분에 한국에서 사는 삶이 만족스럽게 변했갔다.


잡지 에디터로 일한 지 2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1년간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돌아온 옛 동료 H는 호주 워킹 홀리데이가 굉장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호주로 다시 돌아가 대학에 진학할 거라고도 했다. 한국에서는 답이 없다면서. 그녀는 모두가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봐야 한다며 내게 너도 어서 떠나라고 한국은 너와 맞지 않는다고 점쟁이가 점괘를 풀어내듯 그녀는 나에 대해 전부 안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호주에서 경험으로 배운 것과 바뀐 가치관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했다.


그런데 어쩐지 한국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던 3년 전의 내 마음과 지금의 나는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마음 한켠에 버려두었던 에디터의 꿈을 운 좋게도 이루었고 글쓰기를 시작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어쩌면 읽고 쓰는 삶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한국을 떠날 마음이 차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고 쓰는 삶이 나를 한국에 뿌리내리게 만들었고 단단히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포기하고 싶지 않아 졌는데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는 게 정답인 것처럼 조언했다. 분명 3년 전에는 내게도 정답이었던 삶이 더 이상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놀라웠다. 나를 한국에 붙잡은 8할은 글쓰기였다.


출근길 압구정 로데오 역에 내리면 지난날 일하던 의류 매장이 눈길에 밟힌다. 그곳을 볼 때면 부단히도 애썼던, 당장에라도 한국 국적을 버리고 떠나고 싶었던 스물네 살의 어린 내가 보인다.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에서 사는 삶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한국에서 누리는 행복도 충분히 괜찮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