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트롯>을 보다가 눈물이 비죽 새어 나왔다

엄마의 노랫소리

by 이긍정

지난 설날, 차례를 다 지내고 엄마와 이모와 떡국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사주팔자를 종교 수준으로 믿는 이모와 엄마는 “올해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하면서 10년 전 용하다는 스님에게 사주팔자를 본 일화를 또 꺼냈다. "뽀영이 사주는 보자마자 이런 사주는 돈을 더 내야 된다고 사주가 정말 좋다고 하셨어~ 너희 오빠는 돈을 많이 번다고 하시고~" 스님이 엄마는 남자 친구 안 생긴데? 하고 묻자 엄마 덕을 보길 바라는 사람이 꼬인다고. 또 결혼하진 말고 남자 친구로만 만나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럼 엄마는 아빠가 첫사랑이야?”하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어쩐지 첫사랑과의 사랑이 안타깝게 마무리된 것 같아 엄마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얼마 전 TV조선에서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이 시작했다. 남자 트로트 지원자 중에 1등을 가려 트로트 신인을 뽑는 경쟁 프로그램이었다. 지난해 엄마와 함께 나란히 앉아 <미스 트롯>을 재밌게 본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보기를 통해 첫 화부터 엄마와 시청했다. 2화부터는 이모가 추가되었고 그녀들은 소파와 안락의자에 나란히 앉아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유명한 트로트를 제외하곤 아는 노래가 드물었는데 그녀들은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처음엔 몇 곡만 아는 거겠지 싶었는데 아주 고릿적 정통 트로트가 나와도 그녀들은 흥얼거리며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그녀들의 방대한 플레이리스트에 놀라 “설마 이 노래도 안다고?” 하고 물으면 그녀들은 “옛날에 많이 듣던 노래지!” 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평소 트로트를 즐겨 듣진 않는데 묘하게 중독성이 강했다. 그녀들과 함께 앉아 듣고 있노라면 착착 감기는 노래의 맛이 흥겨웠다. 지난 목요일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가 <미스터 트롯>을 하고 있다기에 자취방에서 아이패드로 방송을 틀었다. 우연히 보던 중 엄마가 자주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왔고 익숙한 가사와 멜로디에 시선을 고정했다. 김창남의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처음엔 제목을 보곤 웬 동화 속 이야기? 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릴 적부터 엄마가 즐겨 부르던 노래 멜로디라고 알아차리자 가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던 날

어느 골짜기 숲을 지나서 단둘이 처음 만났죠

하늘의 뜻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면서

행복이라는 봇짐을 메고 눈부신 사랑을 했죠

그러던 그 어느 날

선녀가 떠나갔어요

하늘 높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저 멀리 떠나갔어요

선녀를 찾아 주세요 나무꾼의 그 얘기가

사랑을 잃은 이내 가슴에 아련히 젖어 오네요


엄마가 설거지할 때나 집 안 청소를 할 때 부르던 노래가 아무 의미 없이 부르는 노래인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엄마의 인생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에게 대입해보면 엄마에게 선녀는 아빠고 엄마는 나무꾼이었다. 동화 속 나무꾼처럼 엄마는 현실을 계속 살아가야만 했고 아빠는 저 멀리 하늘나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엄마 인생에서 유일했던 사랑이 떠나갔으니 그 노래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비죽 새어 나왔다.


<미스터 트롯>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장면은 하나가 더 있었다. 참가자 중에 5년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두 아이의 아빠가 나왔을 때였다. 방송 초반엔 나이, 직업 특징별로 한자리에 모아 경연을 진행했다. 애 아빠들은 <대디부>라고 적힌 방에 모여 앉았다. 참가자들은 대기 중 심심했는지 각자 아내들에게 '사랑해'라고 메시지를 보내보자고 했다. 중년의 참가자는 "나는 열외!"라고 외쳤지만,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빼지 말라며 재밌을 것 같다며 흥을 돋웠다. 중년 참가자의 모습에서 어쩐지 그간 여러 번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엄마가 떠올랐고, 기나긴 터널 같은 시간을 건너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느라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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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에 차례상 차림을 도우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도 이제 20년 넘게 제사상 차리고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사람이 회사도 20년쯤 다니고 나면 은퇴하기 마련인데 엄마도 아빠로부터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는 내 말에 무슨 그런 소리가 있냐며 웃었다. “그래도 계속해야지” 나는 됐다는 엄마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답했다. 엄마가 먼 훗날 세상을 떠났을 땐 이렇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아빠는 엄마랑 몇 년 살았다고 20년 넘게 정성 들인 제사상 받는 게 말이 되냐고. 그 정도면 전생에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게 아니냐고 말하자 엄마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렇긴 하지” 하고 답했다.


차례를 지내고 엄마와 이모는 달력을 넘겨보며 올해 아빠 기일은 언제더라? 하면서 음력 날짜를 계산했다. “가만 보자.. 5월 14일이면 어머 어머! 어떡해! 제일 바쁜 7월에 걸렸네!” 여름 장사를 하는 엄마와 이모에게 여름은 극성수기였다. 이렇게 한여름에 기일이 걸린 적은 없었는데 윤달이 끼어서 그렇다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럼 이번엔 아빠한테 바빠서 안 되겠다고 얘기해!” 하고 내가 답하자 “어떻게 그래~ 그래도 제사 지내야지” 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빠는 전생에 3대가 덕을 푸짐하게도 쌓았는지도 모르겠다.




cover Photo by Tamas Tuzes-Kata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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