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야구의 한을 풀다.
정규시즌 동안 실력을 검증받은 다섯 팀이 펼치는 화려한 가을야구는, 응원팀에 상관없이 10개구단 팬들을 모두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린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을야구는 팬들을 울리기도 한다. 어쨌든 간에 다섯 팀 중 네 팀은 조연이 됨으로써 쓸쓸한 퇴장을 한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명승부를 펼치든, 코칭스태프나 선수 개개인의 실책으로 인해 모두의 주목 속에서 옹졸한 경기력을 보여주든. 지난 1년간 노력해온 선수들이 고맙긴 하지만, 화가 나고, 슬프고, 씁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팬들은 상대 팀의 팬들과 선수들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내년에야말로 내 응원 팀이 가을야구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마음먹게 된다.
하지만 마음먹는 것과 이후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별개이다. 물론 자신의 응원팀이 이듬해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모두의 경악과 축하 속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우승에 실패하거나 한술 더 떠서 이전해보다 더 엉망진창인 시즌을 보낸다. 그렇게 몇 년을 허비하다 보면 어느새 주축 선수들의 잇따른 노쇠화 및 이탈로 아예 하위권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기 일쑤다. 그렇게 '지난가을 밤의 복수'는 완전히 멀어져 버린다. 당연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팬들의 가슴 속은 썩어들어간다.
그런데 여기,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며 5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데다가, 포스트시즌에서 생겼던 응어리를 대부분 청산하고 마지막 복수를 위해 잠실 야구장으로 향하는 팀 하나가 있다. 바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온 키움 히어로즈다.
LG 트윈스만 만나면 유독 경기가 순탄치 않게 흘러가게 된 것은,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한때 키움과 LG는 만나기만 하면 명승부를 펼쳐 둘의 더비가 '엘넥라시코'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그 승부의 결과는 대부분 키움의 승리였다. 하지만 2016년부터 두 팀의 관계는 달라지고 말았다. 정규시즌에서 6승 10패의 성적을 거두며 5년 만의 상대 전적 열세를 기록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1승 3패로 업셋을 당하고 말았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간 10승 1무 21패를 거뒀다. 오죽하면 키움 팬들은 1위 팀보다 LG가 더 껄끄러울 정도였다. 올해에는 정규시즌에 LG를 상대로 9승 7패를 거두며 오랜만에 다시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3년 만에 다시 LG와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LG는 NC 다이노스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단 한 경기 만에 끝냈기에 기세가 올라온 상황이었다. 심지어 감독은 5년 전 한국시리즈에서 격의 차이를 보여주며 넥센을 무릎 꿇렸던 류중일. 2019년 KBO리그 준플레이오프는, 자칫하면 키움 히어로즈에게 악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영웅들은 악몽을 이겨냈다. 단기전 운영 능력의 차이를 보여줬던 류중일 감독과의 지략전, 그리고 3년 전 키움에 업셋을 해냈음은 물론 창단 이래 단 한 번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LG를 모두 이겨냈다. 그것도, 가을만 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가을 바보', '새가슴' 따위의 오명을 얻었던 박병호가 폭발하면서 말이다(박병호 2019 KBO리그 준플레이오프 성적 16타수 6안타 2볼넷 3홈런 6타점, OPS(출루율+장타율) 1.381).
불펜진의 수준 차이가 시리즈의 승부를 갈랐다. 키움은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단 다섯 명의 외야수를 넣는 대신, 네 명의 선발투수와 열 명의 불펜투수를 포함하는 기행을 보였다. 그리고 이 불펜 투수들을 모두 적재적소의 상황에서 골고루 활용했다. 1차전에서는 7회초 2사 1, 2루의 위기에서 조상우를 올려 이닝을 끝내게 한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조상우를 내리고 김상수와 오주원을 차례대로 등판시키며 정규이닝을 끝냈다. 한편 LG는 에이스 타일러 윌슨이 8이닝을 책임졌으나, 9회말 등판한 마무리 고우석이 단 1구 만에 피홈런을 허용하며 패배하고 말았다. 2차전은 키움 불펜진의 진가가 드러난 경기였다. 선발투수 에릭 요키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3회에 강판시키고, 이후 여덟 명의 불펜 투수를 올려 7.2이닝 동안 단 한 점을 허용했다. LG는 선발 차우찬이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불펜진이 무너지며 패배했다. 4차전은 양 팀 선발이 모두 1이닝만 소화하고 강판당했다(최원태 1이닝 4실점, 임찬규 1이닝 2실점). 이후 키움의 불펜진은 한 점을, LG의 불펜진은 8점을 내줬다. 분명 고우석을 필두로 한 LG의 승리조는 위력적이었지만, 시즌 내내 철저히 관리받은 키움의 벌떼 불펜을 이길 수 없었다.
'박병호가 있기에' 준플레이오프를 가져올 수 있었다.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단 한 경기도 박병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경기가 없었다. 1차전에서는 9회말 고우석의 154km 강속구를 받아쳐 끝내기 홈런을 터뜨린 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됐다. 2차전에서는 차우찬에게 틀어막혀 3점 차로 끌려가고 있던 8회말, 전날 고우석과 똑같은 코스로 들오ㅓ오는 김대현의 146km 직구를 주월 투런포로 만들며 분위기를 가져왔다. 4차전에서는 솔로홈런 포함 3안타 2타점을 기록했고 5회말 2사 2, 3루의 위기에서 정주현의 총알 같은 타구를 잡아내 실점을 막는 등 공수 양면에서 날아다녔다. 그야말로 '박병호의 시리즈'였다.
3년 전 가을의 악몽을 씻어냄과 동시에 5년 전 한국시리즈 승장에게 소소한 복수(?)에 성공했다. 준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오주원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시리즈를 끝내자, SBS 정우영 캐스터는 "3년 전 가을의 설욕을 성공한 키움 히어로즈가, 이제 지난해의 빛을 갚기 위해 인천으로 향합니다!"라고 소리쳤다. 모두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클로징 멘트였다. 하지만 이때까지 키움 팬들은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준플레이오프는 복수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SK 와이번스와는 이전에도 한 차례 가을야구에서 만난 적이 있었으나, 양 팀이 모든 것을 걸고 맞붙었던 것은 작년 플레이오프 때다. 이미 정규시즌에 한 차례 벤치클리어링이 있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1차전과 2차전에서 두 차례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져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처음 두 경기를 SK가 내리 이기며 스윕으로 끝나는 듯했으나, 고척에서 열린 3차전과 4차전을 키움이 가져가며 승부의 행방이 불분명해졌다. 5차전에서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끝을 알 수 없는 명승부가 펼쳐졌다. 10개 구단 팬들을 모두 열광케 했던 '가을 잔치'를 벌였다.
결국 한 끗 차이로 SK 와이번스가 승리했다. 언론에서는 '승리만큼 빛났던 패배'라며 키움을 칭찬했다. 팬들 또한 크게 선수단을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들과 코치진들은 자신들이 '잘 패배한 경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0회말 끝내기 홈런을 맞았던 신재영은 감정이 복받쳐 그만 앉은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정석 감독은 선수들이 신재영을 달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 시즌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모두가 잠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장정석 감독만큼은 다음 해 가을을 생각 중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불펜진의 전원 필승조화', 그리고 '투수들의 SK 주자들에 대한 철저한 견제'였다. '불펜진의 전원 필승조화'는 한참 전부터 계획되었던 일이다. 장정석 감독은 이미 7월 초에 "양질의 불펜진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 밝힌 바 있었고, 그 이후 여러 차례의 불펜 데이를 진행하며 실제로 가능한 것임을 보였다. 준플레이오프에서부터 시작해 플레이오프 때 SK와 비교되며 더욱 빛을 발했다.
'투수들의 SK 주자들에 대한 철저한 견제'는 시즌 후반부터 준비됐다. SK에게 패배한 경기를 분석해 모든 투수들이 슬라이드 스텝을 신경 쓰고 주자 견제 횟수도 불규칙적으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등의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경기 후반 빛을 발하는 SK의 발야구를 봉쇄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작전을 막는 것 이상의 피해를 줬다. SK가 대주자 작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외야수만 여덟 명이나 엔트리에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SK는 여전히 강팀이었지만, 키움은 작년보다 몇 보는 더 진보한 팀이 되었다. 그 결과 키움은 플레이오프 무패의 SK를 3대 0으로 셧아웃시킬 수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그리고 그때 그 멤버들에게 가을밤의 복수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통쾌한 일이다. 하지만 키움 팬들이 대기권을 뚫고 날아갈 듯이 기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염경엽 감독에 대한 3년에 걸쳐 응어리진 분노의 감정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염경엽, 그가 누구인가. 넥센 감독 시절 한 번도 빠짐없이 소속팀을 가을야구에 보내며 명장 반열에 들었으나, 단기전에서는 이해 못 할 경기 운영으로 팬들에게 우승 실패의 씁쓸함만을 알려줬던 감독이 아닌가. 겉으로는 관리 야구를 지향하며 마치 김성근 감독의 대책점에 서있는 감독처럼 이미지메이킹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김성근 감독도 웃고 갈 혹사 끝에 국가대표 영건 투수들을 연이어 수술대에 올렸던 장본인이 아닌가. 2016년에는 시즌 중후반부터 코치들을 데리고 다른 팀으로 이적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간접적으로 팀 분위기를 망쳤고, 입으로는 "자꾸 흔들면 다 내려놓고 떠나겠다", "내 야구 관에 밀약과 배신은 없다", "어떤 팀도 가지 않는 것이 넥센에 대한 예의와 도리" 등의 명언을 남기며 필사적으로 부정했으나, 가을야구 태업 후 자진사퇴를 하고 SK 단장으로 취임하며 소문이 맞았음을 입증한 감독이 아닌가.
이렇게 완벽한 복수의 무대는 흔치 않았다. 남은 것은 모든야구 팬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염경엽 감독에게 후련한 복수에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복수에 완벽히 성공했다. 플레이오프 시작 전 미디어데이부터 3차전이 끝날 때까지, 키움 팬들은 마치 사이다를 연달아 마시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미디어데이 때부터 해석하기에 따라 골 때리는 발언이 나왔다. 양 감독 서로에게 덕담을 부탁한다는 기자의 질문에, 장정석 감독이 "몸을 우선 생각하셔야 하는데 입이 짧으시다 보니 걱정된다. 잘 드시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하기 직전까지 현대 시절 염경엽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다소 뜬금없게 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염경엽 감독의 별명이 제갈량이며,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 때 사마의에게 사자를 통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으니 어떻게 살 수 있겠소?(食少事煩)"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당시 제갈량은 과로와 병으로 사망했으며, 촉군은 결국 북벌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리즈 내내 염경엽과 장정석의 차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1차전에서는 양 팀 선발투수가 모두 6이닝 이상을 소화하지 못하고 타선도 좀처럼 터지질 않으며 불펜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두 팀이 합쳐 15명의 불펜 투수를 올린 것에 비해 타격은 SK가 훨씬 컸다. 키움은 오주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투수가 다음 날 경기에 등판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적은 공을 던진 데 비해(8명이 5.2이닝 동안 76구), SK는 대부분의 불펜 투수가 20구 이상을 던졌다(7명이 6이닝 147구). 이는 다음날 경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펜이 무리한 점을 고려해 산체스를 길게 끌고 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타순이 일순한 뒤부터 철저히 직구를 노리고 들어가는 키움의 타선이, 산체스의 광속구를 공략하는 데 성공해 4회까지 6점을 뽑아냈다. 다행히 SK의 타선도 폭발해 역전에 성공하고 김태훈과 정영일이 3이닝 무실점을 합작했으나, 이후 서진용과 문승원이 무너지며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마치 넥센 시절 포스트시즌에서 조상우, 한현희, 손승락만 주구장창 기용하고 투수교체도 늦게 하다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나마 1차전과 2차전이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이었다면, 3차전은 초장부터 승부가 결정 난 경기였다. 염경엽이 가을야구를 위해 나쁘지 않았던 브록 다익손을 웨이버 공시하고 데려온 헨리 소사는, 3이닝 5피안타 4실점으로 일찍이 무너졌다. 한편 시즌 초반 브록 다익손처럼 '나쁘지 않지만 애매'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키움이 마지막까지 믿고 함께한 에릭 요키시는, 경기 초반 야수진의 실책 대행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공을 던지며 제 몫을 해냈다.
4년 전 준플레이오프에서 "(필승조 3명을 제외한 불펜 투수들) 걔네가 나가서 뭘 하겠냐? 잘 던지면 이상한 거고, 못하면 당연한 거다"라고 말했던 염경엽은, 마지막 경기까지 필승조를 연달아 투입했다. 그리고 그 필승조는 5실점을 합작하며 SK의 추격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렸다. 한편 시리즈 내내 '걔네'라고 분류될 투수들을 유연히 활용했던 장정석 감독은, 마지막 이닝에 SK전 피OPS가 8할에 육박했던 윤영삼을 올려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5년 전 키움이 NC에게 6회까지 24점을 내주며 24대 5로 콜드패했던 날, 염경엽이 '잘 지는 경기'를 위해 12실점을 하든 말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운드 위에 올려놨던 바로 그 투수였다.
흔히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게도 영웅들은 군자의 그릇이 되지는 못했나 보다. 10년은커녕 5년도 안 돼 화끈한 복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2019년 10월 17일, 키움 히어로즈는 완벽한 복수에 성공함과 동시에 '염경엽'의 실체를 KBO리그에 전부 폭로했다.
화려한 2주일이었다. 영웅들은 준비돼있었고, 때문에 강했고, 그 강함 덕에 5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며, 또한 키움 팬들의 한을 풀어줬다. 하지만 이것으로 아직 끝이 아니다. 진정한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우승이 필요하다.
두산 베어스는 몇 번이고 키움의 가을 길을 막아섰던 팀이다. 2013년 키움이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 때는 리버스 스윕이라는 충격을, 2015년에는 4차전에서 9점 차를 뒤집는 역전승이라는 충격을 남겨줬다.
그러나 가을에서 마지막으로 두산을 만난 지도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며, 그 기간 동안 영웅군단은 완벽히 다른 팀으로 변모했다. 우승의 자격은 충분히 갖췄다. 이번에야말로 두산에 승리해 우승의 기쁨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