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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Oct 23. 2019

영웅들은 포기를 모른다.

2019.10.22 한국시리즈 1차전

  '4회 말 무사만루 무득점', '실책 퍼레이드', '우승 확률 25.7%'. 키움 팬들 시점에서 1차전 경기를 요약해보라고 한다면, 어쩌면 이 짧은 세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각도를 조금 비틀어서 생각해보자. 어제 영웅들은 패색이 짙었던 상황을 극복하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체념하는 일 없이 승리를 갈망했다.




"웨하스 타격 훈련이 익숙해지면 쿠크다스도 도전하겠다"던 김규민은, 팬들의 멘탈을 쿠크다스로 만드는 수비를 선보였다.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듯이, 한국시리즈 또한 많이 치러본 팀이 잘하는 것일까. 경기 초반부터 두산 베어스가 조금도 위축되는 일 없이 뜨거운 방망이를 휘둘렀고, 키움 히어로즈는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을 남발하며 두산의 타선을 도왔다.


  1회 초 김하성이 안타를 치고 나간 뒤 도루에 성공하고 박병호가 적시타를 쳐내며 선취점을 얻어냈다. 그러나 2회 말 선발투수 에릭 요키시가 흔들리며 곧바로 역전을 허용했다. 선두타자 김재환을 초구 2루수 땅볼로 잡아냈지만, 곧이어 오재일, 허경민, 최주환에게 연속 안타를 맞으며 1사 만루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며 밀어내기 볼넷과 적시타로 2실점 했다.

  4회에는 공수 양면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이정후와 안타와 박병호의 2루타, 그리고 제리 샌즈의 볼넷으로 무사 만루의 찬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웅빈의 얕은 외야 뜬공과 김규민의 병살타에 힘입어 무득점으로 이닝을 마쳤다. 2회에도 하위타선에 공략당했던 요키시는 다시 한 번 하위타선에게 얻어맞았으며, 주자가 도루하는 상황을 파악 못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다 포수의 2루 송구에 턱을 맞기까지 했다. 한편 직전 공격에서 무사만루 무득점을 합작했던 김웅빈과 김규민은, 각각 3루수 앞 땅볼 타구의 포구에 실패하고 좌전 안타를 무리하게 잡으려다 뒤로 흘리며 3점을 내줬다.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연속해서 펼쳐졌다. 점수차도 한국시리즈 1차전 경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6대 1. 겨우 4회 말이 끝났을 때의 스코어였다.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9점 차로 시리즈를 셧아웃당했던 SK 와이번스도, 5년 전 삼성에게 11대 1로 패배하며 준우승의 쓴맛을 받아들여야 했던 넥센 히어로즈도. 4회까지는 불과 4실점밖에 하지 않았다. 5점 차는 그 정도의 의미를 갖는 스코어였다. 만약 1차전에서 공수 모두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며 대패한다면, 분위기가 중요한 단기전 특성상 시리즈 내내 불리한 양상으로 흘러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왕 올라간 거 지면 아쉽지 않겠느냐"라며 투지를 불태우던 이정후는, 절대 아쉽지 않은 KS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그렇기에, 영웅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작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대비한 두산이지만, 철옹성에도 분명 틈새는 있었다. 선수들은 그 허점을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두산의 선발투수 조쉬 린드블럼이 많은 투구 수로 인해 일찍 내려간 점을 놓치지 않았다. 6회 초, 두산은 키움의 타선이 살아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불펜 에이스 윤명준을 올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선두타자 이정후가 총알 같은 타구와 빠른 발로써 출루하는 데 성공했고, 박병호가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충격의 4회 초 이후 2이닝 만에 잡은 득점권 찬스.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샌즈가 투수의 초구 슬라이더를 노려 2유간을 가르는 적시타를 쳐냈다. 이로써 점수차는 4점차로 좁혀졌다.

  윤명준이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통타당하자, 두산은 베테랑 불펜 투수 이현승을 투입했다. 올 시즌 정규시즌 성적은 9경기 6이닝 2실점으로 평범했으나, 통산 한국시리즈 성적이 15이닝 3실점 1자책 평균자책점 0.62에 달할 정도로 큰 경기에서 강한 투수였다. 하지만 불붙은 키움 타선이 빅 게임 피쳐를 이겨냈다. 김웅빈이 외야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김규민이 볼넷으로 출루하며 일사만루가 되었다. 그리고 8번 타자 박동원의 잡아당긴 타구가 3유간을 꿰뚫을 기세로 나아갔다. 아쉽게도 3루수 허경민이 몸을 던져 공을 잡아냈으나, 타자 주자 포함 모든 주자가 아웃당하지 않고 진루하기에는 충분한 공이었다. 이후 9번 타자 김혜성이 우중간을 꿰뚫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희생 플라이를 쳐내며 한 점 더 보탰다. 이로써 스코어는 4대 6, 점수 차는 2점 차. 



7회초 2사 2루의 찬스에서 대타로 나와 동점 적시타를 쳐낸 송성문이 킹콩 세레머니를 선보이고 있다.

  7회에도 키움의 맹공은 계속됐다. 약간의 행운이 따랐다. 선두타자 김하성이 3구를 타격해 내야 뜬공을 만들어냈으나, 포수와 1루수가 주춤하다가 타구를 잡아내지 못해 출루에 성공했다. 다음 타자 이정후가 당연하다는 듯이 안타를 쳐냈고, 박병호의 우익수 플라이 때 2루 주자 김하성이 3루까지 진루했다. 그리고 샌즈의 타석 때 1루 주자 이정후가 도루에 성공하며 1사 2, 3루의 찬스를 잡았다.

  샌즈의 3루 쪽으로 바운드가 큰 땅볼성 타구를 쳐냈고 이때 김하성이 홈을 밟으며 한 점 차까지 따라잡았지만, 결국 공이 내야를 빠져나가지 못해 아웃 카운트가 하나 더 늘어난 점은 아쉬웠다. 2사, 주자 2루의 기회. 놓치면 두고두고 아쉬울 상황에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선 송성문이 슬라이더를 받아쳐 좌전 안타를 만들어냈다. 2루 주자 이정후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6대 6이 되었다. 


  2013년부터 올해까지 총 여섯 번의 가을야구를 하는 동안, 경기 초반에 이토록 패색이 짙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히어로즈는 그런 경기를 기어이 리셋시켰다. 대타로 나와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린 뒤 1루 베이스에 안착한 송성문은, 어울리지 않는 위엄 있는 표정을 짓더니 가슴팍을 양 주먹으로 두드리며 '킹콩'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이는 마치 머리에 미사일 수십 방을 직격당하고도 쓰러지지 않는 킹콩처럼, 히어로즈 또한 남은 한국시리즈 경기에서도 숱한 위기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야구를 하면서 요즘같은 단합력은 처음 봤다는 이승호. 그는 팀을 뭉치게 하는 구원자로서 우뚝설 수 있을까.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중간 과정이 얼마나 좋았든 간에, 결국 키움은 두산에게 한국시리즈 1차전을 내주고 말았다. 경기 후반 함덕주와 이용찬을 공략하지 못했고, 9회 말 김하성이 내야 뜬공 타구를 처리하지 못해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두산이 연장까지 갈 것도 없이 경기를 끝내버렸다. 한국시리즈에 오기까지, 그리고 1차전에서도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키움이기에 더욱더 아쉬운 1패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선수단의 집중력을 엿볼 수 있는 경기이기도 했다. 오재일의 끝내기 안타 직후, 박병호가 심판에게 오재일의 오버런에 대한 항의를 하는 장면이 그랬다. 원아웃 상황이기에 오재일이 아웃 처리돼도 경기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기에, "끝내기 세레머니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난 여론도 나왔다. 그러나 오재일의 타구가 외야로 날아가는 순간 선수들이 체념하고 경기를 포기했다면 결코 포착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2013년 준PO 3차전에서 자기 혼자 경기를 포기하고 홈에 돌아가다가 송지만의 혼신의 레이저 송구를 못 받았던 박동원이 그랬다). 사소하지만, 이 어필로 인해 기록이 수정되며 오주원의 성적이 0.1이닝 1자책에서 0.2이닝 무자책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1차전 경기의 패배는 총력전을 한 만큼 충격도 크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그래도 6대 1로 머리채 잡히고 질질 끌려가던 분위기를 뒤집지 못했을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다. 수비가 많이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이왕 맞을 매 일찍 맞는 게 낫다고 한 점 차로 앞선 5차전 9회 말에 실책하는 것보다는 괜찮다.

  2차전에서도 "두산전에서 괜찮은 성적을 냈다"는 이유로, 에이스 제이크 브리검이 아닌 좌완 유망주 이승호가 선발투수로 등판한다. 수많은 팬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으며 김태형 감독 또한 미디어데이 때 그랬던 것처럼 선발투수 발표를 듣고 눈알을 굴리며 당황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허를 찌르는 데이터 야구로 큰 출혈 없이 한국시리즈 무대까지 올라온 장정석 감독이니만큼, 이번에도 의외의 결과로써 키움 팬들을 기쁘게 해주리라 믿는다. 부디 키움 히어로즈가 2차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척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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