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성실 Oct 27. 2019

영웅, 무릎 꿇다.

[2019 한국시리즈]

  2013년 키움 히어로즈가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 때부터, 2018년 넥센이라는 이름을 달고 마지막 가을야구를 치렀을 때까지. 키움의 가을은 언제나 새드 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조상우의 혹사 끝에 끝난 2015년과 감독의 자진 사퇴로 끝났던 2016년을 제외하면, 팬들이 영웅들을 질책했던 시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승리의 문턱을 끝끝내 넘지 못하고 분함의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가을바람을 뜨겁게 달군 투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이전 포스팅에서 가을야구는 팬들을 울리는 무대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응원팀이 멋진 경기를 펼쳤을 때의 이야기다. 2013년 히어로즈는 준플레이오프에서 두 번의 끝내기 안타로 2승을 선점했으며, 마지막 경기에서 9회 말 투아웃에 동점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자신들의 저력을 보여줬다. 2014년은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으며,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도 만들어냈다. 2018년 플레이오프에서는 2연패로 몰려있는 상황에서 리버스 스윕 직전까지 갔다. 9회 초 투아웃에서 터진 박병호의 투런포는 모두의 눈물샘을 폭파했다.


  5년 만의 한국시리즈. 영웅들은 다른 의미로 팬들을 울렸다. 준플레이오프 때부터 플레이오프까지 보여줬던 '본투비 히어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제 단 4승만 더 하면 되는데,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영웅들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토종 에이스의 역할을 못한 최원태.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준플레이오프부터 플레이오프까지, 지난 2주일은 마치 꿈만 같았다. 장정석 감독의 투수 교체는 모두 맞아떨어졌고, 감독의 지휘하에 마운드에 오른 불펜 투수들은 믿음에 부응했으며, 타자들은 침묵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승리에 필요한 점수만큼을 뽑아냈다. 그 결과 준플레이오프에서 매 경기 명승부를 펼친 끝에 시리즈를 가져왔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짜릿한 업셋에 성공했다.

  그 기적적인 경기력 속에서 팬들은 한 마리 흐물흐물하고 투명한 해파리가 되어 영웅들을 사랑했다. 중계석에서 탄식하는 허구연도 승리 요괴라며 사랑했다. 긴 저녁 그림자처럼 히어로즈의 단점은 여전했다. 한국시리즈에 들어서자 깜짝 놀랄 만큼 달라진 경기력을 보여줬다. 용케도, 같은 선수단으로.


  플레이오프까지만 해도 신들린 투수 운용으로 모두를 감탄하게 했던 장정석 감독은, 막상 한국시리즈에 들어서자 어딘가 어리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칭찬받을 때도 '선수들을 위해 일일 DJ가 되어 음악 선곡을 했다'는 기사나 나오던 홍원기 수비 코치는, 이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재영 주루 코치는 4점 차로 뒤진 3차전 7회 말 무사만루에서 이해할 수 없는 주루 사인을 내며, 팀의 무득점 영봉패를 초래했다.

  한현희는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매 경기 등판하며 3연투했지만, 이와는 별개로 필승조의 역할을 해내지는 못했다. 제이크 브리검과 에릭 요키시는 원투펀치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원태는 준PO와 PO에 이어 3패로 몰린 KS 4차전에서도 1이닝 3실점으로 무너졌다. 코치진은 그의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을 기대해 시즌 내내 관리했던 것이지만, 그는 끝끝내 침묵했다.

  데뷔 이래 4년간 유의미한 성장을 하지 못한 주효상은, 한국시리즈에서는 그저 엔트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박동원은 포수를 평가할 때 타격 성적만 봐서는 안 됨을 알려줬다. 1년 전 플레이오프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질렀던 김혜성은, 이번 시리즈에서도 중요한 상황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웅빈은 1차전에서 프로팀의 3루수로서 보여줘서는 안 될 실책을 범했고, 그 결과 1차전을 끝으로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송성문은 과한 언행으로 물의를 빚었고, 김규민은 공수 양면에서 왜 자신이 주전 외야수여서는 안되는지를 증명했다. 김하성은 1차전 9회 말 히드랍더볼을 시전하며 끝내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후 시리즈 내내 실책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를 결정적인 역적으로 지목하며 탓하는 것이 의미 없었다.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똑같이 야구를 못 했다. 패배의 하나둘 모인 끝에 이길 수 있는 경기(1차전, 2차전)를 내리 졌다. 2차전이 끝내기 패배로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준우승까지는 아직 2패가 더 남아있었다. 히어로즈의 심장인 앤디 밴 헤켄도 방한해서 "3차전을 이기면 분위기가 넘어올 것"이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믿었던 에이스 브리검이 3이닝 4실점으로 조기 강판당하며 초반부터 승기를 내줬고, 키움의 타선은 침묵했다. 우승까지 단 몇 발자국을 남겨놓은 두산의 야수들은 저마다 호수비를 펼치며 훨훨 날았다. 한편 한국시리즈 탈락이 눈앞으로 다가온 키움의 야수들은 수비에서도 안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며 팬들을 체념케 했다. 그렇게 3차전이 지나갔다. 시리즈 스코어 0대 3. 




(원본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어쩌면 올해 키움 히어로즈의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4차전. 장정석 감독은 경기 전부터 "선수들이 포기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더그아웃에서 넋 놓고 있지 않을 것"이라며 투지를 불태웠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경기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인 제이크 브리검이 감독을 찾아가서 불펜 대기를 자청했다. 안우진은 "아직 끝났다고 생각 안 한다"라며 "한 경기 한 경기 이기다 보면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안우진은 허리부상으로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음에도 출장을 강행 중이었다. 


  이러한 영웅들의 간절함이 2회 말 빅이닝을 만들었다. 선두타자 이지영이 안타로, 김혜성이 10구 승부 끝에 볼넷으로 출루했다. 이 타석 전까지 김혜성은 한국시리즈 3경기에서 8타수 무안타 출루율 0으로 침묵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믿을 수 없는 끈질긴 승부 끝에 볼넷으로 출루했던 것은, 0%라는 절망적인 확률을 깨뜨리기 위한 영웅들의 노력이 드러났다. 그리고 무사 1, 2루의 찬스에서 박정음의 번트 타구가 절묘하게 3루 라인선상으로 굴러갔다. 3루수가 뒤늦게 잡아 타구를 1루로 송구했지만, 박정음의 빠른 발은 이미 1루 베이스를 밟은 뒤였다.

  몇 번이고 만들어졌지만, 기회를 제대로 건져낸 적은 없었던 무사만루의 찬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첫 타석에서 2루타를 쳐내며 유희관 킬러의 위용을 드러냈던 서건창이었다(서건창 유희관 상대 통산 타율 .489). 비록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11타수 1안타로 침묵했지만, 운이 없었을 뿐 타구 질은 언제나 좋았다. 그의 독기가 오늘 경기에서 완벽하게 터졌다. 잡아당긴 타구가 1, 2루 사이를 완벽히 갈랐고, 두 명의 주자를 불러들였다. 역전을 허용한 후, 곧이어 성공한 재역전. 오늘 경기는 결코 지난 세 경기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알 수 없기에, 모두가 초반부터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김하성이 얕은 뜬공으로 물러난 1사 1, 3루 상황. 이정후가 기습 번트를 시도했고 방망이에 맞은 타구가 1루 선상으로 떼굴떼굴 굴러갔다. 두산의 야수들이 당황한 틈을 타 3루 주자 박정음이 홈으로 파고들었다.

  두산이라고 해서 이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총력전을 예고했던 김태형 감독은 서건창이 재역전 적시타를 쳐내자, 선발 유희관을 1이닝 만에 내리고 마무리 함덕주를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다. 하지만 함덕주로도 한 번 불이 붙기 시작한 영웅군단의 타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정후의 기습 번트 이후 박병호가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제리 샌즈와 송성문이 볼넷으로 걸어 나가며 밀어내기로 득점했다. 연이은 이사만루의 찬스에서 이지영이 세 번째로 올라온 투수 김승회의 2구째를 노려쳐 중전 안타를 만들어냈다. 8대 3, 2회 말에만 6득점째. 올해 포스트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순간이었다(직전 기록 플레이오프 3차전 키움 5회 말 5득점).

  영웅들의 기적은 여기에서 끝났다. 최원태가 단 1이닝만 소화하고 내려간 것이 치명적이었다. 포스트시즌 내내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했던 불펜진이 지쳐버린 나머지, 더는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4회와 5회에 6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다시 역전당했다. 


  마지막 순간. 한 번 더 기회가 찾아왔다. 9회 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송성문과 김규민이 안타로, 대타 박동원이 볼넷으로 출루했다. 여기에 김규민이 투수 앞 땅볼로 출루하고 3루 주자가 홈에서 아웃당해, 2사 주자 만루. 타석에는 서건창. 서건창이 밀어친 공이 3루를 향해 강하게 나아갔고, 3루수 허경민은 포구에 실패했다. 그 사이에 모든 주자가 진루하며 다시 동점이 되었다. 안타 하나만 더 나온다면 4차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타자 김하성이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되며 9회 말이 끝났다. 또 한 번의 기적은 없었다. 10회 초 교체 출장해 포수 마스크를 쓴 주효상과 합을 맞춘 제이크 브리검이 오재원과 오재일에게 2루타를 허용하며 실점하고 말았다. 브리검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오주원도 김재완에게 좌전 안타를 맞았다. 힘겹게 간격을 없앤 점수 차가 곧바로 벌어졌다.


  10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이정후가 10구 승부 끝에 중견수 플라이로, 박병호가 헛스윙 삼진 아웃으로 물러난 뒤 샌즈가 초구를 건드렸다. 투수 배영수는 타구를 잡아서 그대로 1루로. 그리고 오재일이 투수의 송구를 받아냈다. 경기 종료. 스코어 11대 9, 시리즈 전적 0대 4. 키움의 생애 두 번째 한국시리즈는 이렇게 끝이 났다.




2020 Heroes V1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달라져야 한다. 다음 시즌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진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아쉬움으로 가득 찼으며 단 한 경기도 팬들을 달래주지 못한 한국 시리즈가 종료됐다. 장정석 감독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봤다. 후회는 없다"라고 이야기했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기장을 나설 선수가 있을 리 없다.

  시리즈 내내 맹타를 휘두르며 4할 3푼 9리의 타율을 기록한 이정후는,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쏟고 말았다. 빨개진 눈으로 취재진과 만난 이정후는 "아쉬운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라며 결과적으로 지난해와 똑같이 끝났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질 줄 몰랐기 때문에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유일하게 공수 양면에서 욕먹지 않을 성적을 냈지만, 이에 대해서도 "개인 성적은 이겼을 때나 의미가 있다. 지면 다 같이 못해서 졌고 이기면 다 같이 잘해서 이긴 것이다. 지면 개인 성적은 무용지물이다"고 말했다.

  팀의 주장 김상수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상수는 "나와 주원이 형이 고참으로서 좋은 결과를 만들면서 팀을 이끌어야 했다. 그런데 둘 다 그러지 못해 미안함이 있다. 주장 역할을 확실히 하지 못한 게 팀을 패배로 몰고 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찌 됐든 간에 돈을 주고도 하지 못할 값진 경험을 치른 히어로즈이다. 한국시리즈는 플레이오프까지와는 달랐다. 그리고 제아무리 시즌 내내 관리 야구를 한다고 해도, 준플레이오프에서부터 한국시리즈까지 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감독 및 코치진, 그리고 선수들은 이 점을 한국시리즈 피스윕이라는 결과를 통해 깨달았다. '가을 바보 증후군'은 분명 경험을 통해 고칠 수 있다. 내년에는 더 높은 자리에서, 더 준비된 모습으로 가을야구에 임해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 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작년 겨울에 차세대 좌완 에이스를 기대하고 에릭 요키시를 영입했으며 트레이드를 통해 이지영을 영입했듯이, 이번 겨울에도 내년 이맘때를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미 비시즌은 시작됐다. 한국시리즈가 종료되자마자 허문회 수석 코치의 롯데 자이언츠행이 발표됐다. 2020년에도 분함의 눈물로 시즌을 끝내지 않으려면, 이제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야만 한다. 일단 이지영을 사자



항상 긍정적인 내용으로 찾아뵙고 싶지만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당한 상황에서 차마 좋은 이야기를 넣을 수 없었습니다. 시즌 정리 글과 함께 긍정 텐션 만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