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으로 선수들 권익 해치는 제도
전부 다 좋은데 '속 보이는' 제도 딱 하나가 모든 협상안을 망치고 있다. 바로 KBO가 하루빨리 리그에 도입하고 싶어 하는 샐러리캡(Salary cap, 연봉 총액 상한제) 제도이다.
지난 28일, KBO와 프로야구 10개 구단이 2019년 제6차 이사회를 열어 KBO리그 활성화를 위한 안건에 대해 논의한 뒤 FA(Free Agent, 자유계약선수 제도)를 비롯한 제도 개선안을 완전 공개하며 선수들에게 수용 여부를 다시 논의해달라고 촉구했다. 다소 놀라운 소식이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가 KBO의 개선 합의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한 것이 지난 일요일(24일)이었는데, 채 일주일도 안 돼서 신속히 회의를 열어 다시 한번 개선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취임 공약이었던 KBO 닷컴 개설과 '클린 베이스볼'은 둘째 치고, 지난달에 터진 히어로즈 구단 옥중경영 이슈도 늑장 대처를 하고 있는 정운찬 체재의 KBO이다. 아마 이렇게 기민한 움직임은 다른 프로야구 팬들도 근 2년간 처음 봤을 것이다.
FA 취득 기간 단축, FA 등급제 시행, 부상자명단 제도 도입, 최저 연봉 인상, 연봉 5천만 원 미만 선수 1군 등록 시 추가 보수 지급 등 선수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정책들이 많다. 연봉 3억 원 이상 선수 기량 저하 사유로 2군 강등 시 일당 50% 삭감 유지, 외국인 선수 한 경기 3명 동시 출전, 육성형 외국인 선수 도입 등 선수들이 꺼려할만한 제도들도 존재하지만, 이 정도는 KBO 측에서 제시한 개선안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하다. 류대환 KBO 사무총장은 이번 개선안 발표에 대해 "저액 연봉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많도록 준비했다"며 "선수들이 모두 모이는 총회에서 다시 이 내용을 논의할 수 있도록 선수협회가 리그 전체의 성장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기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했다. 속되게 말하자면 "너희가 요구하는 거 웬만한 거 다 들어줄 테니 슬슬 합의 보자"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제시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KBO가 대놓고 압박을 해올 만하다.
샐러리 캡 제도만 없었다면 말이다. KBO는 이번 제시안에 은근슬쩍 샐러리 캡을 끼워놓았다. 샐러리 캡은 번역하자면 연봉 총액 상한제이다. 그러니까 선수들의 연봉에 상한선을 두는 제도인 것이다. 최종 목적은 빅마켓 팀과 스몰마켓 팀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것이다. KBO에서 샐러리캡을 도입하려는 이유도 '전력 평준화를 위함'이었다.
그리고 샐러리캡의 최종 목적인 '빅마켓 팀과 스몰마켓 팀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는, KBO리그에 한해서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다. 당장 이번 시즌에만 해도 그렇다. 지난 몇 년간 FA 영입에 열을 올렸던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이번 시즌 무난하게 연봉 총액 1위 팀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즌 시작과 함께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쳤고, 5월부터는 최하위권에 고정되며 10위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한편 지난 몇 년간 고액 FA 선수들을 줄줄이 외부 구단으로 유출했으며 2017년 겨울에도 FA 최대어 양의지를 놓쳤던 두산 베어스는, 2016시즌 이후 3년 만의 통합 우승에 성공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연봉 총액 9위임에도 정규 시즌 최후반기까지 5위 경쟁을 했던 kt 위즈, 연봉 총액 꼴찌라는 타이틀을 달고 한국시리즈 무대까지 올라섰던 키움 히어로즈는 덤이다. 지난 시즌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연봉 총액 꼴찌(88억)를 기록한 NC 다이노스가 정규시즌에도 꼴찌를 하긴 했지만, 이는 지난 몇 년간 누적돼왔던 혹사 문제와 외인 선수의 실패, 그리고 감독과 프런트 간의 갈등 문제가 컸다. 연봉 총액 1위(162.7억)를 기록한 KIA 타이거즈는 5위, 연봉 2위(141.9억)의 롯데는 7위에 그쳤다.
이는 잘못된 방법의 투자로 인한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빅마켓 구단들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곳에 투자만 하기 시작하면 스몰마켓 팀과의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때 가서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샐러리 캡은 연봉 총액을 정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적료, 해외 전지훈련 비용, 마케팅, 재활·처리 비용(운영비)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현 KBO리그에 도입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크게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 제도이다.
이런 제도를 KBO는 어째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끼워 넣었으며, 세부 규정도 제대로 정하지 않았으면서 FA 취득 기간 단축안과 함께 '빠른 시일 내에' 도입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리고 선수협은 어째서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샐러리캡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이는 샐러리 캡 제도가 이번 협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선 한 번 샐러리 캡 제도가 실행됨으로써 선수 연봉 총액 상한선이 공식적으로 정해진다면, 구단은 저연봉 선수들을 무더기로 방출하거나 고연봉 선수 및 FA 선수의 계약 총액을 후려칠 '공식적인 이유'가 생긴다. 최근 프로야구 구단들은 꾸준히 선수단 규모를 줄이며 어떻게든 선수 연봉 총액 및 운영비를 줄이려 하는 모양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3군 체제까지 구축해가며 120명가량의 선수들을 보유하는 구단들도 존재했으나, 2017년 넥센(현 키움)가 약 15명의 선수들을 정리하며 3군 운영을 포기한 것을 시작으로 각 구단이 선수단 규모를 대폭 축소하기 시작했다. 올 시즌에도 SK가 14명, 두산이 13명의 선수에게 재계약 불가 통보를 하는 등 파격적인 선수단 정리를 시행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소수 선수의 정예 육성'이다. 하지만 구단 운영비 감소의 측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지난 몇 년과 같이 A급·S급 FA 선수들에게 예전과 같이 FA 금액을 퍼주기 어렵다는 여론이 구단들 사이에서 형성됐고,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FA 상한제'였다. FA 등급제를 도입시켜줄 테니 앞으로의 FA 최대 금액을 4년 80억으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선수협은 단칼에 거절했고, 야구계 밖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김유겸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는 "최고 선수가 최고 금액을 받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시장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평소에는 프로야구 팬들에게 '또영석' 등의 멸칭으로 불리는 김영석 국민일보 기자도 "FA 선수들의 몸값을 제한하려는 것은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 전가나 다름없다"며 강경히 비판했다.
샐러리 캡은 FA 상한제의 도입이 실패한 상황에서 'FA 금액 축소'와 '선수단 정리'에 대한 구단의 정당한 핑계가 될 수 있다. 샐러리 캡이 시행될 시 KBO리그 각 구단이 선수단 연봉에 지출할 수 있는 최대 한도 금액이 지정됨으로써 강제로 리그 전체의 파이가 정해진다. 이로써 구단들은 FA 선수에게 "정해진 돈이 있어 너에게 얼마 이상의 금액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설령 FA 선수를 비싼 값에 영입해 조금 부담이 될지라도 저연봉 선수들을 거리낌 없이 정리함으로써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샐러리캡을 지킨다'는 이유를 대면 되기 때문이다.
즉, 리그의 균형이나 빅마켓과 스몰마켓 간의 격차를 걱정할 상황이 아닌 KBO리그에 굳이 샐러리 캡을 도입하려 하는 것은, KBO와 프로 구단이 선수단 연봉에 사용할 비용 자체를 축소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KBO 측의 '당근'이 전부 다 받아들여져봤자 의미가 없다. 어차피 샐러리캡이 정해져 있어 해당 혜택을 선수들이 누리게끔 해줘도 지출이 늘어나지 않게끔 선수단을 정리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수협의 KBO FA 개선안 거절 이슈와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던 도중 흥미로운 내용의 기사를 발견했다. 협상이란 게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고, 현실에서 개선안을 실행하면 부족한 점이 분명 드러날 것이며, 그러면 자연스럽게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것이니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기사의 마지막 문단에는 "멀리 내다보지 못한 선수협의 패착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과연 그럴까?
'저연봉 선수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비난에 늘 시달리지만 어쨌든 선수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식적인 단체인 선수협이 등장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1988년, 80년대 KBO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故 최동원은 연봉인상 상한(25%) 폐지와 선수연급 제도 도입 등을 주장하며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각 구단들의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압박 속에 선수들은 모두 백기 투항했다. 홀로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책임졌던 철완은 그해 겨울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됐다. 2000년에는 양준혁을 비롯한 당대의 스타들이 다시 한번 선수협 창립을 주도했으나, 이는 이뤄지지 않았고 선수협 설립을 주도한 선수들은 트레이드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많은 이들의 희생 속에 선수협은 겨우겨우 탄생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FA 제도가 계속해서 문제점을 안고 달려왔던 점만 봐도 '문제가 있으면 추후 고치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를 알 수 있다. 각 구단의 이해관계 속에서 등장한 KBO리그의 FA 제도는 '너무 긴 자격 취득 기간', 'B급 선수들의 이적을 가로막는 보상선수 제도' 등 수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이와 관련된 여론의 목소리도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KBO는 이번에 구단의 페이롤을 줄이기 위해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서기 전까지, 눈 감고 귀를 막으며 모두의 목소리를 무시해왔다. 하물며 샐러리 캡이 시행된 뒤 선수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해도, KBO가 선수들의 요구를 수용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선수협은 적어도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보다는 더 멀리 내다봤다.
애초에 '여론이 자연스레 형성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부터 웃기다. 샐러리캡 이야기 그 누구보다 먼저 전해 들었을 거면서 어제 크보에서 대놓고 샐러리 캡 말 꺼내기 전까지 일언반구도 언급 안 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평소 선수협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해서만큼은 선수협이 뚝심 있게 KBO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