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근 #유재신
한국시리즈가 채 시작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120명의 선수가 유니폼을 벗었다. 이전에도 각 구단이 조금씩 규모를 줄여가면서 적잖은 선수를 정리했다지만 올해는 그 강도가 유난히 살벌하게 느껴진다.
김태균, 정근우같이 KBO리그를 풍미했던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어서일까. 송광민, 채태인 등 몇 년은 더 팬들 앞에서 활약해주리라 예상했던 선수들이 가차 없이 방출당했기 때문일까. 한겨레 김양희 문화부 스포츠 팀장의 기사에 따르면 올겨울에는 선수단 규모를 70명대 선까지 줄이는 구단도 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데리고 있는 선수의 수가 많다고 해서 무작정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 구단의 경영난으로 인해 앞으로 몇 년이면 꽃을 피울 수 있었을 선수들까지도 무대 뒤로 퇴장하게 될 위기에 놓인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여하튼,
각 구단의 방출 선수 명단마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선수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숱한 프랜차이즈 스타를 방출한 한화 이글스는 그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면 손가락이 아플 정도이다. LG 트윈스에서는 용암 같은 타격과 쿨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던 박용택과 LG에서 단 1년만 뛰었음에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정근우가 은퇴한다. 두산 베어스에서는 팀의 여섯 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김승회와 권혁이,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무려 21년간 원클럽맨으로 활약한 권오준이 은퇴하게 되었다. 임기준, 김대륙, 홍성무 등 각 팀의 미래로 여겨졌던 선수들이 방출되었다.
모두가 일일이 언급하기에 아깝지 않은 선수들이다. 하지만 본 포스팅에서는 단 두 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려 한다. 한 명은 한때 히어로즈 그 자체였으나 이제는 사랑을 주던 팬들로부터 외면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팀의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던 감독의 조커로 애용되며 기회를 받았지만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욕심냈던 백업 선수. 바로 이택근과 유재신이다.
시즌 최종전 종료 후 팬 사인회에서 보여준 불성실한 태도. 스몰 마켓 구단에서 안겨준 8년 85억이라는 몸값에 부응하지 못한 부진한 성적, 일곱 번의 가을야구를 경험했음에도 거의 보여주지 못한 베테랑으로서의 활약. 여기에 주장 시절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 후배 폭행 사건까지. 올 시즌에는 우레와 같은 비난 속에서도 꿋꿋이 스무 경기에 출장했으나 타율 1할 9푼 3리라는 초라한 성적만 남겼다. 구단과도 갈등을 빚은 끝에 은퇴식도 없이 방출됨으로써 초라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는 몰락하던 현대 왕조의 떠오르는 슈퍼스타였다. 데뷔 직후 3년간 자신의 포지션을 찾지 못해 다소 주춤했던 그는 모기업 현대의 구단 지원이 끊긴 2006년부터 중견수 포지션에 정착해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첫 풀타임 시즌부터 이대호, 이용규와 타격왕 경쟁을 벌이며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고, 이듬해에는 불안정한 구단 상황 속에서도 3할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4강 경쟁을 이끌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된 이후에도 구단 사정은 여전히 어려웠다. 아니, 어찌 보면 더욱 어려워졌다. 히어로즈에는 선수단에 합당한 연봉을 지급할 여력도, KBO에 야구발전기금 120억을 납부할 자금력도 없었다. 여기에 메인 스폰서였던 우리담배가 "회사 이미지만 나빠졌다"라며 스폰서 계약을 파기하는 등 투자자들이 줄줄이 빠져나가는 악재가 겹쳤다. 선수들은 이미 두산과 LG가 인기를 양분하고 있던 서울의 외곽에서, 심할 때는 스무 명 남짓한 관중만이 찾아온 경기장 아래 연습복을 입고 경기에 임해야만 했다.
끔찍이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택근은 꿋꿋하게 안타를 쳤다. 2008년에는 팀 내 안타 1위(118개), 홈런 3위(12개), OPS(On-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 1위를 기록하며 타선을 이끌었다.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며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전국민에게 알리기도 했다. 이듬해에도 이택근은 3할 타율과 15개 남짓한 홈런을 쳐내며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송지만과 덕 클락, 클리프 브룸바, 강정호가 20홈런을 쳐내며 힘을 보탰다. 막둥이 황재균도 20-20 클럽 가입에 도전함으로써 팀은 마지막까지 치열한 4강 경쟁을 했다.
선수로서 최전성기에 도입하는 서른의 나이. 타격이면 타격, 주루면 주루,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던 야구 실력. 당시의 그는 앞으로의 영웅군단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이장석 전 대표 또한 "구단에 대한 애정도 있었고 팀의 리더였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구단은 여전히 가난했고 가입비를 낼 돈은 없었으며 여기에 두산과 LG까지 연고지 보상금 15억 원을 요구해오고 있었다. 선택지는 '좋은 선수를 팔아 빛을 갚는다'밖에 없었다. 그해 겨울, 이장석 전 대표는 장원삼, 이현승과 함께 이택근을 트레이드했다.
간판스타들의 잇단 트레이드에 '사기꾼', '장사꾼' 같은 거센 비난이 쇄도했지만 이장석 전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넥센타이어가 메인스폰서로 더 일찍 들어왔어도 트레이드는 이뤄졌을 것"이라는 뻔뻔한 태도를 보일 정도였다. 세 선수를 트레이드하기 전부터 FA 자격을 얻을 고참급 선수들에게는 높은 보상금을 받기 위해 연봉을 인상하고 이숭용, 송지만 등의 베테랑들을 내보내려던 이장석이었다. 그에게 있어 장원삼과 이현승은 '언젠가 나갈 선수들' 정도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장석 전 대표가 트레이드하며 유일하게 아쉬워했던 선수가 이택근이었다. 다른 트레이드에 대해서는 "재정상 어쩔 수 없는 트레이드"였다며 냉정히 선을 그으면서도 이택근의 이적에 대해서는 "아무리 포장하려고 해도 우리쪽 로스가 크다"며 아쉬워했다. 그에게 있어 이택근은 실력은 물론이요, 따르는 선수들도 많아 차세대 주장직을 맡아줘야 할 간판스타였다. 당시의 이택근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LG맨'이 된 이택근은 이듬해 초 프런트의 출정식 행사 참석 요청을 "당분간 인터뷰는 사양하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무너진 현대왕조의 황태자, 그리고 영웅군단의 택근브이였던 그는 몸은 잠실에 있을지언정 마음은 항상 목동 야구장에 머물렀다. 이는 2년 후 두 풍운아가 다시 결합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2년 전 팀을 떠날 때 흘렸던 택근이의 눈물을 꼭 닦아주고 싶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2년 전 나를 LG로 보내시면서도 '우리 꼭 다시 만나자'며 많이 미안해 하셨다. (...) 외부에서 보는 시선과 달리 선수들은 이 대표를 믿고 따른다. 나 또한 LG로 옮겨가서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2011시즌이 종료되고 FA 시장이 열리자 이장석 전 대표는 이택근에게 4년 총액 50억 원을 안겨줌으로써 자신의 아쉬움을 씻어낸다. 당시 LG가 이택근에게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금액은 4년 27억 원이었다. 이장석 전 대표가 이택근에게 먼저 금액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이택근이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해온 넥센 구단에 50억을 불렀고, 이에 이장석 전 대표가 아무런 협상도 없이 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오늘날에야 50억을 호가하는 FA 계약이 많다지만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규모. 이에 이장석 전 대표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았을 뿐"이라며, "넥센을 잘 아는 선수로 팀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이상적인 선수"라고 밝힌다.
이택근의 2011년 FA 계약 당시의 기사를 찾아보면 이장석 전 대표와 이택근이 서로를 얼마나 두텁게 신뢰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의 2011년 11월 22일 기사에 따르면 이택근은 창단 초기부터 이장석 대표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선수였다. 구단이 해체되니 마니 하던 시절, 후배 선수들의 동요를 묵묵히 막아냄으로써 전 대표의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단 대표이사의 사랑과 선수단의 신뢰를 듬뿍 받던 캡틴은, 과연 제 몸값에 맞는 활약을 펼쳤을까.
친정 복귀 첫해. 이택근은 시즌 후반 시달렸던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3년 연속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는 데 실패한다. 2할 7푼 5리의 타율은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2006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였다. FA 2년 차인 2013년에도 이택근은 3할 타율 달성에 실패한다. 0.758의 OPS는 그해 규정타석을 채운 리그 중견수 중 5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그보다 높은 OPS를 기록한 중견수 넷의 연봉 총합은 7억 8천 2백만 원이었다(이택근 12~15시즌 연봉 7억). 역대급 타고투저였던 2014시즌에는 4년 만에 3할 타율에 복귀하고 데뷔 첫 20홈런 고지를 밟음으로써 팀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진출에 일조한다. 그러나 2015년에는 잔부상을 겪다 또다시 규정타석 진입에 실패한다. 시즌 최종전 종료 후 펼쳐진 팬 사인회에서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12년부터 15년까지 총 4년간 12.04의 WAR(Wins Above Replacement,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를 기록했다. 이는 같은 시기에 뛰었던 KBO리그 야수 중 22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이택근보다 높은 WAR을 기록한 21명 중 13명은 FA 미계약자였다. 성적만 놓고 봤을 때의 그는 '먹튀'라고 비난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제값을 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물론 리더로서 선수단을 한데 모아 원만히 이끌었다는 점, 많은 언론에서 평가했던 대로 이택근을 영입함으로써 히어로즈 구단의 이미지가 반전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50억 값을 했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10억 정도만 덜 줬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하고 이따금 타팀 팬으로부터 이택근과 히어로즈 때문에 FA 거품이 시작됐다는 시비가 걸려오기도 하지만 나름 괜찮은 계약으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2015시즌 후 4년 35억에 FA 재계약을 체결하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2015년 겨울. 넥센은 투타 에이스 앤디 벤 헤켄과 박병호를 각각 NPB와 MLB에 보낸다. 팀의 대들보 역할을 해왔던 베테랑 3인이 한꺼번에 FA 시장에 나온다. 한 명은 벌크업에 성공한 2014시즌부터 공수 양면에서 이택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활약을 펼쳤던 유한준. 다른 한 명은 하락세가 뚜렷하지만 10년 가까이 팀의 수호신으로 군림했던 손승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택근이었다. 이장석 전 대표는 유한준과 손승락을 타팀으로 내보내는 대신에 이택근과 4년 총액 35억 원의 계약을 체결한다. 이택근의 결혼식에 주례로 참석하기도 했던 이장석 전 대표의 '황태자' 신뢰는 박병호와 강정호의 포스팅 금액 199억을 뒷주머니에 욱여넣는 와중에도 여전했다.
계약 기간 동안 시즌 전 경기 출장, 통산 2000안타 달성 등의 기록을 달성하고 싶다던 이택근의 4년은 처참했다. 계약 첫해인 2016년을 제외하면 전 경기 출장은커녕 규정 타석을 채우지도 못했다. 2000안타의 꿈 역시 2016년 이후로 한 시즌에 100안타 이상을 기록하지 못하며 좌절되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이택근은 더 이상 중견수 포지션 수비를 소화할 수 없었다. 코너 외야수로 출장했지만 RAAwithADJ(Runs Above Average with ADJustment, 포지션 조정 포함 평균 대비 수비 득점 기여도)와 WAAwithADJ(Wins Above Average with ADJustment, 포지션 조정 포함 평균 대비 수비 승리 기여도) 스탯에서 계속해서 음수를 기록했다.
이장석 전 대표이사의 옥중 경영,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 등의 외풍이 불어온 2018년에는, 팀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수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며 가을야구 진출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문우람이 3년 전 벌어진 폭행 사건을 폭로하며 여태껏 쌓아온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KBO 상벌위가 이택근에게 36경기 출장 금지의 징계를 내렸기에, 징계가 끝나는 2019년 6월부터는 정상적으로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택근은 1군 콜업은커녕 퓨처스리그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작년은 허민 전 위메프 대표이사가 키움 히어로즈의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된 해이기도 했다. 19시즌이 종료된 이후, 키움 구단의 창단 2번째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던 장정석 전 감독은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일각에서는 허민의 '이장석 지우기'가 시작되었다는 시선도 존재했다.
'이장석의' 히어로즈를 이끌었고, 이장석이 몰락함과 함께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올 시즌에는 다시 1군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1년을 통으로 쉰 40대 선수에게 클라스란 없었다. 예전이라면 수월히 받아들어졌을 코치 선임 요구도 반려되며, 구단과 갈등을 빚은 끝에 '방출'이라는 방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이장석 시대의' 히어로즈를 상징했던 사나이의 야구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자신의 고교 시절 활약보다는 '야구선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타이틀로 더 유명했다. 데뷔 3년 차, 본격적으로 주전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까마득한 선배에게 밀리며 입대를 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풀타임 스타팅을 꿈꿨던 포지션에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선수들이 들어섰다.
감독의 권유로 전문 대주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작지만 확실히 1군에 남아있을 수 있는 역할에 만족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이상의 욕심을 갖게 되었다. 서른이 임박해서야 다시 한번 출사표를 던졌다. 자칫 잘못했다간 한 번에 선수 생활이 끝날 수도 있지만 아랑곳 않았다. 한때 '염벤저스'의 핵심 멤버였으나 얼마 전까지 KIA 타이거즈의 핵심 백업으로 사랑받았던 유재신의 이야기다.
천안북일고 3학년 시절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3할 1푼 9리의 타율과 5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특출난 성적은 아니었지만 야구를 예쁘게 한다는 말은 들었다. 데뷔 3년 차인 2008년에는 이광한 감독의 믿음 아래에서 많은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54경기에 나와 93타수 24안타 타율 .258을 기록했다. 신인치고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김일경에게 밀려 주전을 차지할 수 없었다. 2009년 들어서는 김민우도 주전 2루수 경쟁에 합류하면서 더더욱 설 자리가 없어졌다. 경찰청 야구단에서 군 복무를 하고 돌아온 2012년에도 가능성은 보였다. 하지만 2루에는 서건창이, 3루에는 김민성이 자리 잡으며 주전 경쟁을 펼칠 포지션이 사라졌다.
좌절에 좌절을 거듭했다. '가장 잘하는 선수'에서 한순간에 '가장 못 하는 선수'가 되었고, 꼬박 2년이 걸려 실력을 끌어올렸지만 '프로야구단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7년간 마음이 꺾인 끝에 어느 순간, 유재신의 목표는 어느 순간 '주전'이 아닌 "주루만으로도 기억되는 선수", "1군에 오래 남아있는 선수"가 되었다.
작전 야구를 사랑했던 감독은 유재신의 신년 각오를 마음에 들어 했다. "주전이 쉴 수 있게 해주는 선수다. 활용범위가 넓다"며 꾸준히 경기에 내보냈다. 승부처에서 종종 대주자로 투입해, 자신의 다리로서 활용했다. 매년 낮은 하위권에 머무는 영웅군단에 지쳤던 팬들은 유능한 감독의 화려하고 강한 야구에 환호했다. 이러한 와중에 KBO리그 역대 다섯 번째 삼중 도루 성공으로 승부를 뒤집는 경기도 나오면서, 유재신은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대주자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언론에서는 그를 '강명구의 뒤를 잇는 전업 대주자'로 소개했다.
사실 그해 유재신의 전문 대주자로서의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75경기에 출전하는 동안 일곱 번의 도루를 성공시켰는데, 그동안 무려 여덟 번의 도루 실패를 범했다. 현대 프로야구에서는 도루 성공율이 72%를 넘지 않는다면 아예 도루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라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3시즌 유재신의 도루성공율은 46.7%로, 채 50%도 넘기지 못했다(강명구 통산 도루성공율 82.2%). 주루 RAA(Runs Abover Average, 평균 대비 득점 기여도)또한 음수였다(-0.01, 강명구 통산 주루 RAA 0.91).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재신은 염경엽 감독의 페르소나였으니까.
유재신이 본격적으로 대주자 이상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염경엽의 발'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4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대주자 생활 2년 차였던 2014년의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무렵, 아버지 故 유두열 씨가 암 판정을 받았다.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초조해하던 차에 부친의 병세에 마음까지 흔들려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유재신 2014시즌 성적 23경기 2타수 무안타 6도루 2도실). '내년에는 팀이 우승하고 1군에서 대주자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아버지가 화를 내실 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다”고 거듭 말했다. 당시에도 유재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대주자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로부터 1년 후, 유재신은 변화했다. 항상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라", "타석에서 자신 있게 방망이를 돌려야 한다"고 강조하던 故 유두열 씨의 투병에, 아버지께서 바라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2015시즌이 종료된 이후 벌크업을 함으로써 5~6kg을 증량했다. '다리'로써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대주자로서는 자신의 선수 인생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이듬해 삼십 대의 나이에 접어드는 유재신이었기에, 단 한 번의 실패가 선수 생활의 종료로 이어질 수 있기에 더욱 위험천만한 변화였다.
감독은 유재신에게 대주자 이상의 역할을 부여할 생각이 없었다. 유한준이 FA를 통해 kt 위즈로 이적했지만 오는 시즌에는 팀 내 최고 유망주 임병욱에게 주전 외야수의 자리를 부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대가 끊어져도 감독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해 홈까지 미친 듯이 달렸던 유재신은 더 이상 없었다. 경기에 많이 나가고 싶다는 욕심에 계속해서 몸을 불렸다. "선발투수는 도루하기 더 쉽다"며 4년 만의 주전 경쟁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윽고 찾아온 2016시즌. 유재신은 93경기(개인 통산 최다)에 출장해 2할 5푼 8리의 타율과 3할 6푼 1리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지난 몇 년간 주자의 역할에만 집중했던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타격이었다. 16번 베이스를 훔쳐내며 개인 통산 최다 도루도 이뤄냈다. 타자로서의 가치를 증명해 출전 경기가 많아지니 오히려 전문 대주자일 때보다 도루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 시즌에도 유재신은 주전 경쟁에 실패했다. 2015년 가능성을 보였던 고종욱이 최다 안타 10위에 오르는 등 잠재력을 터뜨렸다. 프로 데뷔 후 부상에 시달리다 처음으로 1군 무대에 오른 박정음이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전 염경엽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임병욱은 8개의 홈런과 17개의 도루로 존재감을 뽐냈다. 유재신은 여전히 백업의 역할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컨버젼 2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전문 외야수보다 훨씬 안정적인 외야 수비, 그리고 백업으로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타격 재능을 선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이는 그가 과거 목표로 했던 강명구보다 긴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해줬다.
2016시즌이 끝나자마자 염경엽 감독은 미리 준비해왔던 메모를 읊으며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유재신은 더 이상 감독의 페르소나가 아니게 되었고, 그 대신에 이정후와 허정협이 기회를 받았다. 이제 유재신에게 영웅군단에 설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백업 선수로서의 가치는 충분했기에 7월 31일 성사된 2대 2 트레이드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내야는 물론 외야에도 빈틈이 없는 KIA였기에, 여전히 주전을 꿈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재신에게는 이전 해에 9개 구단 야구인들 앞에서 선보인 탄탄한 외야 수비와 빠른 발이 있었다. 이를 인정받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됐고, 4차전에서 대주자로 투입돼 득점하는 등의 활약을 펼친 끝에 생애 첫 우승 반지를 거머쥐게 되었다. '염경엽 시대의' 히어로즈를 상징했던 남자는 이렇게 새장을 깨고 나와 KBO리그 사상 두 번째 부자(父子)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양현종의 바람과 다르게 우승 헹가래 장소는 광주가 아닌 서울이었다. 하지만 유재신에게는 매우 의미 있었다. 33년 전 아버지가 역전 홈런을 날리며 우승을 일궜던 장소였다.
(...) 그의 아버지는 지난해 9월 1일 신장암 투병 중 별세한 故 유두열.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8회 역전 3점을 쏘아 올리며 롯데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 해 한국시리즈 MVP까지 수상했다.
유재신은 “부자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을 세워 영광이다”라며 “많은 야구팬이 아버지를 회상하면,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홈런 순간을 떠올리지 않는가. 그 장소에서 우승을 하게 돼 뜻 깊다”라고 말했다. - 유재신 "아버지께 바치는 우승 반지 뿌듯해"
2018시즌, 단순한 대주자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백업 외야수로서 활약한 유재신은 46경기에 출장해 4할 2푼 4리의 타율과 1.192의 OPS를 기록하며 대활약한다. 데뷔 첫 홈런포도 쏘아 올렸다(역대 최고령 데뷔 홈런 기록 갱신, 11276일, 종전 기록 강명구 11142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김광현을 상대로 뽑아낸 역전 만루홈런이었다. 도루는 단 4개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재신에게 더 이상 도루를 할 필요는 없었다.
작년에도 백업 외야수로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친 유재신은, 올 시즌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뒤 팀에서 방출됐다. 아직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기에, 본 포스팅을 작성 중인 현시점(2020년 11월 15일)에서는 앞으로의 그의 미래를 쉽게 유추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염경엽 시대의' 히어로즈를 상징했던 남자는 그 시대가 끝날 이후를 생각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그라운드 위에서 뛸 수 있었다.
이택근과 유재신이라는 두 선수는 각자의 위치에서 히어로즈의 제1차 전성기를 이끌며,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들은 각자 '구단주의 황태자',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히어로즈를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누군가의 커리어가 다른 이에게 비교되기 민망할 정도이든 누군가가 언급도 하기 싫은 금지어이든, 결국 한 번 즈음은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끄적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