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사무관이 의원면직한 이유(2)
사무관은 보고서로 말한다
처음 입직했을 때 선배가 해준 말이다. 사무관들은 보고서의 늪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보고서를 많이 작성한다.
기본적으로 연초가 되면 늘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연간 실행계획' 수립. 원래 정책이란 것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으므로 전년도랑 비슷한 방향을 유지하되, 최근 정책 트렌드나 정부 방향을 반영하여 새롭게 작성한다.
이 실행계획을 필두로, 뭔가를 할 때마다 보고서가 따라붙는다. 사업별 계획 보고서, 추진 보고서는 기본이고 요약 보고서, 점검 보고서 등 종류도 다양하다. 당연히 쓰고 싶어서는 아니고,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보고서는 사실 관계의 나열이라 그다지 어렵지도 않고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문제는 반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보고서,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에 큰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보고서가 너무 많다
예를 들어 갑자기 이번 정부에서 AI부문 예산을 확대한다는 썰이 돈다고 하자. 그럼 담당 분야와 AI의 연관성을 찾아내어 사업 안을 하나 만들어내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정부 통합 추진계획에 들어간 사업은 예산을 쉽게 받을 수 있고, 그만큼 우리 부처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본인 부처의 사업을 넣으려고 한다.
그럼 또 급하게 보고서를 쓴다. 현황, AI 활용의 필요성, 사업 내용, 기대효과 등을 설득력 있게 써야 하므로 다양한 통계를 활용한다. 때론 보고서까지는 아니고 '한 꼭지'를 써서 내는 경우도 있는데, 대외용 문서는 하나의 꼭지더라도 중요성이 높기 때문에 품이 많이 들어간다. 잘못된 정보를 주면 안 되기 때문에 단 한 줄이더라도 정확성을 위해 산하 연구기관에 급히 전화해서 통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조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데이터를 요리조리 뜯어보면서 필요한 부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실제 사업에 반영이 될지 말지는 미지수이다. 정부 통합 보고서에 반영이 되면 곧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다. 노력의 빛이 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영이 되지 않는다면 몇 날 며칠 동안 야근을 하고, 관계자들을 들들 볶으면서 완성된 그 보고서는 이도 저도 아닌 채 영원히 디지털 세상 속에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참 속상한 일이다.
게다가 장관님이 새로 부임하면 또다시 그에 맞춘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보고서 소제목도 조금 수정하고 문구도 새로운 방향에 맞게 바꾼다.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포장지는 달라졌다. 어쨌든 내 에너지와 시간을 갈아서 보고서가 적절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아름답게 완성되기는 했다. 이 보고서는 책자로 만들어져 전 직원에게 배포되고 직원들의 책꽂이에 예쁘게 꽂힐 것이다. 그렇게 생을 마감할 것이다.
퇴사 후에야 이해되는 것들
조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퇴사하고 몇 년이 지나, 나도 나이를 먹어보니 조직에서 보고서에 왜 그렇게 목숨을 걸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누가 읽어도 정책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구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거다. 단어 선택의 중요성을 이십 대의 나는 몰랐다. 그래서 매일 보고서 문구로, 단어 몇 개로 씨름하는 게 싫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 불필요해 보여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과정을 거쳐야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것처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이십 대의 나는 알지 못했다.
사무직이 안 맞습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불필요한 일들이 많다는 생각 때문에 일이 너무 싫었다. 실질적인 '정책'을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보다 정책을 위한 '보고서', '글자 짓기'에 들어가는 노력이 많았다. 난 분명 매일 야근하고, 늘 팀원들과 씨름하는데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이 무력감을 주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는 일이 죄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우리 팀원들과 과장님, 국장님 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을 보고서인데 굳이 왜 열심히 써야 하나 싶었다. 입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사무관의 눈에는 그렇게 다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보였다.
내 눈에 결과물이 보이는 일이 하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무관을 하면서 나는 사무직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고서 문구로 씨름하는 것도 싫고, 다 끝내지 못한 보고서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한 채로 집에 돌아가는 것도 싫었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차라리 그때가 더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는 어쨌든 내 손으로 음료수를 만들고, 매장을 청소하고 손님을 응대하면서 '일'을 하는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뭔가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그 감정, 나한테는 그 게 중요했다.
'나 서비스직이 더 잘 맞을지도?'
이 생각이 든 순간, 인생은 역시 흥미롭다는 생각과 동시에 절망감이 들었다. 단 한 번도 사무직 말고 다른 직업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내가 서비스업에 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니. 이제 와서 어떻게 무를 것인가.
공무원은 평생 직업이 아닌가. 평생 일할 수 있다는 안정감이 가장 큰 장점인데, 이제 와서 적성을 근거로 퇴사하기는 어려웠다. 현실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퇴사하고 싶어'라고 적힌 항아리를 가져다 놓고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부었다. 하루에 한 바가지, 어떤 날은 두 바가지.
남몰래 고민을 하며 회사에서는 여전히 보고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어느 날. 그 항아리에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어찼다는 것을 느끼며, 주변인들에게 의원면직을 하겠노라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