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대문자 I 라서요

MZ사무관이 의원면직한 이유(1)

by 배키



사무관이요?
왜 그만뒀어요?


의원면직을 한 뒤 네 번의 봄이 지났다. 그 사이, 수없이 같은 질문을 들었다.


"사무관이요? 왜 그만두셨어요?"


처음엔 그 질문이 참 어려웠다. 내가 몸담았던 조직이 얼마나 딱딱하고 비합리적이었는지,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를 1에서 100까지 구구절절 늘어놓곤 했다. 마치 '이건 합리적인 퇴사였어'라는 걸 상대의 입을 빌려 스스로 확인받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굳이 남들을 납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그저 이렇게 말한다.


"일이 안 맞아서요."


그리고 더는 덧붙이지 않는다.


물론 나에게도 나만의 이유는 있다. 다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격렬한 말싸움 끝에 '저 이 회사 때려치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다.



대문자 I라서 중간 관리자가 힘들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정말 많다

사람들은 말한다. 공무원은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하는 직업이라고. 적어도 사무관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 사무관의 업무는 눈을 씻고 봐도 단순하지도 않고 반복적이지도 않다.


업무 관계자들도 많다. 우리 조직 내부 사람들은 당연하고 기재부, 행안부 등 유관 부처, 민간 업체, 지자체 관계자까지. '중간 관리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타협하고 조율해야 하는 대상이 차고 넘친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내 책상에는 손바닥만큼 두께가 되는 명함이 모였다.


사업의 중간 관리자라는 점을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제는 내가 대문자 I라는 것에 있었다.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내향성이 97%가 나오는 인간이다. 행정은 소통과 조율, 설득이 기본인데 내향성이 강하다 보니 사람들과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자꾸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요구하는 상황이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안다

내가 일하던 부처는 고시 출신이 많지 않았다. 천 명이 넘는 인원 중 매년 극소수만 고시로 입직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가십과 화제의 중심이 된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알고, 내가 했던 말들을 기억한다. 그렇다 보니 자기 검열을 많이 하게 된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본청 출근 첫날, 청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미처 닫히지 않은 문 뒤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ㅇㅇㅇ 사무관이야?"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나에 대해 할 만한 말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고시출신 사무관은 관심과 주목을 많이 받는다.



내향인 사무관의 고민

정책에 대한 애정은 분명 있었지만 30년 간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까지 이겨나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 높은 관리자가 되었을 때 내가 해나가야 할 일들이 기대되지 않으니 내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평생 나랑 안 맞는 일만 하면서 살다가 죽는 건가?'


공무원의 안정성이 그때만큼 절망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나도 뭔가 잘, 즐겁게 할 수 있는 인간일 텐데. 그 생각이 극에 달했을 때, 안정성을 포기하고 청사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 잘하는 내향형 사무관도 당연히 있다

사무관들이 많은 인간관계에 노출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 관계를 잘 조율하는 것이 사무관이 갖춰야 할 주된 능력 중 하나인 것 또한 분명하다.


따라서 나처럼 금방 의원면직을 할 게 아니라면 관리자가 적성에 맞을지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 중간관리자로 입직한 후의 미래는 점차 더 중요한 결정을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고위 관리자가 되는 길 뿐이기 때문이다. 서기관, 부이사관이 되며 사람 간의 갈등을 조율하고 정책을 이끌어나간다는 관리자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다. 그러니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정책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내향형이라고 해서 내 말만 듣고 너무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향형 사무관들에게 편견을 가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정책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내향형 인간이 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것도 아니고 통찰력, 경청 능력 등 내향형 인간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조직에서 빛을 발하는 내향형 사무관들도 많다. 난관이 오면 정책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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