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본부 작가 노트 : 시간이 겹치는 자리

by 김본부
01. 중첩 74.5x57.5cm Acrylic on Hanji Mounted on canvas 2025 (보정).png 중첩 74.5x57.5cm Acrylic on Hanji Mounted on canvas 2025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 왔다. 습작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세어보면 어느덧 25년 가까이 됐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 사이 내가 완성한 글은 발표되기도 하고, 그러지 못 하기도 했다. 많이 알려지기도, 그러지 못 하기도 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작품과 함께 꼭 남는 부산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수정 원고다. 나는 글을 쓰고 수정할 때, 원고를 인쇄해서 손 글씨로 수정하곤 한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교정부호다. 이 문장은 빼야지,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꿔야지, 여기는 한 칸 띄어 써야지 하는 식으로 나 스스로에게 지시할 때 나는 교정부호를 사용한다.

나는 이렇게 수정 원고에 남게 된 교정부호를 평면 위에 옮겨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바로 <중첩>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언뜻 보면 추상화 같지만, 구체적인 대상을 옮겼다는 점에서 실은 재현적 구상화라고 할 수 있다.

교정부호가 남겨진 원고 용지는 작품이 완성되면 그 용도가 다한다. 그럼 자연스레 버려지기 마련인데,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왜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하며 종이를 다시 보았다.

결론은 내가 수정하며 남겨놓은 교정부호 손 글씨 때문이었다. 이미 소용을 다한 교정부호의 모양과 배치, 그리고 그 속성은 잘 완성된 원고보다도 나 자신을 더 잘 드러내는 면이 있었다. 삶의 어느 지점에 목적지가 있어서 그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미완성 상태의 나 자신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원고 용지에 남은 교정부호 그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기에 가장 적당한 매체는 글이 아닌 회화였다.

교정부호를 통해 생겨난 새로운 의미는 기존에 원고에 적힌 문장들과 포개어진다. 따라서 그 둘의 의미 또한 포개어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작품을 수정하는 행위는 단순한 정정이 아니라, 의미를 중첩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각각 다른 시제와 상태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다른 질감과 밀도를 지닌 두 시간을 충돌시키고 싶었다. 완성과 미완성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중첩> 시리즈는 그 내용만 보자면 텍스트의 미완성 상태를 구현하고 있다. 교정부호라는 것 자체가 글쓰기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시각적인 증거니까 말이다. 반면, <중첩>이라는 평면 작품이 감상자와 만날 때 이 작품은 하나의 회화로서 형식적으로 완성된다. 나는 이처럼 서로 다른 상태, 혹은 시간, 혹은 차원이 캔버스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간 안에 공존할 때 오는 인지적 효과가 분명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감상자들의 내면에서 생기는 어떤 정서적, 감각적 충돌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하면 말이 좀 되려나. 우리는 미완성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완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미완성 상태에 대한 망각인지도 모른다.

사실 교정부호는 잘못, 부족함, 바꾸어야 할 것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결과물로 자신을 증명하는 창작자에게 교정부호는 어떤 면에서는 치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감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선택했다. 완벽을 맹종하거나, 스스로의 미완성 상태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성을 하나의 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종이에 인쇄된 교정부호를 평면에 수십, 수백 배 크기로 옮겨 그리며 나는 잘못 쓰인 문장과 다시 마주해야 하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가장 나다운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완성이라는 환상 아래 감춰진 진짜 창작자의 얼굴을, 거울 대신 평면에서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이 짧은 작가 노트를 쓰는 데에도 적지 않은 공력을 들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완성에 대한 어떤 신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중첩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성에 대한 내 감정 또한 일종의 중첩 상태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스티븐 스필버그의 실전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