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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Sep 28. 2024

폴 발레리와 말라르메, 발뱅(Valvins)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말라르메는 성자(聖者)였다.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와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는 서로의 문학 세계를 존경했다.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눴다. 1897년에 23명의 시인들은 말라르메 헌정시집을 낸다. 이 시집에 폴 발레리는 시 「발뱅 (Valvins)」을 바친다.      

‘발뱅’은 프랑스 파리 남부 퐁텐블로 숲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1874년 말라르메는 발뱅 농가의 집 한 층을 세내고 여름마다 가족과 함께 가서 머물렀다. 그는 이곳서 센 강 뱃놀이를 즐기거나 시 작업을 했다. 발레리는 1891년 말라르메를 처음 만난 후 파리의 로마 거리 말라르메의 집에서 열리던 ‘화요회’에 가거나 발뱅에 들려 말라르메와 교우(交友)했다.      


시 「발뱅 Valvins」엔 말라르메의 전기(傳記)적 요소는 전혀 없다. ‘당신’이라는 타자와 숲, 강, 배, 그리고 책, 이런 파편들이 하나하나 비밀스러운 종교 예식을 보여주듯이 담겨있을 뿐이다. 한 인간의 정수(精髓)를 그린 것이다. 발레리는 단순한 일상 속에서 ‘시(詩)의 성자(聖者)’처럼 살던 말라르메의 인상을 찬란히 남겼다. 그는 4개 연 14행의  「발뱅 Valvins」에서  자신의 영원한 태양이자 영원한 물줄기를 그리듯 그 존경의 념(念)을 그렸다.      


발뱅 


당신이 산들바람 부는 행복한 숲을 벗어나려 한다면, 

당신은 나뭇잎에 녹아든다. 당신이

영원히 문학적인 흐르는 배 안에 있다면,

뜨겁게 자리 잡은 태양 빛들을 끌고 가면서     

감흥에 취한 센 강이 쓰다듬는 흰 뱃전에서,

찬양받는 오후를 예견하면서,

빽빽한 숲은 긴 머릿단을 물에 적시지

그리고 여름의 절정에 당신의 배를 섞어 버리네.     

하지만 침묵은 날 것의 창공이 사방에 퍼뜨리는 수많은 외침에

당신을 맡기고 그런 당신 곁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책의 흩어진 페이지 그림자가 떨고 있다.     

방랑하는 배의 반영은 

초록빛 강의 찬란한 피부 위에 떨고 있네

반쯤 열린 센 강의 긴 시선 사이에서.     


「발뱅 (Valvins)」은 숲과 강과 태양을 그린 시이다. 강렬한 태양 빛 아래 녹아들 듯한 숲과 고요히 흐르는 강 풍경이다. 눈이 부시다. 배 한 척이 유유히 강 위를 나아간다. 배 위엔 햇빛을 뒤집어쓴 ‘당신’이 책을 뒤적인다. 책 페이지는 떨리는 그림자를 남기고, 배는 센 강 위에 족적을 남기며 나아간다.        


이 시는 침묵이 지배하는 1, 2연과 외침이 등장하는 3, 4연이 대비된다. 전자는 시선의 세계이기도 하다. 숲이 있고, 강, 그리고 배가 있다. 태양과 물이 지배한다. 청량한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다.  후자는 소리의 세계이다. 새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날아간다. 책, 페이지, 그리고 그림자가 나타난다.       

 

 ‘당신’이 숲을 벗어나려 하면 나뭇잎에 녹아든다. 숲과 합일하는 것이다. ‘당신’이 배를 타고 있을 때엔 뜨거운 햇빛을 이끌고, 찬가가 울려 퍼질 오후를 예견한다. 배는 여름의 절정과 뒤섞인다. 그 배는 영원히 문학에 바쳐진 배다. 그런데 새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른다. 오랜 침묵 끝에 일어나는 시인의 각성과도 같다.       


시 「발뱅 (Valvins)」은 물에 반영된 태양 광선 효과를 선명하게 그린다. 그로 인한 시적 성찰은 내면이 아니라 외부의 현실로 나아간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밖’을 향한다. 태양이라는 ‘빛 시선’과 센 강이라는 ‘물 시선’이 만나서 융합되는 자연의 합일도 보여준다. 거대한 눈의 역할을 하는 센 강은 세상 만물을, 우거진 숲을 비전(vision)으로 수용한다. 강은 배의 족적에 따라 긴 시선을 남기고 인간처럼 의인화된다. 여성의 피부이자, 여성의 시선으로.      


「발뱅(Valvins)」은 강렬하고 고요한 시선의 시인가 하면 하면 날아오르는 새들의 울음소리인 외침이 울려 퍼지는 소리의 시이다. 수면(睡眠)에 잠기는 ‘안’의 시가 아니다. 외부, 자연에 침투해 들어가는 ‘밖’의 시이다. 퐁텐블로 숲 속 발뱅 마을 가까운 센 강 위에서 여름날의 환희에 잠기는 시이다. 발레리의 ‘수면의 시’에서 처럼 주체의 몸이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당신(tu)이라는 칭호가 시 전체를 지배하며 현존한다. 이 존재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자연에 침투한다. 하지만 자연과의 합일에 함몰되지 않고 주체의 정체성이 소리친다.  책이 던지는 그림자의 세계와 긴 시선이 이어진다. 자연과 하나 되며 시작된 이 시는 배가 남기는 긴 물결로 마무리된다. 그 긴 물결, 긴 시선은 책을 숭배하는 자의 기나긴 명상의 세계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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