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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상단에

by 감자나무

우측 상단에 학번과 이름 먼저 적고 시작해. 어떤 바보들은 문제 푼다 바빠서 지 이름 적는 것도 까먹더라. 얇은 갱지를 가볍게 넘고 책상의 표면을 부드럽게 누르며 각자의 속도들로 움직이는 연필의 또각거리는 소리. 나는 뾰족하게 깎은 진한 연필이 자기에게 주어진 회색의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 좋았어. 엄마가 종종 꺼내어보는 오래된 앨범처럼 내 새로운 분홍색 앨범도 내가 알고 있었던 모양보다 두껍게, 남은 자리가 없어 하나의 방에 여러 개의 사진이 함께 들어가는 날이 찾아오기를 바랐지. 혼자 있는 것이 어려워질 때마다 끝이 나지 않은 문장들로 채운 교과서를 보고,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믿었어.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너의 목소리를 내 언어로 남겨둘 수 있지. 그 기록은 내게 무엇으로 남을까.

무엇을 하며 비어있는 시간을 채울까 고민하다가 서점 옆 문구점에서 유명한 브랜드의 작은 수첩을 샀다. 누런 종이에 나는 무엇을 채울 수 있을까. 누군가의 제안이나 목소리 없이 나 홀로 기록의 시작을 선언할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수첩을 채워본 적이 있나. 지금 내 생각을 메모로 남겨 두어야겠다는 선택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는 건 나라는 인간을 '우리'만큼 큰 것으로 승격시키는 건 아닐까. 가까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볼펜 뚜껑을 열고 망설였다. 채울 수 있을까. 시작할 수 있을까. 어떤 것으로 문을 열까. 이 나이 먹고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 나만큼 우스운 것으로 고민했던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너에게 던지는 말이라고 포장을 하고서야 나 하나로 시작할 수 있었다. 너는 죽어서도 아직 내게 큰 사람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아낼 수 있지. 이 기록은 내게 무엇을 알려줄까.

카프카의 짧은 산문을 살펴보다가 가벼운 음률을 발견했고, 원문은 어떤 모양으로 그려졌는지 궁금해 살펴보았고, 번역가가 작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하기 시작할 때, 나는 산업용 리프트 제작 업체의 위클리 플래너를 넘기고, 얇은 줄이 그어진 백지에 반듯한 글씨로 산문을 따라 적고, 사무용 책상에 놓인 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수첩을 왜 들고 오고 싶었었는지, 아무도 남지 않은 조용한 밤이 되어서야 천천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일정과 감정 중 어떤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 일주일이라도 충실해 본 적이 있었나. 아니, 그냥 멋진 글들을 옮겨 적었어. 옮겨 적다가 소리 내어 읽어보았지. 끝나버린 문장에 불안정한 것들을 끼워 넣었어. 네가 좋다 울었어.

사람들이 너무 어렵다고 그 사람들 안에 나도 포함이라고, 앞으로는 모든 마음들을 숨기는 사람이 되겠다면서 낯선 반가움과 익숙한 기쁨까지 함께 기록했다. 오늘 이 글을 살펴보는 사람은 그 모순을 발견하고 낄낄 웃으려나. 오늘은 사진을 좀 선명하게 찍어보았거든. 언제나 숨기고 싶었던 일들로만 채워진 하루들도 일기 쓰기를 미루지 않았다. 별것 아니라고, 이런 마음들로 가득 찬 날들이 너에게도 있지 않냐고 나만 유난 떠는 것이 맞다고. 슬픔을 가볍게 다듬다 보면 공격당하는 순간에도 네게 가볍게 퍼질 수 있지. 이것 이제 별것 아닌 것 알고 있지? 새로운 감정들이 모여 또다시 나를 공격하지만 방법을 찾아냈었던 내가 나를 방어한다. 재미있는 책을 읽다가 가볍게 말을 걸고, 내 이야기를 기록하고, 오늘의 날짜를 우측 상단에 가볍게 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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