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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있었는데

by 감자나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 지속될 때에는 바보들이 나오는 책을 찾아 읽는다. 출판사에서 웃으며 받아주었을까 궁금해지는 번역본들을 기억해 둔다. 신선함이 지금과 가까울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잖아. 시간이 지나더라도 손으로 집는 것이 불쾌하지 않게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몸을 단장하는 우리처럼 움직이는 생명을 가진 말. 책의 마지막 장으로 도달하는 과정까지 너는 그가 된다. 어떤 세계 안에서 그는 어느 풍경을 특정 지어 글을 쏟아냈는지,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했는지. 네가 그려본 그를 믿으며 불안을 숨긴다. 의심을 모아 한 곳에 쌓아둔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야. 시간이 지나고 색이 바랜 보도블록을 따라 걷던 나는 결국 땅을 파고 지하철을 만들어보기로 한다. 아니야, 기차를 만들어도 좋겠군! 이 작자는 어쩌다 이런 글을 썼을까. 이 양반은 어쩌다 이 작자의 글을 이렇게 옮길 생각을 했을까. (글로 내 보낼 수 없는, 공기에 흐르는 말들을 모아, 나는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옷을 입혀주고/ 선물하고 싶은지 알 것 같은데 내가 그려낸 이것이 맞나.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길/물/숲/산이 있었으면 어쩌지. 마지막은 끝이 아니야.)

전체적인 줄거리와 신박한 욕만 기억이 나. 이 소시지 같은 년아, 막 굴뚝 청소를 하고 온 사람처럼 보여. 망할 것아. 케이크 칼로 잘라낸 긍정적인 미소와 끝까지 숨겨내지 못한 울음들을 받아먹었다. 내가 맛보지 못한 어둠들은 어느 곳으로 던져졌는지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출판사에서 유명한 작가이자 번역가가 새로운 길을 닦는다고 했지. 눈물을 닦아낸 붉고 거친 볼로 어떤 이야기를 품고 걸어가고 있는지조차 쉽게 읽을 수 없는 할머니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군중에게 짓밟히고 뭉개지고 피를 흘리고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세상을 나는 또 다른 눈으로 다시 살펴보고 싶은가. 어둠을 잘라낸 것은 작가의 바람이었나. 어느 번역가의 선택이었나. 바보 독자의 멀어버린 눈과 먹고 싶은 것만 먹는 입이 문제인가.

글이 되지 못한 혼잣말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머리에서 나가지를 못해. 바라지 마. 기대하지 마. 지금은 멀어지는 것이 좋겠어. 뿌연 눈이 감기고 새로운 밤이 찾아오면 작은 먼지들은 쓸어내지 않는 도로의 일부분이 될 거야. 비어있는 종이를 마주하며 오랜 시간 망설이면서도 쉽게 덮어버리지 못한, 덮더라도 다시 펴고서는 털썩 주저앉아 어떤 혼잣말을 상처 없이 집어 원하는 자리에 붙여낼 수 있을까. 나는 왜 줍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할까. 적당한 시간을 놓쳤다는 혼잣말에 걱정이 몰려오나. 다시는 너를 찾아내지 못할까 두려운가. 거리를 두자.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이 벤치에 앉도록 해. 그저 가끔씩 뒤돌아 봐. 먼지들이 모여 작은 뭉치가 되지 않았나. 안경을 찾아. 봉투에 먼지를 모아 동그랗게 뭉치자.

나는 소심한 사람이야. 네가 가볍게 던진 말에도 잘 삐진다는 소리지. 나이 들어 봐. 별것 아닌 걸로 서운해진다고. 네게 편안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고마울 때도 있지만, 내게 생각 없이 던져지는 말들이 늘어난다면 나는 차라리 네게 불편한 사람으로 남는 것이 좋겠어. 네 마음 안에 내가 살고 있다면, 나의 거주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란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선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쌓여가는 오해들을 가만히 바라보기가 어려워. 나를 웃게 만드는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 싶은데, 이 웃음을 네게도 나누어 줄 수 있게 단순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들이 참 답답해. 어려워. 그래서 책으로 숨나.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내가 결정할 수 있잖아.

기쁜 미소로 갑작스러운 점심 약속을 잡는 사람들의 망설임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서 솔직해보고자 노력한 모든 이야기들에게, 눈을 감고 흘러가는 대로 따라간 사람들의 모든 용기에 나도 그래도 되냐고 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문장의 말미에 연필로 짙은 상처를 냈어. 네가 찾지 못하는 의미도 있어. 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이 있음을 인식하는 과정은 불편하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잃지 않고 살피다 보면 언젠가 색이 없는, 어두운, 이내 해가 뜨고 어제 내린 빗물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마주하겠지. 그때 좀 더 오래 나와 함께 산책하지 않을래?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조용히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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