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04 _ 겨울과 함께 시작
가벼운 글을 생각하니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가 맴돌았다. 내가 이걸 밀리에서 읽었는지 교보였는지 알라딘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릿속에 계속 담아두며 베트남 야시장의 풍경을 그리던 요리사의 글을 읽다가 좀 더 가벼워지고 싶었던 건지,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비슷한 글을 찾고 싶었던 건지 퍼진 라면을 크게 집어먹듯 느긋하지만 큰 보폭으로 읽었다. 음식은 평상시보다 섬세한 것들을 선택했다. 저녁을 만드는 도중에도 눈을 쉬지 않았는데, 목이 뻐근할 뿐이었다. 베개를 베지 않고 잔 탓인가. 자를 수 없는 것들을 잘라내고 싶은 멀어지고 싶은 나태한 감자와 이제 그만, 네가 다가가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자고 엉엉 우는 감자가 싸운다. 긴 잠에 빠지기 전부터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은 산뜻함이 일상을 맴돌았는데, 그 산뜻함에 걸려있는 것들을 잡아채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긴 잠에 빠지고 눈을 뜨니 잡아챌 수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 어쩌지. 멀어지지 마. 차라리 뻔뻔하게 네가 얼마나 바보인지를 말해.
생존에 특화된 똑똑한 비서 지브스 이야기를 후루룩 마시니 이제 진지한 소리를 받아먹어도 되겠구만 싶어 새벽에 들었던 몽테뉴의 <수상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어떤 출판사의 책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 구경하는데, 특정되는 번역가 한 분이 복수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신 모양이고, 다수의 후기에 번역이 구리다는 평이 적혀 있다. 이 정도면 독점 시장을 운영하시는 것 같아 발행 일자나 출판사에 따라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으니 우선 읽기 편한 것으로 선택했다. 문예출판사의 요약본에서도 어떤 계시가 찾아왔음을 내가 느낄 수 있다면 종이책으로 구하든 전자책으로 구하든 알아서 하겠지 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믿고 움직이나? 적어도 떨어지지 않게끔 내가 머물고 있는 시간/ 세상의 움직임에 따라가고 있나?
좋은 글을 써본 적이 있었나. 가볍게 내뱉어본 말들이 모여 어느새 조용한 새벽의 라디오 속 목소리처럼 어색하지 않게 오늘의 시간과 함께 움직였던 순간, 우리의 얼굴 안에 담겨있었던 무거운 미소를 떠올려보기로 한다. 그것은 완벽하게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문장들로만 구성된 이야기가 아니었어. 나는 지금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내가 뱉어낸 말이 너의 귀에 온전하게 들어간 것이 맞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는 거야. 확신이 없다고 했지.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고 했지. 의미는 구름이 많은 날 가려진 햇빛처럼 꼭 꼭 숨어 있을 수도 있는 것. 나는 해가 잠을 자는 여름의 서늘함을 좋아하는걸. 숨어 있는 것을 찾아 내 손에 건네주는 너를 기다리며 편지를 쓰자. 많이 기다렸다고, 찾아주어 고맙다고.
며칠 새 분명한 겨울이 되어버렸어. 추운 걸 알면서도 짧은 양말을 신고, 부하지 않은 외투를 찾아 손을 주머니에 넣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싸늘한 겨울에 던져진 애처로운 여인을 감상하며 뿌듯해하던 어린 시절의 겨울은 이제 없어. 차가운 것이 몸을 감싸면 바로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와 얼마 남지 않은 힘도 훔쳐 가지. 이런 변화들이 찾아와 너를 덮어버릴 때까지 네 주변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닌가 묻는 이에게 주머니 속의 핫팩이 만드는 아늑한 방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돌려 말할게. 나도 모르는 새 비어버렸거나 비어있음을 알아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리에 어울리는 것들을 같이 채워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