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 헨리 5세> 리뷰
1. 궁정 밖에서 퇴역 군인인 '존 팔스타프(조엘 에저튼)'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할(티모시 샬라메)'.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었던 동생이 전쟁에서 사망하고, 부왕인 '헨리 4세(벤 멘델슨)'도 병으로 죽자 할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다. 할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왕이 되고자 하지만, 프랑스의 왕세자인 '도팽(로버트 패틴슨)'의 도발로 인해 프랑스와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믿음직스러운 친구 존과 속을 알 수 없는 신하 '윌리엄(숀 해리스)'의 도움 속에 전쟁을 수행하면서, 할은 왕의 자격과 책임을 배우고 진짜 왕으로 성장해 나간다.
2. <더 킹: 헨리 5세>는 사실 예상 가능한 스토리를 지닌 영화다. 실제 역사와 원작인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이 여러 현실적인 역경을 딛고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이룬다는 스토리는 이미 숱한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접한 익숙한 전개다.
실제로 영화 초반부의 전개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로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는 반란으로 분열된 잉글랜드 왕국을 통합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는 성군의 탄생을 다룬다. 하지만 할이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도착하면서 이 단조롭고 익숙한 영화는 조금씩 생명력을 얻는다. 이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영화의 플롯이다. 할과 그 주변에 등장하는 세 인물 간의 관계를 신뢰라는 주제로 풀어낸 플롯은 인물에 따라 각기 다른 장르를 영화에 부여하면서 할의 성장담을 뻔하지 않게 만든다.
3. 할 주변에 있는 존, 도팽, 윌리엄은 친구, 적, 신하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우선 할은 존을 그 누구보다도 신뢰한다. 설사 그가 자신의 명령을 어길지라도, 단지 자신의 경험과 감에 의존해 전투의 전략을 짜더라도 할은 그를 신뢰한다. 그리고 그를 향한 신뢰는 할이 성장하는 초석이 된다. 존은 할의 신뢰에 보답이라도 하듯, 왕으로서의 부담감에 짓눌리는 할에게 본래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 할이 잉글랜드와 잉글래드인들의 왕이라는 사실도 정확히 일깨워준다. 이러한 할과 존 사이의 신뢰 덕분에 할이 병사들 앞에 서서, 그리고 존을 사지로 몰면서 외치는 격려사는 통상 성장드라마로부터 기대하는 것 이상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도팽은 할의 적으로, 그가 등장하면서 <더 킹: 헨리 5세>는 전쟁영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할은 그를 결코 신뢰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만나기 전에도, 만난 후에도 그의 저의를 의심한다. 이러한 도팽에 대한 의심은 존에 대한 신뢰와 정반대 방식으로 할을 각성시킨다. 존으로부터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정체성을 깨우친 후에, 할은 도팽과 그의 프랑스 군에 대항해 처절하고 참혹한 전투를 펼치면서 왕으로서 다해야 할 책무를 배운다. 존을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불신의 대상인 도팽을 꺾으면서 할은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왕으로 거듭난다.
윌리엄은 할의 충실한 신하로 신뢰로 보이는 관계가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이 작품의 장르 중 정치 드라마를 대변한다. 왕으로서 만나는 사람들은 완전한 친구도 적도 없다. 할은 사람들을 존처럼 완전히 신뢰해서도, 도팽처럼 완전히 불신해서도 안된다. 설사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인물이더라도 할은 그의 저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아쟁투르 전투 이후 윌리엄과의 대화를 통해 할은 신뢰와 불신 사이의 균형이 왜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마침내 왕의 정체성, 책무, 자격을 모두 깨달은 '헨리 5세'로 거듭난다. 이러한 할의 변화와 성장은 초반부 여동생과의 대화라는 복선을 회수하는 전개이기도 하며 이 영화의 플롯이 얼마나 영리한지를 보여준다.
4. 그래서 <더 킹: 헨리 5세>는 익숙하지만 뻔하지 않다. 이 영화는 흔한 시대극도 아니고, 평범한 성장기도 아니며, 일반적인 전쟁영화도 아닐뿐더러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정치 드라마도 아니다.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전형적이지는 않다. 또한 주연 배우인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활용한 연출은 이 작품의 플롯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 준다.
티모시 샬라메는 왕으로서 뚜렷한 의지를 지닌,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불안해하는 할의 외면과 내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배우 본연의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느낌이 한계를 스스로 벗어나려는 작중 인물의 상황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할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형성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얻은 인기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빛과 조명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더 킹: 헨리 5세>를 보다 보면 인물들의 실루엣만 등장하거나 인물의 얼굴에 강한 명암대비가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조명은 영화 전개에 있어서 확실성을 제거해서 영화 전반적으로 낮게 깔리는 긴장감을 형성하고, 영화 말미 약간의 반전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강한 그림자와 명암 대비를 통해서는 믿음과 불신, 두 주제 사이의 긴장관계를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5.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 덕분에 살아난 할과 달리, 다른 인물들이 상당히 평면적으로 묘사된 부분은 그렇다.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듬직한 동료, 비열한 적,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신하라는 인물들 자체가 단편적이고 도구적으로 활용된 결과인 셈이다. 실제로 이들은 할에게 가르침 혹은 깨달음을 주고 나면 영화에서 그 존재감이 사라져 버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사뭇 스케일이 커 보이는 전투씬은 실제 전투 양상을 잘 반영하고, 영화의 분위기를 따라 사실적이고 처절하게 잘 연출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좌의 게임> 시즌 6의 윈터펠 전투 혹은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아웃로 킹>의 전투씬처럼 어디선가 본,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전투씬들로 인한 기시감을 떨쳐내기 힘들다. 또한 영화의 전개가 다소 느리고 클라이맥스에서 감정적으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도 보니 호불호가 갈릴 여지도 크다.
그러나 자칫 뻔할 수도 있는 스토리를 단조롭지 않은 플롯과 적절한 빛의 활용, 그리고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게 스크린으로 옮겨 낸 것은 분명히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 중 고민 없이 당당하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 <더 킹: 헨리 5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