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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Dec 26. 2019

<천문>, 역사의 빈 공간을 진부하고 빈약하게 채우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 리뷰

1. 명나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만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바탕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꿈꾼 왕 '세종(한석규)'. 그런 그에게 '영실(최민식)'은 조선만의 시간을 알려주고, 조선의 하늘을 알려주며, 조선의 절기를 알려준, 그의 꿈을 그려낸 두 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천문 연구를 문제 삼아 거듭 조선을 위협하고, 다수의 신하들이 이에 동조하여 영실을 파직해야 한다며 세종을 압박한다. 때마침 영실이 만든 왕의 가마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궁에는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기 위한 피바람이 불어닥친다. 


사극이 개봉할 때면 언제나 역사 왜곡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랏말싸미>가 대표적인 경우다. 많은 감독들과 평론가들이 역사는 역사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일련 타당한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극의 본질을 생각하면 이는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다. 사극은 물론 실제의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관건은 영화 속 그 역사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문: 하늘에 묻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영화 속 인물들은 진부하다. 애민군주, 소탈한 군주, 욕하는 세종이라는 캐릭터는 더 이상 새로울 구석이 없다. 심지어 배우마저 같으니 기시감은 배가 된다. 장영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장영실을 세종의 은덕으로 노비를 면한, 우국충정으로 무장한 인물로 묘사한다. 대중들이 두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겼을 뿐, 재해석의 여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구조도 빈약하다. 시간대를 비틀며 어떻게든 스토리텔링에 긴장감과 흥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지만, 너무나도 굳건하고 변함없는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 덕분에 이러한 시도의 끝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그 결과, 후반부에 시도된 분위기 전환도 급작스럽고 긴장감이 부족하다. 영화는 소재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후반부에 훈민정음이 등장할 만큼, 천문이라는 소재는 끝내 맥거핀으로 소비된다. 혼천의가 뭔지, 간의는 뭔지, 간의대는 뭔지, 칠정산은 뭔지에 대해서 천문역법을 다루는 영화는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3. 영화는 심지어 전형적인 스토리로 일관한다. <천문>의 스토리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세종과 영실의 브로맨스, 그리고 천문을 둘러싼 조선, 세종과 명, 신하들의 힘겨루기다. 이중 세종과 영실의 브로맨스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후자다. 명나라 황제의 교지를 읽는 장면부터, <천문>은 조선과 명나라의 힘겨루기, 곧 자주 대 사대, 민족 대 외세라는 이분법을 통해 역사를 다시 읽어내고 세종의 행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시각은 영화의 방향성과도 맞지 않고, 영화를 안일해 보이게 만든다. 조선 대 명나라라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활용된 캐릭터들의 경우 평면적이고 기계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그러니 그들이 꾸미는 음모, 만들어 내려는 위기는 실제로 급박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세종이 넘어가야 할 작은 걸림돌처럼 보인다. 세종과 영실의 관계를 부각하려면 그들이 겪는 위기가 급박하고 위험할수록 효과적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또한 사대와 자주, 외세 대 민족의 대결구도는 그간 한국 사극들이 숱하게 묘사한 소재들이다. 세종 시기의 무기 개발을 소재로 삼은 <신기전>이 대표적인 예시인데, 10년 전에 개봉한 작품과 거의 동일한 구조와 주제의식을 답습하고 있으니, 영화가 안일해 보이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영화가 세종과 영실이라는 인물 간의 관계에 집중한 작품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말하기기에는 민족 대 외세의 대결구도가 지니는 비중이 극 중에서 너무나도 크다. 



4. 관객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킬 포인트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높은 평가를 받고, 흥행에도 성공했던 사극들의 경우 대중들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채워주거나, 반영한 경우가 많다. <광해>의 경우, 정치와 리더십에 실망하던 사람들에게 참된 리더의 모습과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유려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바 있다. 영화가 현재를 읽고, 현실을 역사에 투영시킨 것이다. 


하지만 <천문>은 그러지 못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화두는 공정성이다. 사람들은 진영에 관계없이 불공정한 기득권 층의 모습에 분노하고, 사회적 계층이 고착화된 현실에 좌절한다. 그리고 장영실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시키기 충분한 소재일 수도 있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천민 출신이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발판 삼아 출세했다가 끝내 시대의 벽에 가로막힌다는 내용은, 현재 노력 만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할 수도 있고 욕망을 대신 실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이런 가능성을 지닌 소재로 민족주의와 애민정신이라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영화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



5. 진부함과 빈약함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그나마 배우들의 연기는 최후의 보루로서 몫을 다한다. 한석규와 최민식이 살려낸 세종과 장영실의 브로맨스는 후반부 핸드헬드 카메라와 더해지면서 그 미안함, 애틋함, 고마움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며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한다. 신구, 허준호 등 원로 배우들이 부여하는 무게감도 흔들리는 영화를 간신히 잡아주고 있다. 


그간 한국 영화가 사극을 만드는 방식은 대동소이했다. 실록에 기록된 한 줄을 이용해서 앞뒤 정황을 나태한 상상력으로 무마하는 것. <천문: 하늘에 묻다>는 오래되고 검증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거부한, 또 한 편의 한국 사극이다.



P(Poor, 형편없는)

배우들만 빼면, 10년 동안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그저 그런 한국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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