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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Dec 20. 2019

<백두산>, 시작은 볼만했다

<백두산> 리뷰

1. 백두산에서 유래가 없는 대폭발이 발생하자 청와대 민정 수석 '전유경(전혜진)'은 지질학 교수 '강봉래(마동석)'을 설득해 백두산 폭발을 막을 방법을 찾아낸다. 폭발을 막기 위해 군은 전역을 앞둔 EOD 대위 '조인창(하정우)'을 포함한 특전사 부대를 북한으로 파견하고, 인창은 만삭의 아내 '최지영(배수지)'과 이별한다. 북한에 잡입한 인창과 특수 부대는 백두산 폭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핵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정보원인 '리준평(이병헌)'과 접선에 성공하고, 그들은 백두산의 폭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북으로 향한다.


<백두산>처럼 막대한 자본과 스타 배우들이 투입된 한국 영화들의 임무는 분명하다. 개봉 시즌 극장가를 장악해서 확실한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보여줘야 할 것이 많다. 장르 영화로서의 재미도 보여줘야 하고, 연말 대작다운 스펙터클도 있어야 하며, 짧더라도 스타 배우들에게 기대할 만한 멋들어진 액션 몇 장면도 넣어야 하고, 배우들의 연기력을 보여주기 위한 감동적인 눈물도 몇 방울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관객들이 더 이상 기획된 한국 블록버스터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2. 영화로서 <백두산>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영화의 시작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가 대사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일단 <백두산>은 긴 설명 없이 인창을 곧장 지진의 한가운데 집어넣으면서 시작하는데, 지진으로 인해 초토화되는 서울 시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만큼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인물들의 개인사를 들어내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전개 덕분에 긴장감을 순간적으로 최대로 끌어올리면서 재난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편, 작중 인물들은 유독 같은 대사를 서로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주로 리준평과 조인창, 강봉래와 전유경이 서로 같은 말을 주고받는데, 그때마다 인물들의 관계가 한 단계씩 전진하는 전개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재치가 돋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뒤통수에 왜 눈이 없는지 알아?"라는 그냥 지나가는 말일 뿐이었던 이 대사가 유머, 위협, 우정으로 변화하는 대사로 변하는 과정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분명히 흐뭇한 미소를 자아낼 수 있는 대목이다.  



3. 그러나 <백두산>의 나머지 영화적 요소들은 그저 실망스럽기만 하다. <백두산>은 본인 만의 매력이 없다. 영화 전체가 클리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화산 폭발과 재난을 맞이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2012>나 <아마겟돈> 같은 재난 영화의 교과서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다. 그나마 인상적인 영화의 시작도 <월드 워 Z>를 따라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른 장르적 요소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를 활용한 첩보 드라마는 이미 <강철비>나 <공작> 같은 작품들이 고유한 스타일과 뛰어난 솜씨로 다룬 바 있어서 영화에 집중할 만큼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액션 영화로서도 합격점을 주기 어렵다. 분량 자체도 적고, 북한에서의 시가전이라는 배경을 제외하면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무난한 연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홉스 앤 쇼> 같은 버디 무비로서의 재미는 잡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몇 안 되는 장점일 것이다.  


신파의 활용도 아쉽다. <백두산>은 한국영화의 공통된 문제로 지적받는 신파극의 요소를 줄이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실제로 재난 때문에 생이별을 한 임산부와 남편, 수년간 만나지 못한 아빠와 딸이라는 울고불고 매달리고 애원하기 좋은 소재에 비하면 나름 맺고 끊음이 확실한, 비교적 차분한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온갖 장르들이 뒤섞여서 재난 영화로서도, 액션 영화로서도, 첩보물로서도 자격미달인 상황에서 신파마저 없는 영화는 그저 산으로 갈 뿐이다. 차라리 <판도라>처럼 신파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 결정적으로 <백두산>은 일관성이 없다. 수많은 세부 플롯 때문에 정치 스릴러, 코미디, 액션 영화들을 중구난방으로 넘나드는 편집이 나은 결과다. 개연성도 없다. 저 많은 플롯들을 한정된 러닝타임 내에 압축시켜야 하니 전개에 필요한 설명들도 필연적으로 편집될 수밖에 없다. 국가적인 재난 상태라는 영화의 분위기나 톤과 어울리지 않는 군인들의 어설픈 개그나 <분노의 질주 7>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액션씬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원인이다.


이는 여름에 대성공을 거둔 또 다른 재난 영화, <엑시트>와의 핵심적인 차이다. 사실 <엑시트>도 재난 영화, 액션 영화, 코미디 영화의 정체성을 함께 묶어내야 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과제를 두 어깨에 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엑시트>는 재난을 그저 배경으로 철저히 설정한 채, 액션에 방점을 찍고 코미디로 잔재미를 주면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보인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백두산>도 욕심을 버릴 줄 아는 미덕을 발휘했다면, 지금과 같은 참사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5. 다만 이 문제점들은 <백두산>만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 영화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백두산>도 결국에는 클리셰 범벅인 스토리를 여러 유명 스타들의 캐스팅과 수백억의 제작비로 무마하려는, 안정된 흥행을 추구하는 기획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영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영화계가 작년 겨울 <PMC>, <스윙 키즈>, <마약왕> 등의 대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두산>은 검증된 흥행 코드, 스타 배우, 개봉 시기만 믿는 영화 기획과 제작의 유효기간이 다했다는 반증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비수기에도 천만 영화가 등장하고, 스타 배우가 없어도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장기 흥행이 가능하며, 수많은 ott 서비스가 영화관의 아성을 위협하는 변화의 흐름을 한국 영화계도 이제는 진지하게 분석하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들의 변심은 생각보다 더 빠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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