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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Feb 21. 2020

<1917>, 참혹한 전쟁 속 동고동락하는 2시간

<1917> 리뷰

1. 1917년 4월 6일, '에린무어(콜린 퍼스)' 장군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상병과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 일병을 작전실로 부른다. 그는 영문을 모르는 두 병사에게 블레이크의 형이 복무 중인 데본셔 연대 2대대가 독일군을 총공격할 계획인데, 작전대로 진행할 경우 독일군의 함정에 걸려 전멸당할 위기에 놓여있음을 알려준다. 문제는 독일군이 통신선을 다 끊어서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것. 이에 에린무어 장군은 2대대장 '매켄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중령에게 전할 작전 중단 명령서를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에게 맡기고, 둘은 1600명의 목숨과 가족을 살리기 위한 이틀 간의 행군에 나선다.  


제1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서부전선은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다르게 영화에 담아내기가 어렵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처럼 대규모 전투가 많았던 제2차 세계대전 서유럽 전선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은 솜 전투를 제외하면 극적인 사건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서부전선은 겨우 수 m를 전진하기 위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던 지리멸렬한 참호전이었다. 승리의 환희 대신 생존의 안도감이 지배적인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은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는 다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전쟁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전장에 빠트린다.



2. <1917>은 화면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동시에 운동감 넘치는 롱테이크(Long take, 길게 찍기) 기법을 이용해 전쟁터를 스크린으로 옮긴다. 실제로 영화는 휴식을 취하던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스코필드가 나무에 기대 가족들의 사진을 바라보는 엔딩까지 단 한 번도 끊기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모든 장면을 이어서 찍은 것은 아니다. 독일군 갱도가 무너지거나, 스코필드가 쓰러질 때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장면에서는 각각의 롱테이크 장면들을 절묘하게 이어 붙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스코필드 바로 옆에서 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롱테이크 화면에는 시체들로 가득한 진흙뻘과 강가 같은 환경, 전쟁에 지치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장교들과 병사들의 모습을 일일이 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주인공의 모든 일을 함께 겪는 것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 심지어 때로는 체험을 넘어서서 실제로 참호와 불타는 프랑스 마을에 가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동시에 <1917>은 롱테이크를 통해 극한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관객들은 철저히 스코필드의 시점에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가 아는 것만 알 수 있고 그가 모르는 것은 알 수 없으므로 모든 상황을 그의 시점에서 판단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2시간 동안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끝없는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독일군 저격수와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처럼 완전히 주인공의 입장에 몰입할 수 있는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영화는 전쟁터라는 현장을 보여주고 체험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 관객들을 붙들어 다.    



3. 그러나 <1917> 재는 스토리텔링 없이 롱테이크 촬영과 편집 같은 기술적 성취만으로 전쟁을 스크린에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스코필드가 에린무어 장군의 명령서를 매켄지 중령에게 전달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스코필드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그의 희망이 새로운 희망 절망을 선사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이 영화의 간단한 스토리도 흥미로워진다.


에린무어 장군의 작전 중지 명령서를 전달하는 스코필드는 그 존재 자체로 1600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가 숱한 죽음의 고비들을 넘기면서도 살아겠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전쟁 때문에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그가 한 프랑스 여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평화로운 숲에서 노래를 들으면서 전쟁에서 살아남아 가족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희망을 다시 갖기 때문이다.


반면에 매켄지 중령은 그가 품던 희망을 포기한다. 그는 이번만큼은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고, 그래서 휘하의 병력을 모두 투입해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고 전쟁의 양상을 뒤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려는 스코필드의 희망으로 인해 작전은 중지되고 그렇게 그의 희망도 물거품이 된다. 이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또 절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1917>은 전쟁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만 끝기 위해서는 누군가 죽어야만 하는 전쟁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4. 한편 <1917>은 이 영화를 보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왕립 소총 1대대 알프레드 멘데스 일병의 일화를 담아냈다는 자막의 경우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영화가 묘사하는 처절함과 참혹함을 마주해야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따라서 영화의 내용이 생생한 현실이었다는 자각이 없다면, 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전쟁에 던져진 인물들의 고통과 두려움을 그저 소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동시에 영화는 전쟁이 사람에게 끼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본 나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잊어버린 군인들, 죽어가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병사들, 수많은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전쟁을 끝내려는 일그러진 일념에 불타는 지휘관들의 모습까지. 이처럼 <1917>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담아내면서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가슴 싶은 곳에서 느끼도록 한다. 이는 매켄지 중령이 원통함에 사무치는 목소리로 내뱉는 "이 전투는 모두가 죽어야 끝난다"라는 대사가 뇌리에 남는 이유다.



5.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917>은 기대와 달리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이후 <1917>의 스토리가 <기생충>에 비해 깊은 메시지가 없다는 점, 작중 스코필드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인물들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는 점 등이 수상에 실패한 이유로 거론되기도 했다. 실제로 <1917>에서는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변화무쌍한 플롯, 살아 숨 쉬는 등장인물, 세심하고 상징적인 연출을 활용해 새로움과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생충>의 매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다소 부족한 듯 보이는 <1917>의 만듦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전쟁의 처절함, 전쟁으로 파괴되는 인간상을 보여주며 전쟁을 비판하는 영화의 메시지는 관객들이 영화 속 상황과 불편한 감정을 생생히 느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다만 영화의 관객들이 전쟁과 같은 상황을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샘 멘데스 감독은 롱테이크와 같은 화려한 기교로 전쟁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스토리가 단순해지고, 인물들이 평면적으로 묘사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버린 <1917>의 성취 또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O(Outstanding, 특출남)

다시 보는 게 두려울 정도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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