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언론 시사회를 끝낸 '황정민(황정민)'은 귀가하던 중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최기완(김재범), '염동훈(류경수)', '고영록(이규원)'을 마주한다. 모욕적인 질문과 요구를 일삼는 그들에게 따끔한 조언을 남기고 갈 길을 가던 정민. 그러나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습격을 받은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포박된 채로 간신히 깨어난다. 전날 밤에 마주쳤던 청년들과 재회하고, 그들과 동료인 '샛별(이호정)'과 '용태(정재원)'가 가하는 협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자신과 또 다른 인질 '소연(이유미)'의 몸값으로 현금 5억 원을 주기로 약속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정민은 배우로서의 역량을 총동원해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필감성 감독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인 <인질>은 유덕화 주연의 중국 영화 <세이빙 미스터 우>의 리메이크작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모큐멘터리라는 점으로, <여배우들>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차인표>처럼 스타들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의도적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 상황 자체를 즐기도록 유도한다. 한국영화에서 모큐멘터리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질>은 존재 자체로 신선한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대담한 시도는 흥행 보증수표이자 원톱 주연으로서 영화를 지탱할 연기력도 일찌감치 검증된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갖는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대체 불가능한 황정민의 존재가 <인질>의 근본적 한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정민의 존재감에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과연 허구와 현실 사이를 오가는 모호함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물론 <인질>의 황정민 활용법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특히 정민이라는 캐릭터는 그가 배우다운 존재감을 발휘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순간마다 빛난다. 본래 지병인 심장병을 활용해 인질범들과 수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정민이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만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고는 의자에 묶인 채 심장병이 도졌다며 고통스러워하는 정민을 제시한다.
이 순간 그가 실제로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객과 달리 인질범들은 그가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가 그 확신과 의심의 정황을 짧은 순간 수 차례 비틀기 때문에 관객과 인질범이 혼란 속이 느끼는 서스펜스는 자연히 고조된다.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곧 캐릭터인 점을 이용해 현실과 허구 사이의 모호함을 영화 내외적으로, 양쪽 모두에서 극대화하는 것이다. <베테랑>과 <부당거래> 속 캐릭터 이름을 이용해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 <신세계>에서의 명대사를 활용한 유머가 등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 외에도 <인질>은 작중 사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연출이나 인질범들이 유튜브를 통해 폭탄 및 총기 제조법을 배우는 설정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허구의 영화를 현실로 끌어들인다. 신인배우들을 대거 등장시키는 것은 그중 가장 영리한 선택이다. jtbc 드라마인 <이태원 클라쓰>나 <알고 있지만,> 등에서 눈도장을 받은 염동훈 역의 류경수나 샛별 역의 이호정이 출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낯선 마스크를 지닌 배우들 덕분에 황정민이 경험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를 순간 혼란스러울 정도로 섬뜩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메인 빌런 최기완의 첫 등장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인질>의 줄타기는 이내 점점 위험해진다. 영화가 황정민이라는 배우에게 집중하기보다는 판을 키워 나가면서 점차 균형점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인질범들은 황정민의 집에 침입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돈을 갈취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고,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도 적지 않은 비중과 분량을 할당받는다. 이때 카메라가 황정민이 갇혀 있는 아지트 밖으로 나가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의 존재감은 줄어들고, 아지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문제점들은 햇빛 아래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림자 밖으로 나온 <인질>의 단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황정민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 다른 캐릭터들이 충분히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지 않다. 말투와 걸음걸이, 표정과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실제 인물을 그대로 옮긴 듯 생동감 넘치는 작중 황정민 캐릭터에 비하면 나머지 인물들은 일반화되어 있고, 도구적이고 작위적으로 소비된다. 압도적인 악역처럼 보이던 기완만 하더라도 익히 접해왔던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전형을 답습하는 데 그친다. 첫 등장과 달리 그는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인 인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쉽게 끓어 올라서 위기를 자초한다. 그가 경찰들을 놀려먹는 것도 치밀함보다는 절박함의 발로에 불과해 보인다. 다른 범인들이 욕과 고함을 반복할 뿐, 기존의 악역들과 특별한 차이점을 보여주지 못하는 데서도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의 얼굴만 달라진 깊이의 부족이 드러난다.
이렇게 평면적인 캐릭터의 근원에는 짜임새가 부족한 서사가 있다. 각각의 인물들이 뛰어놀 수 있는 판이 제대로 깔리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황정민이 인질범들의 아지트에 갇힌 직후 영화는 다섯 범죄자들의 관계를 훑어준다. 이때 그 안에서의 위계나 애정관계, 이해타산이 꽤 명확하게 드러나다 보니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나마 기완이 선사하는 반전이라고 할만한 대목도 예상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경위의 세밀함보다 사건의 진행과 임팩트를 보여주기에 급급한 것도 문제다. 마치 <더 테러 라이브>가 각 사건들의 연결성보다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분위기와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선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당장 국민배우가 갑작스레 납치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기에, 막상 범죄자들의 동기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충동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그들의 관계에는 그 외에 아무런 접점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굳이 온 세상에 자신들의 범죄 행각을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잘 알려진 연예인을 납치하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모든 문제는 한정된 예산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기에 캐릭터들의 사연을 가능한 한 압축시켜야 했던 선택과 집중이 낳은 불상사로, 결국 영화의 장점이 돌연 한계로 전환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인질>은 상업적으로 유효하고 재밌는 영화다. 원 테이크로 찍은 카 체이싱 장면이나 산에서의 추격전은 박진감이 넘친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뚝심도 인상적이다. <부당거래>, <신세계>, <베테랑>과 같은 황정민의 필모그래피를 훑는 장면과 더불어 여러 영화들을 오마주한 장면들은 마치 한국의 범죄 액션 영화를 총망라하는 듯 보이며 색다른 재미를 준다. 빗속에서 정민과 기완이 펼치는 격투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을 연상시키며, 경찰이 취조실에서 범죄자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여러 범죄 영화의 잔상이 느껴진다.
단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결정적인 장점인 '현실과 픽션의 모호한 경계를 즐기는 재미'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순간, <인질>의 한계가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다는 유일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뿐이다.
A(Acceptable, 그럭저럭 괜찮음)
황정민의, 황정민에 의한, 황정민을 위한 9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