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가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프리 가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게임, '프리 시티'의 모습은 포트나이트와 GTA 시리즈를 닮았다.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가 자신의 현실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스토리 라인, 주어진 각본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과 그를 보며 당황해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트루먼쇼>가 보인다.
저작권 제국인 디즈니의 힘을 빌린 크리스 에반스의 카메오 출연 및 캡틴 아메리카 방패, 헐크의 팔, 스타워즈 광선검 같은 이스터에그의 등장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연상케 한다. 코나미를 비튼 게 분명해 보이는 게임회사 수나미의 존재 역시 <레디 플레이어 원>만큼이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준다. 작중 게임과 현실을 넘나드는 가이의 존재감 또한 영화와 현실 사이 '제4의 벽'을 넘나들던 라이언 레이놀즈의 인생 부캐, 데드풀에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프리 가이>를 단순히 수많은 레퍼런스가 집합한 오락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을 게임 속 NPC로 설정한 결과, <프리 가이>는 현실에서 NPC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는 물론, 그 이상의 희망을 주는 영화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날강도와 피 튀기는 총격전이 공존하는 버라이어티한 도시, 프리 시티에서 평범한 은행원의 삶을 살아가던 '가이'는 거리에서 우연히 '몰로토프 걸(조너 코디)'과 마주치고, 한눈에 그녀에게 반해버린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사실 '밀리'이고, 가이가 보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게임 속 플레이어일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동업자 '키즈(조 키어리)'에게 가이는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을 프리 시티의 개발자 '앙투안(타이카 와이티티)'이 무단으로 도용한 증거를 찾을 때 도움이 되는 npc에 불과하다고도 말한다. 이에 그녀를 만나 마침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믿었던 가이는 큰 좌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프리 가이> 역시 주인공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남겨두지 않는다. 진실을 깨달은 가이는 절친이자 은행 경비원인 '버디(랄렐 호워리)'를 찾아가 이 세상이 사실 가짜이고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에 불과하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버디는 이렇게 답한다. 세상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찰나의 순간과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이러한 버디의 말을 들으면서 가이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동력을 얻고, 그는 자신의 세계인 프리 시티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프리 가이>의 중심 플롯을 뒷받침하는 메시지, 곧 지금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자는 격려는 낯설지 않다. 일례로 이는 작년에 큰 반향을 일으킨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개개인을 마모시키고 파편화하는 사회에서 무작정 목표만을 쫓기보다는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두고 지금 이 세상을 즐기자는 <소울>의 메시지도 재즈 음악을 만나 현대인들의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진 바 있다.
하지만 익숙함과 별개로 <소울>의 위로에는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은 일장일단이 있기도 하다. 당장의 삶이 고달픈 이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이지만,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그 위로는 언제든 마약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구조적 모순과 현실의 문제를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프리 가이>는 <소울>의 따뜻함 이면에 숨어 있는 이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그 중심에는 가이가 NPC라는 설정이 위치한다. 이 설정을 통해 <프리 가이>는 현대인들의 삶을 가이의 삶에 일치시키고, 자칫 평범할 수 있었던 위로를 실천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탈바꿈시킨다.
작중 NPC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종속성을 꼽을 수 있다. NPC는 자기 결정권을 지니는 일반 플레이어와 달리 게임이라는 세상 안에서 미리 결정된 방식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들은 주어진 시나리오에 갇혀 있으며, 심지어 규칙에서 어긋나는 것을 불편해하며 스스로를 그 시나리오에 가두려고 한다. 버디는 가이로부터 불편한 진실을 들은 후에도 애써 이를 무시하려 한다. 카페 사장은 늘 마시던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달라는 가이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매일마다 강도를 만나는 행인은 항복의 의미로 들어 올린 두 손을 좀처럼 내리지 못한다. 밀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이도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이때 NPC들이 스스로를 게임의 규칙 속에 가두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작품에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게임 밖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도 NPC처럼 일정한 규칙에 순응하게끔 스스로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근대적 감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고찰한 결과, 푸코는 감옥 체계가 공장, 학교, 병원 등과 같은 감옥 밖의 현상과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판옵티콘을 닮은 사회 안에서 현대인들은 전반적으로 규율과 규범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당장 교사가 학생을 감시할 수 있는 교실 구조, 불법 인터넷 사이트에 뜨는 유해정보 차단 알림 화면, 도로 구석구석 깔려 있는 cctv 등은 현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감시, 감독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칙에 종속시킨다는 공통점 덕분에 그저 한 NPC의 판타지였던 <프리 가이>는 이제 현대인들의 일기나 다름없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푸코가 감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안한 내용을 가이가 실천에 옮긴다는 사실로, 바로 이 대목에서 <프리 가이>는 동병상련의 위로를 넘어서는 실제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푸코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위반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며, 가능한 경우 변형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가 제시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에 맞는 삶을 살아야 억압적인 사회와 권력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작중 가이는 이 모든 일을 해낸다. 그는 밀리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을 통해 프리 시티라는 게임, 곧 사회의 오류를 발견한다. 이후 자신에게 부과되었고 본인이 이유도 모른 채 유지시켜 온 라이프 스타일을 거부한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커피를 마시며 은행에 출근해서 똑같이 은행 강도를 만나야 했던 그는 의식주를 바꾸는 것은 물론 직접 은행 강도를 때려눕히기까지 한다.
심지어 영화는 가이의 이타심과 연대라는 키워드를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는 주인공 '가이(guy)'의 이름이 남녀 상관없이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이고, 그에게 깨달음을 주는 친구의 이름이 문자 그대로 친구라는 의미인 '버디(buddy)'인 이유이기도 하다. 가이는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주변인들에게도 전파한다. NPC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게임 플레이어들만의 세상을 발견한 후에는 새로운 세상의 재미를 버디와도 함께 나누려고 한다. 프리 시티가 게임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것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게임 속 모든 NPC들을 불러 모아서 불편한 진실을 전하고, 모든 순간순간을 가치 있게 살겠다는 자신의 다짐도 공유한다.
카페 사장은 늘 만들던 커피가 아니라 카푸치노 같은 새로운 메뉴들을 만들어 내고, 매일 강도를 만나 손을 번쩍 올려야 하던 남성은 그 손으로 주먹을 쥐어서 강도를 때리려고 노력한다. 플레이어들에게 퀘스트가 되어주는 대신 NPC끼리 한 데 모여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파업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이와 친구들이 진정한 자유로 가득한 도시, 프리 시티를 일구어내는 모습을 보면 이미 NPC들과 한 마음인 관객 역시 일상 속 작은 변화를 통해 현실의 큰 변혁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프리 가이>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위로가 아니라 보다 실천적인 희망으로 이해될 공간을 남겨둔다.
다만 <프리 가이>를 현대인이라는 NPC에게 각성의 희망을 건네는 영화로 이해할 때, 이 작품의 결말은 유난히 짙은 아쉬움을 선사한다. <프리 가이>는 애매한 비중을 차지하던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급진전시키면서 마무리된다. 이때 로맨스가 부자연스럽게 부각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아를 찾고 자신만의 세상을 일구어낸 가이의 의미를 다시금 제한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로맨스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이를 마치 게임 개발자의 아바타처럼 묘사하면서 대담한 전개에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프리 가이> 속 다른 단점들마저 가려버린다. 게임 속 이야기에 비해 게임 밖에서 밀리와 키즈가 앙트완과 대립하는 플롯의 몰입도가 부족한 것과 게임회사의 모든 작업이 엔터 키 하나로 처리되는 편리한 전개 등은 결말이 남기는 물음표에 압도된다. 개개인이 자신에게 부과된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영화가 정작 본인에게 부여된 상업영화라는 한계는 이겨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이렇게 <프리 가이>는 짜리한 해방감만큼이나 짙은 미련을 안기며 결승선 코앞에서 발을 헛디딘 채 마무리된다.
* <괴물과 함께 살기>, 정성훈, 미지북스, p.155-157
** 같은 책, p.162-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