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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Sep 24. 2021

웃고 울게 만드는 <기적>의 세 가지 특이점

<기적>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찻길은 있어도 정작 기차역은 없는 마을에서 아버지 ‘태윤(이성민)', 누나 ‘보경(이수경)'과 함께 살아가는 ‘준경(박정민)'. 누나와 함께 마을에 남아 왕복 5시간 통학길을 감수하며 지내는 그는 마을에 간이역을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청와대에 계속해서 보낸다. 이러한 준경에게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자칭 뮤즈 ‘라희(임윤아)'는 그의 편지 쓰기를 돕기 시작하고, 준경의 편지에 지금보다 더 큰 힘이 실리도록 장학퀴즈나 대통령 배 수학경시대회에 응시할 기회도 마련해준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던 찰나에 준경에게는 따뜻한 기적이 찾아온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자 역사인 양원역을 모티브로 한 <기적>은 추석 시즌 영화답게 웃음과 눈물, 감동과 풋풋한 로맨스까지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준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전반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결코 가볍지 않은 가운데, 두 주인공의 로맨스처럼 결이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대목은 서로 다른 두 영화를 이어 붙인 듯한 어색함도 자아낸다. 이처럼 종합 선물세트 같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어색한 친척 같기도 한 <기적>의 인상은 작중 빛나는 세 가지 특이점, 터널, 기적, 그리고 반딧불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기적>의 전반부를 놓고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면 엉성하다고 볼만한 순간이 적지 않다. 마을 주민들의 불편함은 이해가 되지만, 준경의 동기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다 보니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간이역에 대한 그의 집착은 공감을 일으키지 못한다. 불도저처럼 직선적인 라희와 소심한 준경의 티키타카도 풋풋한 싱그러움과는 별개로 억지스럽다. 우연적인 만남으로 시작해 우정을 빙자한 로맨스는 간이역 설립을 위한 준경의 편지 쓰기를 라희가 도우면서 진행되는데, 애초에 준경의 동기나 목적이 와닿지를 않으니 그 과정이 지나치게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보는 중에는 위의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엄연히 픽션 영화인만큼, 기본적으로 <기적>의 매력은 동화적 판타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장훈 감독은 시작과 동시에 본인의 전작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처럼 영화의 배경을 현실이 아닌 동화로 옮겨 놓는다. 예상치 못하게 터널에서 튀어나오는 화물 열차를 피하는 찰나에 준경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우진(소지섭)이 사별한 연인 수아(손예진)를 터널에서 다시 만나는 데서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터널이라는 존재가 <부산행>의 마지막 장면처럼 흔히 특정한 시점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을 나누는 분기점처럼 활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한 편의 판타지를 그려내는 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 덕분에 다소 엉성하고 어색할 법한 장면이나 설정도 오히려 동화적인 분위기를 살려주는 포인트가 된다. 



이렇게 <기적>이 그려내는 동화적인 판타지는 보경과 관련된 부자의 가슴 아픈 과거사가 등장하는 중반부터 반전과 신파의 힘을 극대화하는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관객을 동화 속으로 초대하는 오프닝에 가려져 있던 현실을 일깨우고 과거의 사연을 뒤늦게 털어놓으며 의문을 해소시키고, 역으로 감동과 눈물을 자아내면서 가족의 비극을 강조한다. 이러한 전개 역시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같은 전략이 다시 한번 적중한 결과 기꺼이 눈물을 흘리고 싶은 신파가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신파에서 제목인 '기적'의 중의성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선 영화 제목은 기적(miracle)을 뜻하며,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간이역을 기어코 만든 준경의 사연은 분명 기적이라고 부를 법하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이 기적은 아니다. 영화는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를 생각지 못하는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는 두 남자가 과거의 비극을 극복하는 것도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준경은 도로조차 없는 시골 구석에서 무려 NASA에 장학생으로 유학 갈 기회를 잡지만, 과거의 아픔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것을 망설인다. 아들의 상처를 공유하는 아빠 태윤은 준경에게 자신의 아픔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들을 따뜻하게 대하지 않으며, 결국 고민에 휩싸인 그를 돕지 못한다. 이때 영화는 두 부자가 결코 이겨낼 수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장애물을 끝내 넘어서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붙잡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마침내 완공된 간이역에 첫 기차가 들어서는 순간과 일치시킨다. 기차의 기적 소리(whistle)가 온 마음이 흉터로 가득한 가족에게 기적(miracle)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서로 다른 기적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결국에는 하나임을 표현하는 장치로 기적의 중의성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다만 터널에서 시작된 웃음이 기차의 기적 소리에 뒤따르는 눈물로 귀결되는 전개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매력과 별개로, 복고적이고 회귀적인 이 눈물이 다소 때늦은 도착처럼 느껴질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기적>의 플롯을 지탱하는 핵심 감정선은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누나 보경을 향한 준경의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아빠인 태윤의 회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중 가족 이야기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거나 동생들을 돌보기로 결심한 보경으로 대표되는 여성들에 대한 헌사라고 볼 여지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류의 이야기가 이미 숱하게 소비되었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86~8년에서 30여 년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영화가 보편적인 감성과 익숙함 사이의 경계에서 줄을 타는 듯이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금 더 담백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자연스레 남는다. 


또한 보경으로 대표되는 여성들에 대한 헌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보경과 같은 캐릭터를 반복하는 데서 그치기 때문이다. 당장 라희만 하더라도 그녀는 스스로를 준경의 뮤즈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예술의 원천 그 자체이자 예술가에게 영감을 심어주는 능동적 여신이었던 뮤즈의 본래 의미와 달리 그녀의 역할은 그저 준경을 뒷바라지하고 기다리는 선에서 제한된다. 라희라는 캐릭터 자체는 적극적인데, 정작 그 캐릭터가 활동할 수 있는 판을 못 깔아주기에 새로운 그림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판타지라는 고립된 배경에서 안전하게 추억을 되살리는 것에 그친 결과 영화의 로맨스는 준경과 라희가 반딧불이를 만나는 장면의 연출처럼 판에 박은 듯 몰개성적이다. 



다행히도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고, 또 다르게 보면 부정적인 <기적>의 특이점들은 배우들의 역량 아래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이성민이 선보이는 가슴 절절한 부성애 연기는 명불허전이고, 박정민 역시 과거의 아픔부터 현재의 망설임과 고뇌에 이르는 복합적인 감정선을 유려하게 표현해내면서 극을 장악한다. 임윤아 역시 <엑시트>나 <공조>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캐릭터를 맡아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이수경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중반부의 반전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감동이 반 이상 줄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큰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안정적인 앙상블 덕분에라도 <기적>이라는 기차는 최소한의 목표로 삼았던 간이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A(Acceptable, 무난함)

동화 속 눈물과 감동에 배우들의 앙상블이 만나면 무방비로 설득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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