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4년, 농구화 시장에서 업계 꼴찌를 전전하는 나이키. 나이키의 농구 선수 스카우트 담당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는 새 농구화 모델을 살펴보던 중 유망주 마이클 조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스타플레이어보다 조던이 더 위대한 선수가 될 거라고 확신한 소니. 그는 CEO '필'(벤 애플랙)에게 가용한 모든 금액을 투입해 조던을 붙잡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소니는 필의 승인을 얻어냈지만, 이미 업계 1, 2위를 다투는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그와의 계약을 노리는 상황. 소니는 상사 및 동료 '하워드'(크리스 터커), '롭'(제이슨 베이트먼), '피터'(매튜 무어)와 머리를 맞대고 조던을 설득할 전략을 짜기 시작한다.
조던 영화에 조던이 없다?
할리우드 대표 절친 스타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이 감독과 주연으로 합을 맞춘 영화 <에어>. 나이키 '에어 조던' 브랜드의 탄생 비화를 그려냈다. 1984년, 나이키는 농구 유망주 마이클 조던을 내세워 새 농구화 에어 조던 마케팅을 펼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이키는 컨버스와 아디다스를 제치고 농구화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한 지금도 에어 조던 시리즈는 계속해서 제작 중이다. 농구 이외의 스포츠 영역에도 진출했다. 2018년부터는 프랑스 축구 클럽 파리 생제르맹 FC 스폰서로 나섰다.
그런데 <에어>는 이상하다. 마이클 조던 영화인데 조던이 없다. 경기 분석 영상만 빼면 그는 항상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는 순간은 없다. 대신 <에어>는 에어 조던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조명한다. 나이키 스카우트 소니는 조던의 잠재력을 가장 정확히 꿰뚫어 봤다. 나이키 창립자 필과 농구 부서 책임자 하워드는 선수 한 명에게 올인하자는 소니의 과격한 마케팅 전략을 승인했다. 소니의 직속 상사 롭과 나이키 신발 디자이너 피터 무어는 빨간색과 흰색을 조합한 혁신적인 첫 조던 에어 신발을 만들었다.
프레젠테이션, 에어(Air)의 진짜 의미
조던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영화 제목에 숨어 있다. 에어(Air)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일단 나이키와 조던이 합작한 브랜드명이다.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온다'는 포스터 문구처럼 농구화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은 작명이다. 나이키 운동화 밑장에서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는 영화 소재를 직관적으로 연상시킨다.
그런데 에어는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발표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에어>는 발표의 연속이다. 소니는 상사와 CEO를 설득해야 한다. 농구 선수 3명과 계약할 수 있는 돈 25만 달러를 전부 마이클 조던에게 투자하자고. 조던은 그럴 가치가 있는 선수라고. 그의 에어전트,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마이클 조던 본인도 설득해야 한다. 나이키만이 조던의 스타성을 터뜨려 줄 수 있다고. 그러려면 조던에게 투자해야 하는, 또 나이키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줘야 한다. 영화가 프레젠테이션의 연속인 이유다.
<에어>, 나이키의 프레젠테이션
영화는 마이클 조던을 위한 발표를 준비 과정으로 가득하다. 전반부가 발표 내용과 주제를 선정하는 작업이라면, 후반부는 발표 방식을 결정하는 단계다. 소니는 여러 계약 후보 중 조던에게 주목한다. 그의 플레이를 반복해 보면서 아직 아무도 깨닫지 못한 조던의 위대한 잠재력을 알아본다. 목표가 정해지자 소니와 나이키는 조던을 설득할 수단을 강구한다. 업계의 관행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에이전트 선에서 제안이 자꾸 끊기자 직접 조던의 집을 찾아가 '들로리스'(비올라 데이비스)를 만난다. NBA가 규정한 농구화 배색 조항도 어긴다. 강렬한 레드로 가득한 농구화를 제작한다.
경쟁사의 약점을 흘려 차별화도 시도한다. 컨버스는 계약을 맺은 스타가 워낙 많아 조던을 전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아디다스는 가족 간의 경영권 분쟁 때문에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반면에 나이키는 조던에게 올인했다며 진심을 전한다.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조던은 단순한 농구 선수 이상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나이키 역시 평범한 스포츠 의류 회사 그 이상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생일 파티나 가족 행사는 언강생심이다. 이틀 안에 조던을 사로잡을 농구화 디자인을 개발해야 하니 밤샘 작업은 기본이다. 하지만 이들의 끈기 덕분에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에는 호소력이 깃든다. 물론 실제 사건과 다른 내용도 적지는 않다. 소니와 동료들에게 주목한 각색 덕분에 실화는 비로소 영화가 된다. <에어>에 설득 대상일 뿐인 조던의 자리가 없는 이유다.
관객을 사로잡는 말의 힘
접근 방식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도 '의견을 말한다'는 제목에 충실하다. 인물의 감정이나 욕망, 조던이라는 슈퍼 스타의 이미지까지 오직 말로써 전한다. <에어>는 대사가 많다. 주로 사무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당연하다. 그런데 과하지 않다. 현란한 티키타카가 유쾌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애런 소킨이 각본을 쓴 <소셜 네트워크>나 <스티브 잡스>를 보는 듯하다. 일례로 소니와 '데이비드 포크'(크리스 메시나)의 통화는 단순한 코미디처럼 들린다. 서로를 비난하고, 놀리고, 자극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다양한 비유가 덕분에 말의 재미도 살아있다. 그러나 통화가 이어질수록 이들의 대화는 극의 분기점처럼 들린다. 막다른 벽을 만날 때마다 소니는 포크와의 대화로부터 해결책을 찾아낸다.
독특한 화법도 예상 못한 울림을 선사한다. 극 중 등장인물은 다들 선지자 같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대사를 반복한다. 이는 자칫 터무니없거나 과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언'과 실제 자료 화면이 교차되는 연출이 반복되다 보니 확신에 이들의 만용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간다.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나이키와 조던의 미팅 장면이 대표적이다. 나이키가 준비한 영상을 돌발적으로 끊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소니. 그는 조던과 나이키가 쓸 영광과 비극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간중간 삽입된 자료화면 덕분에 그저 앉은 채 말을 이어갈 뿐인데도 상당히 감동적이다.
전반적인 영화 분위기도 수많은 대사에 힘을 더한다. <에어>는 1984년의 분위기를 살려내려고 노력한다. 단순히 그 시절 음악이나 필름 질감 등을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중심 세계 질서와 자본주의를 광고한 LA 올림픽처럼 화려했던 미국의 전성기를 보여주려 한다. 베트남 전쟁 패전과 끝나지 않은 냉전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유명한 슈퍼볼 광고를 활용한 오프닝을 통해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를 스크린 위로 불러온다. 덕분에 예언에 가까운 확신에는 설득력이 생긴다.
심심한 점근법과 매력이 부족한 소재
다만 <에어>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접근법이 담백하다. <에어>는 갈등이 두드러지는 영화가 아니다. 직원이 고생하는 모습은 있지만, 그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는 장면은 많지 않다. 에어 조던 개발은 큰 난항 없이 신속하게 완료된다. 조던과 나이키의 계약도 생각보다 무난하게 진행된다. 소니와 조던 가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도 없다. 실화에 없던 대립도 추가해 긴장감을 높이는 영화가 많은 걸 고려하면 <에어>는 이단아에 가깝다. 그 대가로 신선함과 심심함 사이에서 호불호가 명확할 수밖에 없다.
각색에 비해 소재의 매력도 부족하다. 물론 에어 조던이라는 브랜드는 유명하고 익숙하다. 그러나 나이키와 조던의 협업이 영화가 묘사하는 만큼 중요한 '세기의 딜'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스포츠 산업 관행에 큰 변화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큰 관심이 없다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의문을 피하려는 시도가 엿보이기는 한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접근법을 취해 의문을 가질 여지를 없애려 한다. 조던과 나이키가 함께 위대해질 거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게 그 일환이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순간, <에어>의 매력이 감소하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