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에서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 사진 한 장이 등장했다. 순간 시간이 되돌려진 듯했다. 더블데크 앞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던 그 시간들. 친구들에게 선물할 믹스테이프를 만들며 곡 순서를 고민하던 밤들. 워크맨을 귀에 꽂고 걸었던 그 모든 길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또한 방구석 한편에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도 눈에 들어온다. 미국 유학을 온 지 두 달 만에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나는 그와 관련된 물건을 깡그리 버렸다. 사진도, 편지도, 선물도 모조리. 그와 연결된 모든 흔적을 지우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집 창고 깊숙한 곳에는 그가 만들어준 믹스테이프가 남아있다.
왜 그것만은 버리지 못했을까?
한참을 곰곰 생각해 보니, 답이 보였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소리'라는 것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듯. 돌이켜보면 그랬다. 아름다운 소리, 감동적인 멜로디, 완벽한 하모니에는 한 번도 지루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같은 곡을 수백 번 들어도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곤 했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은 발견 하나가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자,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내가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나를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소리에 대한 예민함, 음악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그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이 다소 비약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운명이자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든든함이 솟아오른다. 마치 우주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떠밀어주는 것 같은 기분!
“그래, 나는 그냥 '기승전 음악'인 사람이야.”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내게 알려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든 결국 음악으로 귀결되는 나, 그것이 바로 내 정체성인 것을.
이제 그 오래된 믹스테이프를 왜 버리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의 잔재가 아니라, 내 안에 숨어있던 진짜 나를 일깨워준 소중한 단서였음으로.
PS. 음악이 운명인 사람은 언제든 돌아올 수밖에. 슈만은 안정적인 집안의 가장이 되길 바랐던 어머니를 뿌리치지 못해 1828년에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음악에의 열정을 잠재우지 못하고 2년 후에 첫 작품인 '아베크 변주곡'을 발표했다. 운명에 음악을 몰빵으로 받은 우주대스타 임윤찬 님 11살 때의 연주로 들어보자!
https://youtu.be/CcmvBbWhPMw?si=U_qL-UPgzVSvZy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