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협주곡

햇살 같은 그녀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by 뮤텔 빠삐짱


"대저 이른바 벗이란 것은 반드시 술잔을 머금고 은근히 대접하여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는 것만이 아니다…… 사귐에 있어 마음이 맞지 않으면 말을 하더라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고, 그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묵묵히 둘이 서로 말을 잊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 백영숙을 기린협으로 전송하는 서문, 박제가


정민 교수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났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과 인생을 풀이한 이 책과는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으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때 마주쳤던 한 문장에 너무나 감격해서 당장 주문해 읽어 내려갔다.

오늘 읽은 대목은 백영숙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절망하여 두메산골로 들어가자 친구들이 써준 전송문에 관한 이야기였다. 진정한 우정에 관해 말하는 박제가의 문장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며, 내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언제나 그녀의 얼굴은 해맑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예의 그 명랑만화 주인공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밝게 웃는다.

나는 힘들면 그녀에게 세상에 대한 불평을, 불만을 쏟아놓는다. 자잘한 주변 상황까지 가감 없이 털어놓고 하소연한다. 그녀는 옳다 그르다 평가하지 않으며 들어준다. 언제나 내 편만 드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라고 혼쭐을 낸 적도 있다.

그녀의 반응이 내가 기대하는 바와 다를 때도 많지만, 나는 그녀를 보면 마음속 이야기를 허물없이 꺼내게 된다. 때로는 그 얼굴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니, 보지 않아도 좋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내 말을 들어줄 그녀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한다.


나도 그녀에게 그런 친구일까?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는 자주 연락하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3,40대에는 육아와 일에 치여 반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했다. 얼굴을 보는 건 일 년에 한 번 뿐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일 년 만에 만나도 우리는 바로 어제 만난 양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로의 일상을 다 공유하지 못함에도 우리의 이야기는 끊임이 없다. 때때로 말하지 않고 각자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옆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박제가의 말처럼,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묵묵히 둘이 서로 말을 잊더라도 괜찮은" 그런 사이다.


그녀가 내 인생에 나타난 건 어쩌면 신의 선물이었을까. 나도 그녀의 선물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도움만 받던 내가 그녀를 처음 도울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녀가 학교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위한 오디션을 준비할 때, 그저 비루한 솜씨나마 그녀의 협주곡 반주를 맡아 함께 연습하던 때였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나도 내 친구를 위해 쓰임이 있어 행복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연습실에서 쉴 새 없이 먹고 떠들고 연습하던 파릇한 20대 초반의 우리. 청년 베토벤의 기대와 희망이 잘 드러난 음악이다 보니, 당시 우리가 표현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경쾌한 1악장, 우아한 2악장, 생기 넘치고 열정적인 3악장. 언제나 환한 미소의 그녀를 닮은 곡이었다.


오늘 밤,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다. 그 시절의 우리와, 지금의 우정을 떠올리며.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독주 악기를 위한 곡이기에, 무대가 아닌 연습을 위해서는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편곡해서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 역할을 대신한다.


https://youtu.be/hImRyXoJwRU?si=LHb_dXsgoi-sIDj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