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팡파레를 기다리며
영감의 팡파레는 오늘도 터지지 않았다.
샴페인을 터뜨리듯, 경쾌하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영감은 내 맘처럼 오지 않았다.
오라고 해서 오는 손님이라면, 진작에 왔을 것이다.
영감은 기분 좋은 손님이기보다는,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하는 주객전도의 존재다.
'영감의 팡파레'라는 표현도 겨우 떠올렸다.
나는 자주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은 빠르지만, 생각하는 만큼 글을 출력하지 못한다.
팡파레가 터지건, 터지지 않건—그래도 써야 작가다.
그래서 1.5일 정도 글을 일부러 멈췄다.
혹시 루틴한 일상이 영감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새로운 장소를 찾으면 팡파레가 울릴까 싶어 교회 수련회도 다녀왔다.
물론 주된 목적은 글이 아니었지만, 어쩌면 작은 기대는 있었다.
결과는… 팡파레는 여전히 잠잠했다.
오히려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팡파레를 의식할수록, 팡파레는 터지지 않는다는 것.
영감을 향한 집착은 오히려 영감을 막는다.
생각의 낭비는 글을 흐리게 하고,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만든다.
잡글이라도 남으면 다행이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날, 작가는 직무유기다.
천재들은 매일 팡파레를 울릴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에게도 졸작은 있었고, 단지 대표작만이 유명할 뿐이다.
천재도 결국 사람이다. 다만 빈도가 조금 더 잦았을 뿐이다.
나는 천재를 이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경쟁과 억압의 세계에 글을 담고 싶지도 않다.
오늘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글을 써야 한다.
시한부란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그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감의 팡파레를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다.
힘듦과 고뇌 속에서도, 작가도 무지개를 봐야 하니까.
물론 팡파레가 매일 울리면 피곤할지도 모른다.
기쁨도 반복되면, 그 소중함을 잊게 되니까.
인간은 있을 땐 모른다.
잃고 나서야, 얼마나 귀했는지 알게 된다.
영감은 보이지 않는다. 공기와 같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언제든 내 곁을 떠날 수도,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것.
결국, 의식하지 않고 꾸준히 쓰는 것이 답이다.
그렇다면 팡파레를 위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 게으름을 버려야 한다.
적절한 휴식은 필요하지만, 작가는 성실해야 한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빚는 운동이다.
책을 쓴다는 건 나 자신을, 편집자를, 독자를 모두 설득하는 일이기도 하다.
둘째, 완벽주의를 내려놔야 한다.
완벽한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은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글은 유토피아다. 방향일 수는 있어도, 도달점은 아니다.
셋째, 경험이 부족하면 영감도 희박하다.
책을, 사람을, 감정을 경험해야 한다.
영감의 팡파레는 경험 위에 울린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확률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사는 것’이다.
긴 글은 아직도 어렵다.
나는 숙련되지 않은 제빵사처럼, 글 반죽이 매번 엉성하다.
‘작가’라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두려움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톰 크루즈가 말했듯,
결국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방해물은 내 안의 ‘겁’일지도 모른다.
이 글이 영감의 팡파레를 울린 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울릴 것을 믿기에,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그게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