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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빛 Feb 11. 2022

7. 해피가 엔딩이 아니길

이사를 마치고 친정으로 돌아와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끝났다는 생각에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출국 예정일까지는 시간이 있었지만 사실 그 예정일은 그야말로 희망 예정일이어서, 출국 허가가 1~2주 정도 늦어질 것을 감안하고 잡아놓은 것이기에 학교 등록일까지는 약 3주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내 검사 결과와 출국 허가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먼저 검사 결과는 다행히도 괜찮았다. 결과적으로 암은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6개월마다 추적 검사를 하자고 하셨다. 큰 산을 하나 넘고 나자 가족들의 안부 연락이 쏟아졌다. 집안의 암 병력을 다들 알고 있었기에 다들 걱정은 되는데 섣불리 연락을 못했다며 너무 다행이라고 걱정과 축하의 말들을 해주었다. 나도 괜찮고 아이 뼈도 잘 붙고 있고,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친정에서 엄마가 해 주는 삼시 세 끼를 먹으며 빈둥대는 것은 즐거웠다. 부모님도 이제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와 아이를 극진히 대접해 주셨고, 혹시라도 코로나에 걸려 출국에 지장이 될까 외부활동도 삼가셨다. 조금 죄송하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은 모른 척하는 마음으로 하염없이 집에서 빈둥댔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헛헛했다. 나는 도대체, 왜, 항상 내가 원해서 결정한 일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믿고 일단 닥친 일들을 열심히 해치우며 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오롯이 선택한 일들이 별로 없는 인생이 이제는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도, 그렇다고 결사반대를 하며 죽어도 싫다고 내 의견을 관철시키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여전히 나는 중요한 마음속의 질문을 또 피하고 있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의 화는 남편에게로 이어졌다. 모든 일들의 시작인 남편은 그냥 그대로 있는데 나만 동동거리며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건지. 게다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줬으면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관심이라도 갖던지. 제대로 연락도 되지 않고 내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도 잘 챙기지 않는 남편에게 화를 쏟아냈다. 남편이 바쁘다고,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고 하는 말도 다 핑계로 들렸다.(나중에 그게 핑계는 아니었겠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남편은 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그 역시 순간을 모면하고 싶은, 더 오래 싸움을 이어가기 싫은 사과를 위한 사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입국 허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출국 예정일에서 일주일이 지나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쉽게 승인이 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일주일 안에 입국을 하지 못하면 아이 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지 못할 판이었다. 다급해진 마음에 나는 부랴부랴 지금이라도 등록할 수 있는 국제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남편은 하노이에 있는 지인들을 수소문해 출입국 상황을 알아보았다. 결국 급행비(라고 쓰고 뒷돈이라고 읽는다)를 지불하고서야 입국 승인이 날 것이라는(난 것이 아니라) 답을 얻어냈다. 원래 하노이성에서 입국 승인이 나면 하노이 출입국 허가서에서 입국 허가서를 발급하고 그걸로 입국 대행업체에서 비행기표를 예약하는데, 업체에서는 입국 승인이 날 것을 전제로 사정사정해서 비행기표를 예약했다며 출국 준비를 하라고 출국일 3일 전에 연락을 주었다. 연락을 받았던 그날 저녁의 시원하면서도 섭섭했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 날 아이의 초등학교 면제 신청을 하고, 아이 다리를 통깁스에서 반깁스(깁스를 뺐다 꼈다 할 수 있게끔 한 것)로 바꾸었다. 2주간의 자가격리를 마치면 거의 두 달 간 깁스를 한 것이니 거의 회복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각종 사무처리가 끝났고, 아이 다리도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혹시라도 마지막 발목이 잡힐까 덜덜떨며 PCR 검사를 했고, 다행이 음성판정을 받고 영문으로 된 음성확인서도 발급받았다. 이제 정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마지막 밤에는 2주간의 자가격리 기간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담은 4개의 트렁크와 백팩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했다. 여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말 떠나려니까 기분이 이상하고, 잔뜩 긴장이 되었다.


올 듯 오지 않던 출국 날이 밝았다. 집에서 떠날 때까지 연락이 없던 입국 허가서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발급되었고, 결국 공항에서 출력했다. 짐을 부치고 티켓팅까지 완료하고 난 뒤, 공항에 같이 와주신 부모님과는 쿨하게 작별하고 헤어졌다.(하지만 나만 쿨했던 듯. 베트남 입국 후 아빠는 술을 드시고 취한 목소리로 남편한테 가니까 좋냐! 하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셨다는......) 부모님이 가시고 나자 휠체어에 앉은 아이와 나만 공항에 남았다. 이젠 진짜 우리 둘 뿐이었다. 휠체어를 탄 아이를 밀고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가면서 기도했다. '해피엔딩'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 기도가 잘못 전달된 걸까.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행복, 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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