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샐빛 Feb 11. 2022

9. 크리스마스에는 행복이

호텔에서의 격리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하는 일도 없이 정해진 시간에 주어지는 삼시 세 끼를 꼬박꼬박 먹어가면서. 내가 묵은 호텔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한식 위주의 먹을 만한 식단이 제공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한식은 아니어서 아이는 중간중간 먹기 힘들어하기도 했다. 보통 자가 격리할 동안 사용할 물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먹을거리인데, 나는 사실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었다. 일단 한식이 제공되는 호텔이고 남편이 중간에 물품을 넣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품을 넣어주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다들 그렇게 한다며 남편은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카레, 라면, 김치, 과자 등의 물품을 한 박스 넣어주었다. 고작 일주일 있을 건데, 다 짐이 될터였지만 나중에 집으로 가져가면 되니까 우리를 생각한 남편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밥 먹기 싫어할 때마다 틈틈이 먹였다.


코로나 검사는 도착 다음날과 퇴소 전날 두 번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출국 전 PCR 검사를 받을 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해내길래 별 걱정을 안 했는데, 호텔에서 검사를 해야 하는 날이 오자 갑자기 아이가 거부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난감해서 달래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고민하는 데 병원에서 나온 직원이 아이들은 입에만 한다며 안심을 시켰다. 입으로 하는 것은 아프지 않으니 아이는 다행히 검사에 응했고 그렇게 두 번의 검사 결과에서 음성이 나왔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에 하나 양성이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토요일 아침에 퇴소를 해야 하는데, 퇴소 전날 남편이 또 어이없는 소식을 전했다. 회사에서 나와 아이에 관련된 서류를 업체에 전달해주면, 업체에서 행정기관에 제출해야 하는 게 있는데 그걸 회사와 업체 모두 제때에 하지 않아서 내일 정상대로 퇴소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오늘 내에 일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토, 일 주말을 보내고 다음 월요일에나 퇴소할 수도 있다는데 무슨 일처리를 그렇게 하는지 화가 났지만, 어쨌든 계속 알아보겠다는 말에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확실한 답은 오지 않았다. 토요일에 퇴소는 물 건너갔구나 싶었지만 혹시 모르니 짐을 다 정리해 두고 잠을 잤는데, 토요일 아침 8시에 갑자기 안내 데스크에서 퇴소를 하라는 전화가 왔다. 정말 퇴소해도 되는 거냐고 물으니 어제 연락을 못 받았냐며 무조건 나오라고 했다. 남편에게 연락하니 일단 나오라며, 업체와는 계속 연락해 보겠다고 해서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얼른 짐을 챙겨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로 내려오니 보건소 공무원이 출장 나와 있었다. 그는 퇴소하는 사람들의 자가격리 주소를 확인한 후 돈을 받았다. 예전에는 보건소 공무원들이 집까지 따라와서 확인하는 비용으로 돈을 냈다는데 그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지금은 따라가는 공무원도 없는데 돈을 왜 내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내래서 냈다. 그렇게 우리는 절반의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남편이 호텔 밖에 와 있다며 밖으로 나오라고 전화했다. 9개월 만의 상봉이었다. 아이는 아빠!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목발을 짚고 어기적거렸고, 아이의 다리를 직접 처음으로 본 남편은 고생했다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울고불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눈물의 상봉 따위는 없이, '안녕?'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매일 영상통화를 해서 그런지 보고 싶었거나 소식이 궁금했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렇게 건조하게 우리 가족의 상봉은 완료되었다.


남편은 우리가 입성하기 전에 미리 하노이의 아파트를 임대해 놓았는데, 짐이 하나도 없는 데다 자가격리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아파트의 다른 층에 한 달짜리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나는 자가격리를 남편이 세를 얻은 한 달짜리 방에서 하겠다고 했다. 일주일 동안 이삿짐이나 좀 정리해 놓으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남편은 순순히 앞으로 우리가 살 집으로 올라갔고, 나와 아이는 다시 일주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코로나 시국이 오래 지속되고, 특히 고강도 봉쇄 정책을 폈던 베트남은 이제 점점 한계가 오는 모양이었다.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의 자가격리를 전혀 감시하지 않았다. 원래는 격리 해제 전에 담당자가 와서 확인을 하거나, 지역 보건소에서 마지막 PCR 검사를 받아야 했었다는데 내가 입국한 이후로는 그런 조치들이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일주일 후 그냥 나돌아 다녀도 되는 건지,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공안에 잡혀가는 건 아닌지 무서웠지만 같은 날 입국한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니 자동 해제하면 되는 것 같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렇게 자가격리가 끝난 날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해외에서 맞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우리 가족은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근처 빵집에서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사 나눠 먹은 것이 전부인 눈도 없고 선물도 없고 산타할아버지도 못 만난 이상한 크리스마스였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된, 조촐한 크리스마스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8. 하노이 하늘 아래 도착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