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점점 좋아진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듬성듬성 비치더니 결국 구름을 밀어냈다. 야호!
이 순간을 놓칠세라 날씨가 아주 반짝일 때 가고 싶었던 포석정으로 얼른 달려간다.
매표를 하고 들어서는 길.
좀 당황스럽다. '이 황량함은 무엇?'
성큼성큼 딛던 걸음의 보폭이 절로 좁아진다.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걸으니 금세 포석정이 보인다.
그리고 마주한 포석정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내 안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포석정이 너무 화려했던 탓일까? 별궁의 건물은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있다는 걸 알고 갔음에도 뭔가 좀 아쉽다.
휑하고 또 휑하다.
하지만 휑하다고 불평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내 안에 피어올랐던 포석정을 조용히 소환해 본다.
포석정에 찰랑찰랑 물이 흐르고 왕과 참석자들이 물길을 따라 앉았다. 술잔이 내 앞에서 멈추면 시를 지어야 하니 누군가는 마음이 급하고 또 누군가는 시는 아랑곳없고 마셔야 하는 벌주가 더 반갑다.
술과 웃음, 감탄과 농이 뒤섞인 시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퍼져나간다.
물이 흘렀을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시를 읊었다가 벌주를 마셨다가 혼자 벌이는 연회가 떠들썩하다.
즐거운 게 티가 났을까. 나 혼자 여는 연회를 시샘하는 서릿발 같은 고함이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경애왕이여, 자결하라!"
바닥에서 주운 마른 나뭇가지를 내 앞에 툭 던지며 큰 아이가 외친다.
"나는 후백제의 견훤이다. 스스로 자결하라."
아, 그러니까 이건 뜬금없이 시작하는 역할놀이다. 아이들이 주연을 하고 내게 늘 조연을 맡기는.
오늘 내 역할은 경애왕인가 보다. 포석정에 왔다고 경애왕을 소환해 낸 아이들이 기특해 얼른 소임을 다해 본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푹 찌르는 시늉 한번 하고 서비스로 비명도 찰지게 넣어준다. "으윽!"
열연에 만족한 견훤(첫째)이 물러가고 경애왕을 구하러 달려오던 왕건(둘째)과 대결을 펼친다. 조연인 나는 잊은 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소리가 치열하다.
황량했던 포석정이 소리를 입었다.
내 안에 연회소리 드높고 밖으로 전투가 치열하니 천년도 전의 어느 순간이 잠시 잠깐 되살아 난다.
포석정 지킴이처럼 서 있는 저 아름드리나무는 경애왕과 견훤을 기억하듯이 오늘의 이 작은 소란도 기억하려나.
경주라는 이상한 나라의 다섯 번째 걸음에서, 잊고 있던 역사의 한 순간을 소환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