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도 버려지지 않는다

by 글희

저 책은 언제부터 저 자리였을까. 기억나지 않는 책들이 빼곡하다. 책들은 햇볕만이 닿아 누렇게 바랜 채 몇 년이고 그 자리에 서로를 걸터 서있었다. 정리하자. 미루지말고. 한 해를 마무르기엔 방 정리가 제격이었다. 곧 이사를 가기에 이번 결심은 한 해 뿐 아니라 집을 매듭짓는 일이기도 했다. 책이야 제목만 보고도 버릴지 말지 판단이 쉬웠지만 오래 묵은 노트야말로 제대로 골라내기 위해선 그 속을 봐야만 했다.

처음 빼다 본 노트는 연습장이었다. 초장에 수학 공식과 문제 풀이가 빼곡했다. 그러다가 삼분의 일쯤 넘기니 빈 종이다. 노트의 빈 부분이 마치 내 수학쟁이 이야기의 결말 같다. 대학 4년 내내 수학을 했지만 단 하루의 결심으로 수학 공부를 접고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아 맞아. 나 수학도 했었지. 아직 여백인 종이가 많아 앞부분만 찢어내고 다시 쓸까 고민했지만 이 노트의 여백이 다시 쓰일 일은 없단 걸 알았다. 연습장은 버려질 책 무더기에 얹어졌다. 곧 이어 상담 임용 공부하던 때 빽빽하게 채워둔 정리 노트가 들어왔다. 심리학 지식이 깔끔하고 반듯하게 적혀있다. 이 내용이 과연 내 머리속에 다 있을까? 남은 종이도 없이 모두 채운 노트인데도 이 노트는 버리고싶지 않다. 간직할래. 치열하게 공부했던 나를 버리고 싶지 않다.

그다음으로 발견한 건 익숙한 줄노트였다. 보자마자 어떤 노트인지 알았다. 일기장이었으니. 놀랐다. 일기장이 책장에 아무렇지 않게 꽂혀있다니! 추억 상자 속에 숨어있어야 했다. 누군가가 들어와 호기심으로라도 보면 안 될 내용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부끄럽고 정돈되지 않은 혼란과 창피가 모두 담겨 있었다. 다만 햇볕에 바랜 시간만큼, 혼란과 창피의 내용은 잊고 그저 그 일기는 숨겨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일기장의 끄트머리는 커피를 흘렸었는지, 갈색으로 물들고 찌그러진 채 바짝 말라있었다. 커피를 흘린 기억도 이미 커피와 함께 말라버렸다.

종이들끼리 바삭거리며 붙어있던걸 떼어내고 손이 가는 대로 펼쳤다. 다행히 날짜는 적혀있다. 무려 5년 전이었다. 글씨체가 예뻤다. 지금보다 아주 살짝 더 크고 동글거리는데, 전체적으로 통일감 있었다. 안정적이게 적힌 글자들은 종이에 가로누워 그 당시 뒤죽박죽이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5년은 된 연인과의 관계가 문제였다. 권태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함께 느낄 권태로움에 몸부림치지 않는 상대를 탓했다. 나는 이 권태로움이 위기로 느껴지는데, 상대는 권태로움에도 무심해 보였다. 일기장 속 나는 무심함에 대한 불만을, 사실 사랑이 식은 건 내 쪽인데 이를 인정하지 못해 상대에게 투사하는 건 아닌지, 고심하고 있었다.

아니, 난 사랑이 식지 않았다. 일기장 속에서마저도 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상대의 사랑이 꺼져감을 외면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지지하기 위해, 상대가 아닌 내 마음이 지지하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어렴풋하게 그 일기를 썼던 때가 기억난다. 마스크를 쓰고는 칸막이 책상 앞에 앉아 모든 것에 답답해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공부도 연애도 세상도 나를 가두는 테두리가 못 견디게 떨치고 싶었다. 하지만 테두리는 무정하게 존재했고 나 혼자 절규함에 또 한 번 화가 났다. 그 답답함은 상대에게 향했으나 상대의 희미한 사랑에게 향하진 못하고, 난 일기장을 난도질하며 죄 없는 내 사랑을 공격했다.

일기장 속 나는 모르는 결말을 지금 난 알고 있다. 무심하다고 느꼈던 사랑은 꺼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2년 반 동안 몇 번씩이나 나를 달구고 일상을 데웠다. 일기장을 숨기려던 이유는 그와 나눴던 애정 표현과 가장 사적인 시간이 적나라하게 쓰여서였다. 게다가 일기장은 나약함을 외면하려 스스로를 속이는 모습까지 고발했으니, 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며 애정을 기록하고 사랑을 다시 읽고 관계를 곱씹던 내 시간을 다시 봤다. 몇몇 민망한 단어와 낯간지러운 문장은 있었지만 창피할 마음은 없었다.

마음을 공글려야 했던 건 일기보다 훨씬 뒤였다. 사랑은 가로샜다. 사람은 갈라섰다. 옛이야기는 지금의 나와 연결되지 못한 채 가로섰다. 두 사람의 삶을 내 한 사람의 삶인 양 써버린 일기는 꼭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같다. 오히려 그 사람이 지금 나에게 이어진 연결부는 현재의 일기장에 있다. 줄노트에 죽죽 일기를 써 내려갔던 형식이 익숙하고 낯설다. 서로가 따뜻할 때, 그 사람은 나에게 일기를 배웠다. 그 사람의 일기가 나와 달랐던 점은 줄노트 한 페이지를 꽉 채워 써 내려가지 않고, 무지 위클리 플래너에 간략하게 그날의 기억과 소감을 적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새로운 일기장을 배웠다. 서로가 식어갈 때, 나 또한 위클리 플래너에 하루하루 일기를 적었다. 위클리의 하루 칸은 크지 않아서 부담이 적었다. 덕분에 빈칸으로 남기는 한이 있어도 일기를 멈추지 않고 꾸준히 쓸 수 있었다. 새로운 방식은 제법 마음에 들어 지금껏 유지해왔다. 이 방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잊은 채 내가 발견한 방법인 양 써오다가, 옛 일기장을 보고서야 원래부터 내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의 성질은 이미 내 일부가 되었다. 데이트란 걸 처음 해보는 스무 살 내 손을 잡고 그 사람은 서점을 자주 데려갔다. 서점은 내게 필요한 책을 사고 바로 나오는 장소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책을 고르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책 취향을 찾는 법과 서점에서 머무는 법을 배웠다. 주말이면 우리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떠들고 노닐고 다시 책을 읽었다. 재밌는 책은 서로 빌려주며 나눠 읽었다. 그에게서 빌린 책 몇 권이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내 책장에 꽂혀있다. 사람은 가버렸지만, 책은 남았고, 주말은 항상 찾아왔다. 혼자 보내는 주말에도 지금껏 그랬듯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쉼을 찾는다. 내 것인 줄로만 알았던 취향과 쉼을 보내는 방식도 그 사람이 준 것이다. 고맙고 또 고마운 사람. 일기장에만 남아 있는 그리운 사람.

책장 한 켠에서 묵다가 발견된 추억은 글의 내용보다도 글 자체에 있었다. 글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단절되어 답답함과 절절함이 내 것이 아닌 듯하지만, 글을 써오던 습관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던 일상은 아직까지 남아 내 삶에 새로운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일기장을 덮었다. 버리려고 쌓아둔 책 무더기 대신 추억 상자에 담겼다. 그 상자에는 아직 내가 미처 열어볼 용기가 없는 사물이 가득하다. 주고받았던 편지와 풋풋하고 텁텁한 사진, 쪽지, 그보다도 더 전에 적힌 일기.

잊으면 사라지겠지. 착각을 했던 듯 하다. 정리하기 귀찮은 물건을 책장에 꽂아두곤, 눈길을 주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지웠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서 존재가 사라질리 없었다. 잊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다. 곱씹을 추억은 일상에 묻어 과거의 흔적이고 추억인지도 모르게 숨어 있다가 우연히 튀어나와 발견되곤 한다. 먼지 덮인 일상을 총채질하고 하나하나 공글릴 때, 닿지 않아 그리운 시간은 다시금 연결되어 눈앞에 펼쳐지곤 이내 다시 일상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시간은 물건이 아닌 삶에 아로새겨진다. 추억은 시선을 거두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삶에 머금어져 함께 바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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