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가을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걸 좋아한다. 빗방울이 땅에 스며들며 마른 흙을 적시는 것처럼, 빗소리는 속에 스며들어 마른 마음을 적시고 두드린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겠지. 하지만 좋아하는 비들은 사람마다 다를 거야. 빗소리들이 제각기인걸.
빗소리는 일상의 소리라 대개 무시되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소리가 크다. 빗소리는 작은 소음들을 쉽게 가리고, 내 속에 숨겨두었던 목소리들을 묻는다. 묻는다. 입만 뻐끔거리며 대답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는다. 빗소리는 마음의 무언가 들을 건드리지만, 그 마음이 문장으로 표현될 만큼 선명하진 않다.
부슬비
운치 있게 즐기는 정도의 비는 수직으로 내린다. 나뭇잎에서 한번 걸터앉고 흘러내려 바닥에 토독-토독 토도도도독. 소리 사이사이에 여백이 있다. 리듬감 있게 떨어지는 빗소리는 경쾌하다. 하루하루는 보통 아무 감각 없이 지나간다. 매일 같은 풍경, 내음, 소음 속에서 익숙해진 공허함과 무감각함이 빗소리에 꺼내어진다. 그렇게 꺼내어진 무언의 감정을 다시 빗소리에 묻어버린다. 아 맞다 우리 동네, 이런 모습이었지! 비 내음에서 생기를 느낀다.
안개비
안개처럼 흩뿌려지는 비는 소리 없이 촉각으로 내린다. 오는 것도 안 오는 것도 아닌 것이 애매하다. 분명 내리고 있는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피부에 닿아 알아차릴 뿐이다. 평소 내 마음을 꺼내어 본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알아차려지는 무언간 있지만 뚜렷하진 않다. 무(無)에 가까운 이 감정은 부정 쪽에 가까울 거다. 그러니 숨기고 억눌러서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 거다. 안개비는 그런 내 상태와 닮아서, 숨기려고 한 애매함까지 닮아버렸다. 그런 내 상태를 눈앞에 꺼내어 보여준다. 그래서 불편하다. 차라리 세차게 쏟아지지. 그러곤 얼른 맑게 개어버리지. 꺼이꺼이 울어내곤 가벼워지게.
장대비
올해 여름은 유독 장대비가 잦았다. 소리 사이 여백이 없어 쏴-하는 연속적인 소리만 이어지는데, 안개비와 다르게 존재감이 장장하다. 전력질주 해대는 아이들처럼 위에서 곱게 떨어지는 일이 없고, 바람을 타고 수평에 가깝게 질러진다. 세찬 빗소리엔 바람 소리, 비가 비끼리 부딪히는 소리, 나뭇잎을 뚫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있다. 이런 빗 속에선 아무리 우산으로 막아봤자 소용없다. 지붕 밑에 있어도 땅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빗방울에 바짓자락까지 젖기 일쑤다. 위협적으로 쏟아지는 비를 실내에서 구경하고 있자면 보송보송하게 하나 젖지 않은 몸에서 안전하다는 감각이 되새겨진다. 나는 안전해. 아늑해. 장대비는 아늑함을 불러온다.
비가 마음을 건드는 까닭은, 언젠가 그치기 때문이다. 항상 같은 소음만 존재하던 공간에 새로운 소리를 심어주었다가, 그 소리가 새로운 일상이 되기 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미 당연하게 함께해 온 나의 감정이 비에 젖어 잠시 선명해질 수 있는 것도 그 까닭이다. 내가 선명하게 꺼내어보는 내 마음이 비록 불투명하고 애매한 안개 같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런 마음이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마른 마음이 비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