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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도밍고에서 벨로라도, 있는 그대로 '답게'

길 자체로 걷다

by 푸시퀸 이지

세상에는 보기엔 좋지만 내 것이기엔 부담스러운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알베르게 침대다. 어릴 적 로망이었던 이층 벙커 침대는 보기엔 예쁘지만 소유가 되는 순간 불편함이 따른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는 일층 침대에서 호사를 누렸다. 새벽에 뒤척이고 화장실 두세 번은 여전하지만 이층 계단을 양팔과 양 다리로 힘주어 오르내리느냐 마느냐는 다시 잠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잠들기 직전에 운동하면 교감신경계가 활발해 숙면을 방해하듯이 그 사실이 뇌에 박힌 이상, '그럴 것'이라는 신경증까지 보태 뜬눈의 시간은 길어졌다. 순례길 9일간의 빅데이터 분석 결과다.


작년 이맘때 척추 협착이 심해지고 석회화에 디스크 탈출, 고관절증(연골이 닳아 뼈가 드러난 상태)까지 생겨 두 다리로 온전히 800km를 걷지 못할까봐 두려움이 있었다. 왼쪽 갈비뼈부터 꼬리뼈, 발바닥까지 몸 전체가 극심한 통증으로 괴로웠던 그때, 걸어도 누워도 해소되지 않아 다리를 자르고 싶던 10년 전 통증이 떠오르면서 분노와 우울이 찾아왔었다. 여기 오니 이제는 작년 통증을 불러와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되어 가늘고 길게 가는 길을 택했다. 다리를 좀 편하게 해 주자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에 출발해서 그런지 마음도 따라갔다. 위로의 벗, 태양이 나타났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목적도 오기 전에는 800km 완주가 파울로 코엘료가 찾아 나선 '검'과도 같았다. 그래서 큰 배낭을 다음 마을 알베르게까지 택배로 부쳤다. 자신의 가치와 사정에 따라 '순례자' 정의를 내리겠지만, 크고 무거운 '가방의 부재'는 십자가를 피해 도망가는 심정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모두 고생하는 가운데 혼자 떠나온 것도 사치인데, 무거운 짐을 메지 않았다는 마음이 십자가처럼 짓눌렀다. 순례자는 '배낭까지 착용해야 한다'는 개념이 어디 적힌 것도 아닌데. 내가 정한 강박을 내려놓으려고 이 곳까지 와 놓고는 또 시작이다. (이미 지난) 가방 내려놓기부터 내려놓기!


오늘은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벨로라도(BELORADO)까지 23.9KM라 거리도 괜찮았다. 가방을 다시 매기로 획을 그은 것처럼 벨로라도는 '리오하' 주와 '카스티야 이 레온 주'의 경계였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내게로 오라, 는 벨로라도는 메세타 고원에서 가장 큰 주이기도 했다. 상체 근력이 좋고 하체가 문제인 몸이지만, 그래도 매뉴얼대로 배낭을 멨다. 부담을 어느 정도 안고 사는 것이 인생 습관이 된 건지 오히려 그게 편하다. 골반으로 무게를 떠받히도록 허리끈을 조이고, 어깨에 부담이 없도록 가슴 끈을 조였다. 가방은 뒤통수 바람막이마냥 위로 불쑥 올라왔다.





어제 같으면 '약간'의 경사로 느낄 법한 곳이 '급경사'로 느껴졌다. 가방이 뒷목 바람까지 철저히 막은 상황에서 푸드 트럭처럼 생긴 바가 나타났다(그라뇽). 바도, 사람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줄이 길었고, 음식이 나오는 데도 오래 걸렸다. 배낭 무게보다 더 힘든 것은, 등에 다 큰 자식을 업은 것처럼 완전히 밀착해 목덜미부터 허리까지 땀에 흠뻑 젖은 거였다. 가방을 풀고 다시 매기도 귀찮았지만, 젖은 등에 가슴까지 타들어가 환기가 절실했다. 먹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 가방 무거울까 봐 간식을 대폭 줄였다. 사과도 어제로 졸업했다. 비스킷만 있는데 몸의 열기구가 될까봐 이 역시 멀리했다.





계속되는 야트막한 오르막 마을, 가정집 같은데 사람이 들락거렸다. 그 집에서 나온 이가 빵 맛집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빵집이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맛집 검색을 일체 하지 않는 나로서는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역 자 통로를 지나는데 이미 빵 굽는 냄새가 '나를 따르시오' 했다. 샤넬 향수보다도 감미로운 향기였다.


작은 배낭을 멜 땐 고어텍스 외투를 허리춤에 묶어서라도 먹을 것을 가방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는데, 얼마든지 담을 수 있는 큰 배낭에서는 쿠키 몇 개만 골라 봉지를 손에 들었다. 그것도 귀찮아 몇 발자국 안 가 아예 뱃속에 쓸어 담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가방이 사람을 만들었다. 지난번 <비아나>에서 내 쿠키로 1/N 했던 때와 달리 빵집을 함께 들어간 50, 60대 H, Y, M님은 각자의 몫으로 넘치도록 빵을 샀다.





빵집을 기점으로 전망대처럼 들판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곳에서 마을은 끝났다. 옆으로 빠진 계단을 내려오니 들판이 펼쳐졌다. 두 주의 경계인 레온 주를 알리는 큰 빨간 표지판도 보였다. 비닐장판을 타고 미끄러지고 싶은 능선을 볼 때마다 언젠가부터 마음을 졸이게 됐다. 어느 순간 이 풍경이 끊길까 봐, 순례길 잔고가 바닥날까봐, 아쉬운 두려움이 생겼다. 모래사장 같은 이 장면에 나는 기대고 있었다. 모래시계 속 모래가 매 순간 떨어지듯 했다. 모래시계 바늘 역시 집착이거늘. '까미노 천사'는 자연까지 아우르는 만물이었다.





해바라기 밭이 등장했다. 해바라기가 웃고 있었다. 미소를 그려 넣은 이는 평소 많이 웃는 사람일 거라는 믿음과 함께 내 입꼬리에 거울신경세포를 자극했다. 기차처럼 가지런히 쌓아 올린 볏짚은 내가 쌓아온 건 뭔지를 되물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것을 쌓겠노라 다짐하게 했다. 집은 저마다 꽃단장을 하고는 마중 나왔다. 또 다시 지나온 길에 비해 지금 이 길이 꽃길처럼 느껴졌다. 비록 지금 씻는 곳과 싸는 곳이 방 밖으로 나가 여럿이 사용하지만, 살 집이 없어 길에 나앉지는 않았으니까. 신혼집이라고 거처를 꾸렸지만 시댁 집이 되어 내 집이 증발한 건 아니니까.




여러 종류의 꽃과 여러 면의 밭을 지나니 그제야 모든 길이 꽃길이었음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을 누리는 내가 있기까지 모든 게 도움닫기였다. 길 하나하나 번지수마다 '의미'가 달렸었다. 마을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철제 순례자 동상이 나왔다. 찻길 건널 때 조심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마을, 들판, 도로를 반복해서 그런지 배가 또 출출했다. 다시는 바가 없을 것 같아 6km를 남겨 놓고 바에 또 들렀다(비야마요르 델 리오). 화장실도 들렀다는 뜻이고, 밖에 나와 있는 의자에 큰 가방과 나란히 앉아 바람도 맞았다는 뜻이다.





벨로라도 마을에 도착했다. 벨로라도는 절벽 밑에 만들어진 도시라고 한다. 그래 그런지 벽화가 예술이었다. 잘 도착한 기념, 한숨 돌리는 기념으로 벽면 앞에 섰다. 알베르게(CUATRO CANTONES ALBERGUE)도 물감으로 그려 넣은 듯했다. 내가 자는 방은 빼고. 내 침대는 난민촌이 따로 없었다. 분당 집도 내가 자는 곳은 코딱지만 해도 탄천 풍경 맛에 산다. 0층(스페인은 1층이 0층)은 가슴 저미는 편지들로 따뜻했다. 심지어 수영장까지. 운동 욕구를 불러일으켜 비가 내리기 전까지 수영복 아닌 후줄근한 옷으로 근력 운동을 했다. 2층에 묵었는데 바로 앞은 식당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순례자 메뉴를 시키면 되었다. 순례자 메뉴 시간(7:30 PM)을 못 참고 그새 동네 바에 가서 또르띠야를 먹고 왔지만.





스페인 음식에 마음을 뺏기기도 했지만, 마을마다 풍기는 요리 향과 문화에 식탐이 솟구쳐 대부분 바 아니면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조리가 불가능한 알베르게에 미련이 없다는 뜻이며, 단순한 삶에 단순함을 더해 더 풍요롭다는 의미다. 나처럼 대식가는 애피타이저로 나오는 빵도 무한 리필해 가성비가 이미 높았다. 마트 음식은 싸지만 웬만큼 담지 않고서는 양이 차질 않고, 바에서 순례자 메뉴를 단품으로 시키면 몇 배나 비쌌다. 순례자 메뉴가 질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매일 같은 메뉴로 살던 가락이 있어 순례자 특권으로 누리는 게 감사하고 매번 새로운 맛에 감탄했다. 콩과 생선을 좋아해 아주 임자 만났다. 애피타이저 콩 수프, 본 요리 대구 구이, 디저트 요구르트. 어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아니겠는가. 순례자 메뉴 18.5유로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 따져대는 나 자신까지 메뉴에 포함 된다.





새벽에 0층 화장실을 세 번 드나들며 5시에 방에서 아예 나왔다. 2층 화장실을 이용하면 사람들 깰까봐 화장실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0층에 내려와 벽에 붙은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 길을 걷는 이들 중 가족 잃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길은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스틱으로 '톡' '톡' 누른 것처럼 장면 장면이 튀어 올랐다. 길 자체의 본질인데, 한국에서는 스마트폰에 눈을 뺏기고 블루투스에 귀를 뺏기고 다가올 미래에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 같은 장면도 저장되어 있는데. 길 자체를 보는 것이 삶 자체를 훑어보게 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듯이.


길은 길답게, 자연은 자연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나는 나다울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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