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방법을 아는 나무는 기존의 것을 훌훌 털어버린다. 털어버림에 있어서는 조금의 욕심이나 미련 따위는 없다. 남겨놓은 것이 없기에 아무리 혹독한 추위에도 나무는 의연(毅然)하다.
폭설을 이고 선 나무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꺼이 빈 가지를 내어주는 자세 때문이다. 그 모습을 숫자로 나타내면 0이다. 0은 나무에게 넓고 깊은 둥근 나이테를 선물한다. 0의 의미를 아는 나무는 비록 설익은 이야기라도 부정하지 않고 나이테 안에서 수십 번 곱씹어 자신의 자양분으로 만든다.
남김없이 기존의 것을 훌훌 털어버린 나무는 사람들에게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텅 빈 충만의 교훈을 수천 년째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채워도 늘 허기진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사람들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이야기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자신만이 절대선이라는 착각에 빠져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잘라 버리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은 언제나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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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물론 검찰, 경제, 심지어 교육까지 이 나라 모든 요소가 정치, 특히 정부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 너무 가까우면 전체를 볼 수 없다. 과거 청산 운운하는 사람들은 분명 시간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0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자세는 물론 부분과 전체를 볼 수 있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요소는 거리감을 상실했다.
정(情)과 한(恨)이 많은 민족이어서 그런지 우리는 늘 거리 조절에 실패한다. 적폐, 고독사(孤獨死), 불신, 학교폭력 같은 말들은 거리감 상실이 만든 말들이다.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이다.
인간관계 거리에 관해 연구한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 간의 거리를 다음과 같이 네 유형으로 나누었다.
“친밀한 거리(45.7cm 미만), 개인적인 거리(45.7cm~1.2m), 사회적인 거리(2m~3.8m), 공적인 거리(3.8m 이상)”
과연 우리는, 우리 사회는 어떤 거리에 놓여 있을까. 세상에 제일 어려운 측량 단위는 `적절함`이다.
적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나무의 0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등 거리 두기 바람이 거센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