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기억력 - 섬개야광나무
뿌리 기억력 - 섬개야광나무
"교장님! 일전에 은행 씨앗을 싹 틔운 적이 있어요. 3년 정도 지났는데 딱 요만큼 컸어요."
모임 회원들이 6월 일요일에 나무와중학교를 방문했다. 그때 한 회원이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경험한 자연의 신비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사진에는 새싹티가 그대로인 화분에 둥지를 튼 20cm 정도의 유아 은행나무가 있었다.
씨앗 발아의 지난함은 경험해 본 사람은 손뼉을 치면서 공감할 일이었다. 나 역시 그 어려움을 너무 잘 알기에 명화를 보는 것보다 더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사진을 보았다.
"비록 3년밖에 안 된 키 낮은 어린 은행나무지만 가을이 되니 이렇게 낙엽도 짓더라구요."
화면에는 노랗게 물든 10장 내외의 은행잎이 가지마다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분명 가을을 배웅하는 의젓한 은행나무였다.
학교에 정원을 짓고 작년 가을에 식물 가족 몇 세대를 더 이주시켰다. 전주 물꼬리 풀, 섬개야광나무 등 하나 같이 멸종 위기 종으로 지정된 귀한 생명들이다.
씨앗은 엄두도 안 나서 어린 모종을 선택했다. 귀한 식물인 만큼 어떻게든 새로운 식물들이 빨리, 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학생들과 열심히 돌봤다.
전주 물꼬리 풀은 이사 온 그 해에 꽃까지 피웠다. 그런데 섬개야광나무는 달고 온 잎마저 한 달도 안 되어 다 떨구었다. 그런 현상을 볼 때마다 드는 마음은 죄책감이다.
"선생님, 얘들 죽었어요?"
섬개야광나무의 관찰 일지를 맡은 학생이 울상이 되어 교장실로 왔다. 나는 식물의 상태를 아는 터라 죽었다고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생을 최대한 위로했다.
"그럼, 우리 짜장면 못 먹는 거예요?"
식물이 꽃을 피우면 같이 축하 파티로 짜장면을 먹자고 했는데, 그것이 무산되니 학생이 많이 섭섭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관찰 기록을 담은 일지를 두고 같다.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도 그렇지만, 내 짜장면도 죽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2025년 봄이 왔다.
"교장 쌤!"
흡사 세상을 다 얻은 개선장군이 대병사를 이끌고 수도로 입성하는 함성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서 봄보다 더 큰 생명력이 느껴졌다. 이미 교장실은 교장실이 아닌 학생들이 자유롭게 와서 책도 읽고, 쉬기도 하고, 또 토론도 하는 학생 문화공간이 된 지 오래라 학생이 자유롭게 오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져 내가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교장 쌤, 큰일 났어요. 아니 올해는 짜장면을 먹을 수도 있겠어요! 빨리 같이 가봐요, 빨리요!"
학생은 저만치 앞서 가면서 계속 나를 재촉했다. 가는 곳으로 보아 그곳은 멸종 위기 식물 보존 학교 정원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만 나면 멸종 위기 식물들과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를 귀담아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다. 감사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학생이 도착한 곳은 작년에 섬개야광나무를 심었던 곳이었다. 겨우내 틈틈이 가서 봤는데 그때는 회초리보다 더 가는 줄기와 가지밖에 안 보였다. 큰 바람에 꺾이지 않고 그래도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 조금은 기대를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그 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설마라는 조금의 희망이 생겼다. 설마가 희망으로 변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교장 쌤, 얘네들 안 죽었어요. 여기 보세요. 가지마다 눈이 떴어요. 뿌리가 살아 있었어요."
나는 포기를 했는데, 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나보다 더 자연을, 그리고 뿌리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뿌리가 죽지 않은 이상 뿌리는 준비가 되면 그것이 언제가 되든 자신이 기억하는 일을 꼭 한다.
나도 뿌리를 생각한다. 과연 내 뿌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과연 내 뿌리가 피워 올릴 것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뿌리의 힘을, 그리고 기다림의 미덕을 알개해준 섬개야광나무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학생은 다시 관찰 일지를 빼앗듯이 들고 갔다. 과연 어떤 내용이 기록될지 너무 궁금하다.
지금부터 나는 짜장면을 준비해야겠다.
※ 섬개야광나무
- 꽃말 : 온화
- 가치 : 멸종 위기 2급, 천년기념물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