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추어 보지 못한 로또
1.
하얀색이 드러나지 않게 잘 염색한 숱 많은 머리카락과 바지주머니에 있는 접이식 빗으로 미루어 그는 나름 멋쟁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비싼 명품을 의미없이 입는 부류는 아니고 약간 비만한 몸에도 적절히 옷을 입어 또래보다 경쾌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날 그는 평소처럼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수도 있고 가볍게 술 한잔을 저녁 식사와 곁들이는 약속을 위해 막 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약간 비만했으나 눈살 찌푸려질 정도는 아니었고 지금껏 특별한 질환을 앓은 적도 없어 건강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날도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졌고 여느 때처럼 그는 로또판매점에 들러 로또 몇 장을 구입했다. 주중에 로또 몇 장을 구입해서 주말에 맞추어 보는 것은 그에게는 꽤 오랫동안 즐겨온 소소한 삶의 재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묘한 불편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 그를 덮쳤다. 식은 땀이 흐르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으며 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혹은 아주 심하게 체한 것 같은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잠깐 숨을 고르고 쉬면 좋아지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어쩌면 토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해서 손가락을 목구멍 깊이 집어 넣었을 수도 있고 크게 기침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했든 효과는 없었다.
그는 초조해졌고 병원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외진 시골이 아니라 제법 큰 도시의 중심가인 만큼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는 아무래도 조금 규모 있는 병원의 응급실을 찾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병원까지 갈 것인가? 그는 119 구급차를 떠올렸으나 '그럴 정도는 아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것 까지야'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택시를 타고 응급실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2.
119 구급차가 이송한 환자를 내리기 위해 정차하는 구역에 택시 한 대가 멈추었다. 시동을 끄고 택시에서 내린 기사는 병원 현관에 있는 경비직원에게 뛰어갔다. 그리고는 손짓하며 몇 마디를 건넸고 경비직원은 응급실 접수처에 있는 행정직원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러자 행정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급실과 연결된 문을 열고 말했다.
"택시에 환자가 있는데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휠체어를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119 구급차가 아니라 택시를 통해 응급실을 찾는 환자 대부분은 발목이나 무릎을 다친 경우다. 그러나 가끔 술취한 사람이 택시타고 도착하는 경우도 있고 응급실 전담의사 대부분이 가장 싫어하는 '특별히 아픈 것 없는 이상한 환자'도 그런 식으로 도착한다. 그래서 나는 무슨 환자냐고 물었다.
"의식 없는 환자라고 합니다."
의식 없는 환자? 술취한 사람일까? 아니면 정신질환자일까? 그러나 진짜 의식 없는 중환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나는 재빨리 119 구급차 정차구역에 멈춘 택시로 뛰어갔다. 운전석 옆 아앞좌석에 비교적 덩치 큰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팔은 축 늘어졌고 고개를 뒤로 젖혀진 상태였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남자는 의식이 없었고 자발 호흡이 없었으며 경동맥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단순히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심정지 상태였다. 나는 응급실로 뛰어들어가서 '심폐소생술을 준비하라'고 소리치고 행정직원과 함께 응급실 침대를 가지고 나왔다. 환자를 택시 앞좌석에서 끌어내 응급실 침대에 누이고 응급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아주 짧은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응급실 침대에 누이자 말자 심장 압박을 시작했고 응급실에 들어와서는 심장 압박을 지속하며 기관내삽관(endotracheal intubation)을 시행했다. 정맥을 확보하고 에피네피린을 3분마다 투여하며 도파민 주입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후는 좋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환자는 이미 동공반사(pupil light reflex)가 없고 택시기사의 말에 의하면 '숨이 답답하다'고 택시에 타서 'OO병원 응급실로 가자'고 말하고 곧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환자가 택시를 탄 곳은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번화가를 가로 질러야 했고 하필이면 퇴근 시간 끄트머리와 겹쳐 교통 체증이 심했다. 아마도 의식이 사라졌을때 심정지가 발생했을 것이며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리 짧게 계산해도 10-15분 이상 경과한 후였다. 인간의 뇌는 5분만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에 환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렇게 상황을 판단했으나 심폐소생술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경우 기적은 드라마나 도시 전설 같은 기담에서나 일어날 뿐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10분이 지나도 심장 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13분 정도 지났을 무렵 심장박동 대신 심전도 모니터에 어지러운 형태의 기괴한 선이 나타났다. 심실세동이었다. 나는 제세동을 준비했다. 200J로 충전한 전기충격을 가하자 환자는 한번 들썩거렸고 심실세동은 사라졌으나 역시 심장 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후 2차례 더 심실세동이 관찰되었고 역시 2차례 더 200J로 제세동하고 심폐소생술을 지속했으나 결국 심장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고 20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심폐소생술을 중단합니다. 환자는 2019년 0월 0일 00시 00분 사망했습니다."
나는 짧게 말했다. 육안으로 확인한 것이나 외상의 흔적이 없고 환자가 택시에 탑승하면서부터 '숨이 답답하다'고 호소했으며 구토 같은 증상없이 스르르 의식이 사라졌고 심폐소생술 중 3차례 심실세동이 나타난 것을 고려하면 환자는 심근경색 같은 심장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부검 없이는 원인을 밝힐 수 없어 사망진단서에 '병사'로 표기했으나 사망 원인에는 '미상, 심장질환 추정'이라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환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소지품을 살펴보았는데 자동차 키, 접이식 머리빗, 지갑, 휴대폰이 있었다. 휴대폰은 잠겨 있었으나 다행히 지갑에는 신분증이 있었다. 그리고 지갑에는 신분증 외에도 그날 구입한 로또 몇 장이 있었다.
3.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는 비극과 재앙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극과 재앙은 돌이켜 보면 최악을 피할 수 있었던 선택의 순간이 있다. '로또를 맞추어 보지 못한 남자'에게 그 선택의 순간은 택시를 타기로 결정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질환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119 구급차보다 택시가 빠를 것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으나 119 구급차 대신 택시를 선택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가 택시가 아니라 119 구급차를 선택했다면 퇴근 시간 끄트머리의 교통 체증을 뚫고 좀더 빨리 응급실에 도착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19 구급차에는 자동 제세동기를 비롯해서 심페소생술을 시행할 수 있는 기구와 훈련된 인력이 있다. 119 구급차를 탔어도 이송 중 심정지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그 경우에는 119 구급대원이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을 것이며 자동 제세동기를 부착해서 필요하면 전기충격을 가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심근경색은 심정지가 처음 발생할 때 심실세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그럴 때 제세동은 아주 중요하다.)
물론 그가 119 구급차를 선택했어도 사망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적어도 택시를 타고 오는 선택보다는 최소한 그를 소생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볼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중환자실이긴 해도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 얘기하며 구입한 로또의 당첨 여부를 맞추어볼 기회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그 모두 이제는 그저 안타까운 가정에 지나지 않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