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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결정


 1.
 "흉통입니다. 3-4시간 전부터 증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응급실을 찾는 모든 증상 가운데 흉통은 주의를 기울여 신속하게 진료해야 하는 분류에 속한다. 심정지, 의식저하, 아주 심한 호흡곤란 정도가 흉통보다 우선적으로 진료해야 하는 몇 안되는 증상이다. 물론 모든 흉통이 아주 심각한 질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하지 않은 외상으로 인한 통증, 호흡곤란 없이 발열과 동반하여 나타나는 숨쉴 때 흉통, 무리한 동작 후 자세 변화에 따라 악화하는 흉통 따위는 진료가 필요하나 아주 심각한 질환일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응급실에서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우선 순위를 두는 이유는 급성 심근경색(acute myocardial infarction)과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 같은 심각한 질환의 가장 특징적인 증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환자를 이송한 119 구급대원은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고 다급한 말투도 아니었다. 119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 누운 환자가 다소 비만했으나 너그럽게 보면 '건장한 체격'이라 판단할 수 있는 정도였으며 혈압과 맥박수가 정상이고 무엇보다 특별한 기저 질환 없는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환자를 응급실 침대로 옮기고 측정한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도 모두 정상 범위였다. 흉통의 부위와 양상 역시 심장질환일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왼쪽 가슴이 쥐어짜는 듯한 통증' 혹은 '왼쪽 가슴이 답답하면서 왼쪽 어깨가 저린 증상'이 아니었다. 환자는 가슴 중앙에서 약간 위쪽 부분이 '쓰라리고 타는 것 같다'고 호소했다. 증상만으로는 심장질환보다 식도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찜찜했다. 일반적으로 나는 '가지고 있는 질환이 있습니까?' 혹은 보다 이해하기 쉽게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는 만성 질환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데 이미 환자는 그런 질문에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재차 '혹시 약을 먹어야 한다고 의사가 권유했는데 치료하지 않은 질환은 없습니까?'라고 물었고 환자는 '혈압이 높고 당뇨병이 있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환자는 '약을 먹지 않으니 질환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한 듯 했다. 환자는 '청년'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나이였으나 치료하지 않은 고혈압과 당뇨병이 있고 비만한 체격이라 급성 심근경색 같은 질환을 감별해야 했다. 더구나 치료하지 않은 당뇨병이 있다면 통증의 양상이 일반적인 사례와 다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즉시 심전도를 시행했고 안타깝게도 ST분절 변화(급성 심근경색일 때 나타나는 심전도의 변화)가 명확히 관찰되었다. 

 그때부터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환자에게 몰핀(morphine, 마약성 진통제) 5mg을 정맥 주사로 투여하고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경구약으로 복용시켰다. 심장효소 수치를 포함한 혈액검사를 처방하고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해서 '급성 심근경색이 의심되어 즉시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해야 하는 환자가 있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심장내과 당직의사와 심혈관 조영술 팀이 준비되는 20-30분 가량 동안 환자에게 흉부 CT를 시행했는데 앞서 말해듯 심근경색의 전형적인 통증과 조금 달라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도 감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장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혈전으로 막히는 급성 심근경색과 달리 대동맥 박리는 심장과 바로 연결되는 가장 큰 동맥인 대동맥이 찢어지는 질환으로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 다행히 흉부 CT에는 대동맥 박리를 의심할 병변이 관찰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하면 응급실 진료는 마무리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급성 심근경색이며 심각한 질환으로 즉시 심혈관 조영술이 필요하다. 즉시 시술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다'고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몰핀을 정맥 주사로 투여해도 지속되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어야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다소 거칠게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환자분, 급성 심근경색은 아주 심각한 병입니다. 고혈압과 당뇨병을 진단받았을 때도 의사가 이렇게 얘기했겠죠. 그리고 몇년 간 치료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었으니 지금도 의사의 겁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급성 심근경색은 고혈압이나 당노병과는 다릅니다. 고혈압과 당뇨병은 조금씩 육체를 갉아먹는 질환이라면 급성 심근경색은 순식간에 죽어 버리는 질환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죽는다구요. 1-2시간만 늦게 왔어도 의식없고 심장이 뛰지 않는 상태로 도착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당장 시술하지 않으면 1-2시간 후에는 그렇게 될 것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술하지 않으면 1-2시간 후에는 죽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죽는다구요."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환자에게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자칫 설명보다 윽박지르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환자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고 그때 심혈관센터에서 준비가 끝났으니 환자를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2.
 부부로 추정되는 두 노인의 체구는 비슷했다. 남자의 키가 조금 더 컸으나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었고 체구 뿐 아니라 마른 체형도 비슷했다. 그러나 두 노인 모두 늙고 병든 빈약한 몸은 아니었다. 두 노인은 말랐고 햇볕에 그을려 피부가 가무잡잡했으나 거친 농사일에 단련된 강인한 팔과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뭐, 한 열흘 전부터 옆구리가 아팠어. 3-4년 전에도 이렇게 아프다가 저절로 나았는데 이번에는 계속 아파."

 '어디가 불편하시죠?'란 질문에 노인은 팔을 앞으로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팔에서 느껴지는 활력과 노인이 잠깐 머금었던 너털 웃음은 과연 노인에게 응급실을 찾을 만한 문제가 있을지 의문스럽게 했다. 일단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은 정상 범위였다. 이학적 검사에서도 오른쪽 옆구리 통증이 있으나 압통은 확인되지 않고 복부 역시 통증과 압통없이 부드러웠다. 

 나는 요로 결석(ureter stone)이라 생각했다. 신장(kidney)에서 만들어진 소변이 방광(urinary bladder)까지 내려오는 통로인 요관(ureter)에 생기는 결석은 심한 옆구리 통증을 동반하는데 균일한 통증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악화와 호전을 반복할 때도 있어 환자의 증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조영제(contrast)를 사용하지 않는 복부 CT를 시행했다.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는 CT에서 요로 결석이 확인되면 그것으로 확진이고 만약 다른 병변이 있다면 그때 조영제를 사용하는 화면을 추가로 촬영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CT에는 요로 결석이 확인되지 않았다. 신장, 요관, 방광 모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다만 담낭(쓸개, gall bladder) 주변이 이상했다.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CT라 정확히 병변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담낭 주변에 염증성 변화가 있는데 담낭 결석(GB stone)은 확인되지 않았고 담낭염(acute cholecystitis)이라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환자에게 '요로 결석은 아닌데 쓸개 주변에 염증이 있어 좀더 자세한 화면을 찍어 봐야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환자에게 아들이나 딸의 전화 번호를 물어봤다. '아들과 딸의 전화 번호가 왜 필요하냐?'는 노인들의 말에 '제 부모님이 아프시면 당연히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감기 몸살이나 장염이 아니라 쓸개에 염증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자제분께 연락해야 합니다'고 대답했다. 노인들은 내 의견에 동의했고 나는 그렇게 연락된 아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아들은 조영제를 사용하는 복부 CT에 동의했다. 

 솔직히 그 시점에도 나는 환자의 병명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앞서 말했듯 담낭염(cholecystitis)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1주일이나 진행된 담낭염이 우상복부 통증(RUQ pain)과 발열이 없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화면이었으나 담낭염을 의심할 만큼 담낭이 부어 오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담낭과 인접한 간 조직에 농양을 의심할 수 있는 병변이 있었으나 그 정도 크기의 간 농양이면 고열은 당연하고 패혈증 초기 증세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간 농양치고는 경계가 너무 또렸했다. 그러나 단순한 간 낭종(hepatic cyst, 이른바 물혹)이라기에는 경계가 불분명했다. 따라서 환자는 담관에서 시작된 간의 악성종양, 간내 담관암종(intrahepatic Cholangiocarcinoma)일 가능성이 높았다. 

 조영제를 사용해서 추가로 찍은 CT 화면을 확인하자 나의 불길한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나는 응급의학과 의사일 뿐 영상의학과 의사는 아니나 환자의 복부 CT에서 관찰되는 병변은 간내 담관암종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확실하다'고 얘기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환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내일 소 여물은 문 오른쪽에 있어."

 두 노인은 내일 해야할 농사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쓸개에 염증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입원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들었으니 환자가 입원할 며칠 동안 혼자 감당해야할 부분을 의논하는 듯 했다. 침대에 함께 앉아 농삿일을 의논하는 두 노인에게 '악성종양, 쉽게 말해 암이 의심됩니다'는 말은 차마 건넬 수 없었다. 나는 '쓸개와 간에 심한 염증이 있습니다. 입원해서 더 검사해야 합니다'고 간략하게 말한 다음 진료용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환자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인들에게는 차마 건네지 못한 '음울한 통보'를 아들에게는 건네야 했기 때문이다. 

 3.
 응급실 뿐 아니라 어디서든 임상의사로 일하면 '음울한 통보'를 건네야할 때가 적지 않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런 '음울한 통보'는 환자에게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매를 비롯해 이런저런 질환으로 인지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된 경우가 아니면 검사 결과가 심각할수록 환자에게 사실대로 통보해야 한다. 예전에는 '연세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데 충격 받으면 어떡하냐?'며 환자에게 사실을 숨기는 사례도 적지 않았는데 앞서 말했듯 나이가 많든, 건강이 좋지 않든 관계없이 인지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된 경우만 아니면 환자에게는 진단 결과를 정확히 통보받을 권리가 있다. 나이가 많다거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앞으로 다가올 운명에 대한 선택과 판단에서 정작 본인이 배제되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비인간적인 결정이다. 설령 환자와 아주 가깝고 환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인 가족들이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에는 변함없다. 

 그러나 그날 나는 앞으로 며칠 동안 해야할 농삿일을 의논하는 두 노인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또 환자가 하루 쯤 늦게 가혹하고 잔인한 사실을 통보받아도 크게 문제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죽음'을 먼 미래의 일로 예상했을 젊은 심근경색 환자에게는 '죽습니다'란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도 정작 '죽음'이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노인 환자에게는 차마 '암에 걸렸습니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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