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의 방식
1.
"요즘 다른 병원 다니지 우리가 아주 오래 이 병원다녔어. 여기 기록이 다 있는데 모른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여기 안 왔다고 괄시하는 거야!"
흥분한 환자의 말은 '절반의 사실'에 가까웠다. 환자가 우리 병원을 마지막으로 들른 것은 2년 전이다. 그전까지 몇 년 동안 우리 병원 심장내과 외래를 꾸준히 방문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 병원 심장내과 외래에서 처방받은 경구약과 주사제는 전혀 없었다. 1달에 한번 혹은 2달에 한번 심장내과 외래를 방문해서 정맥혈을 소량 채취하여 INR(nternational normalized ratio, 국제 정상화 지수)을 측정했을 뿐이다. '국제 정상화 지수'라는 의사 사이에서도 생경한 한글 용어보다 'INR'이란 영어 약자로 널리 알려진 이 수치는 혈액이 얼마나 정상적으로 응고하는지를 나타낸다. 그래서 혈액 응고에 문제가 생겼는지 진단하기 위해서도 사용하나 실제로는 와파린(warfarin) 같은 항응고제가 제대로 작용하는지 확인하는 목적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아주 심한 심방 세동(A-fib)이 있거나 심장 판막 질환이 있는 경우 혈전이 만들어지기 쉽다. 그렇게 만들어진 혈전이 뇌의 혈관을 막으면 뇌경색, 폐동맥을 막으면 폐동맥색전증(pulmonary thromboembolism) 같은 무서운 질환을 일으키기 때문에 환자에게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를 복용시킨다. 그런데 와파린을 너무 적게 복용하면 혈전을 방지하는 효과를 제대로 얻기 어렵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많이 복용하면 혈전은 방지할 수 있으나 뇌출혈 같은 심각한 출혈이 발생한다. 따라서 혈전을 방지할 수 있으나 뇌출혈 같은 심각한 출혈은 일으키지 않는 수준으로 와파린의 용량을 조절해야 하는데 그 적절한 수준을 측정하는 일에 INR은 아주 유용하다. 그래서 심한 심방 세동이나 심장 판막 질환으로 혈전 가능성이 높은 환자는 INR을 2~3 사이로 유지한다. 2보다 아래로 떨어지면 와파린 복용량을 늘려야 하고 3보다 증가하면 와파란 복용량을 줄여야 한다. 그러니까 환자는 다른 병원에서 와파린을 처방받으면서 우리 병원 심장내과에는 단지 INR을 측정하기 위해 들렀을 뿐이다.
그런 환자는 수도권 대형병원에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2-3달에 한번씩 수도권 대형병원 외래를 방문해서 검사하고 약을 처방받고 그 사이에 INR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방 병원을 들르는 형태다. 그러다가 2년 전부터는 심장내과 외래에 들러 INR을 측정하는 일도 없었는데 이유는 수도권 대형병원에서 인근 대학병원으로 다니는 병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2-3달에 한번씩 번거롭게 서울을 오갈 일도 없고 응급 증상이 닥쳐도 보다 진료받기 수월했으며 당연히 우리 병원 심장내과 외래를 들러 INR을 검사할 이유도 사라졌다. 아울러 환자의 팔꿈치 안쪽 피부 아래에 불록 솟아올라 박동이 느껴지는 병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환자는 혈액 투석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혈액 투석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것으로 동정맥루-arteriovenous fistula-라고 부른다.)
"그게 아니라 우리 병원에는 환자의 심장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혈액 투석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심전도에는 다행히 심각한 이상이 관찰되지 않습니다."
과거 의무기록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을 종합하면 환자는 심장 판막 질환과 심방 세동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심전도에는 심방 세동이 관찰되지 않아 그 사이에 호전되었는지 아니면 심장 판막 질환으로 와파린을 복용하는 것이며 심방 세동은 발작성 심방세동(paroxysmal A-fib, 드물게 한번씩 심방세동이 나타나는 질환)인지 불분명했다. 다행히 의식이 명료했고 혈압, 맥박, 호흡수도 정상 범위였다. 호흡곤란도 없었으며 환자는 최근 며칠 간 지속적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니 일단 응급실에서 즉시 조치를 취해야할 심각한 문제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현재 응급실에서 당장 조치를 취할 심각한 문제 가능성은 낮으나 며칠 동안 지속된 증상으로 심장내과 진료는 필요하고 현재 인근 대학병원에서 꾸준히 다니면서 진료하고 있으니 진료 기록이 있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원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그 부분이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나의 설명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어서 '그럼 무슨 문제인지만 진단해달라'고 말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않은 요구였다. 혈액검사를 추가로 시행할 수 있으나 만성 질환으로 인한 이상 외에 새로운 이상이 확인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면 추가적인 검사를 위해서는 현재 다니고 있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해야할 것이다. 우리 병원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할 수도 있으나 결론은 같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의사 말투가 딱딱하고 사무적이다. 이 병원 다니지 않는다고 차별하냐? 무슨 문제인지 정확히 모르는 이유가 뭐냐? 환자가 만성 질환으로 오랫동안 아픈 사람이 아니었거나 보호자가 조금만 더 난폭했다면 아마도 경찰에 진료 방해로 신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성질환으로 오랫동안 아픈 환자였고 보호자는 교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늘어 놓았으나 난폭한 위협을 가하지는 않아 그들이 응급실을 떠날 때까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2.
'휠체어 좀 사용합시다'는 말은 그리 달갑지 않다. 보호자가 응급실로 들어와 그런 말을 건네면 '최악의 상황'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다리를 다친 환자라면 다행이나 의식 없는 환자, 간질 발작을 일으킨 환자 심지어 자발 호흡 없는 환자가 응급실 밖에 멈추어선 승용차에 있을 수도 있다.
다행히 이번에 보호자가 '휠체어 좀 사용합시다'고 얘기한 환자는 의식이 명료했다. 맥박수가 분당 100회로 조금 증가했으나 혈압과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다. 다만 체온이 38도로 높았다. 환자는 7-8년 전 대장암으로 오른쪽 대장을 절제했으나 재발없이 완치 판정 받았고 그 외 특별한 병력은 없었다. 이학적 검사에서 오른쪽 배의 윗부분에 심한 통증과 압통이 확인되었는데 이른바 우상복부 통증(RUQ pain, right upper quadrant pain)이라 불리는 증상으로 간담도계 질환이 있을때 흔히 나타난다.
"오늘 낮에도 집 근처 병원에 가서 사진 찍었어."
아니나다를까 환자는 이미 같은 증상으로 인근 응급실에서 진료한 상태였다. 물론 환자의 말에 보호자들은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고령인 환자가 인근 응급실에서 진료하고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환자에게 인근 병원에서 혈액 검사 외 특별한 검사를 했느냐고 물었다.
"했지. 도나스 같은 동그란 기계를 통과했어."
'도나스 같은 동그란 원을 통과하는 검사'는 CT일 가능성이 높다. '관처럼 긴 통에 들어갔다'고 표현하면 MRI일 가능성이 높은데 복통으로 MRI를 시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는 다시 환자에게 의사가 뭐라고 진단했냐고 물었다.
"쓸개에 염증이 있다고 했어."
앞서 말했듯 우상복부 통증은 간담도계 질환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간농양(hepatic abscess), 담낭염(cholecystitis, 담낭의 염증), 담관염(cholangitis, 담관의 염증)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세 질환 모두 정맥 항생제가 필요하고 간농양은 농양의 위치와 크기에 따라 추후 배액술(drainage)이, 담낭염은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이, 담관염은 막힌 담관을 뚫는 시술이 필요하다. 세 질환 모두 입원치료가 필요하며 쉽게 패혈증으로 악화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환자는 입원하지 않았을까?
"내가 입원 준비를 안해서 못하다고 했어. 그러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했어."
의사에게 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킬 권한은 없다. 그러나 급성 담낭염에 걸린 고령 환자가 '입원 준비를 못했으니 다시 오겠다'고 하는 경우에 순순히 '그럼 내일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급성 담낭염이 어떤 질환인지 완벽히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치료 시기를 놓치면 아주 고생하거나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환자가 알아듣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면 전화를 통해서라도 다른 가족들, 소위 '젊은 보호자'에게 알려야 한다.
"쓸개의 염증은 급성 담낭염을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급성 담낭염은 응급 수술이 필요하고 방치하면 패혈증으로 악화하거나 쓸개에 고름이 생기는 담낭 농양(gall bladder empyema)으로 악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낮의 상황은 제가 추측할 뿐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다시 복부 CT를 시행해서 진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환자와 보호자들은 새롭게 CT를 시행해서 진단하는 것에 동의했다. 나는 정맥 항생제와 소량의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고 즉시 복부 CT를 시행했다. 증상과 진찰 결과를 고려하면 인근 응급실의 진단이 틀릴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다만 수술이 필요한 담낭염인지 혹은 시술이 필요한 담관염인지 감별해야 했다. 복부 CT를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담관염을 담낭염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복부 CT에는 담낭 결석(gall bladder stone)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담낭 그러니까 쓸개는 생각보다 많이 부어 오르지 않았고 주변의 염증도 경미했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병변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혹은 '젠장' 같은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는데 간과 횡경막 사이 공간에 공기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복증(pneumoperitoneum)이다. 위장관 내에는 당연히 공기가 존재하나 위장관 내부에 해당하지 않는 복강 내 공간에는 공기가 있으면 안 된다. 최근 복부 수술을 받은 환자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외부 상처가 없는 기복증은 위장관의 찢김을 의미한다. 외부 상처가 없는 무딘 손상(blunt injury)으로 위장관이 찢어지거나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으로 인한 천공(ulcer perforation)이 거기에 해당한다. 나는 다시 CT를 차분히 살펴봤고 십이지장 주변에서 천공이 의심되는 병변을 찾아냈다.
환자는 급성 담낭염이 아니라 십이지장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peritonitis d/t duodenal ulcer perforation)이었다. 그래서 치료 계획이 완전히 달라졌다. 담낭 농양이나 패혈증 증상이 없는 급성 담낭염은 정맥 항생제를 사용하며 일반외과 병동으로 입원해서 아침에 응급 수술을 시행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십이지장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은 당장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 더구나 환자는 고령이었고 과거에 오른쪽 대장 절제술을 받은 병력이 있었다. 가능성이 높지 않으나 단순한 십이지장궤양 천공이 아니라 암의 재발로 인한 천공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나는 일반외과 당직의사를 호출했다.
우리 병원은 흔히 맹장염이라 부리는 급성 충수염과 담낭염 같은 비교적 심각하지 않은 질환 뿐 아니라 비장, 간, 신장의 파열로 인한 혈복강이나 위장관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도 수술이 가능하다. 물론 대학병원급 규모가 아니라서 항상 가능하지는 않고 일반외과 당직의사의 결단에 좌우된다. 다행히 그날의 일반외과 당직의사는 좋은 의미로 '옛날 외과의사'에 해당해서 수술이 가능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외과 당직의사가 응급실에 도착했고 환자를 확인하고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의심되는 질환과 수술 방법을 설명했다.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상태와 일반외과 당직의사의 결단 외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필요하다. 바로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였다. 환자와 보호자가 '대학병원에서의 수술'을 강력히 원하면 어쩔 수 없다. 보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병원에서의 수술'을 강력히 원하지 않고 보호자 대부분이 우리 병원에서의 수술에 동의해도 단 한 명이라도 회의적인 의사를 보이면 전원해야 한다. 십이지장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이 아주 어려운 수술은 아니나 환자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리고 막상 개복했을때 천공 위치가 접근이 힘든 곳에 있으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런 경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의료진의 과실에 의한 의료 사고는 아니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보호자들의 의견이 갈렸다. 다수는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동의했으나 약간 회의적인 사람이 있었고 결국 일반외과 당직의사는 대학병원 전원을 결정했다. 그런데 대학병원에 전원 문의하자 '현재 응급수술을 하고 있어 수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커졌다. 우리 지역의 대학병원 외에도 인근 대도시에는 4-5개의 대학병원급 병원이 있다. 인근 대도시도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어서 전원을 고려할 수 있으나 경험상 인근 대도시로 전원은 가능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전원 문의를 했으나 예상대로 인근 대도시의 대학병원 어디에도 환자 수용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제 문제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나는 보호자들에게 인근 대학병원 뿐 아니라 인근 대도시의 대학병원급 병원들에서도 환자를 수용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그때 한켠에 있던 일반외과 당직의사가 조용한 음성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자 이제 여기에서 응급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다행히 환자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운이 좋았고 무엇보다 그날의 일반외과 당직의사가 '옛날 외과의사'에 해당해서 얻을 수 있었던 '최상의 결과'였다.
그러나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고 '옛날 외과의사'가 당직인 날에만 응급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내원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병원 간 전원'은 모든 응급의학과 의사에게 쉽게 해결하기 힘든 골칫거리다. 권역센터에서 일하면서 주로 전원을 받는 입장이든, 작은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전원을 보내는 입장이든, 우리 병원처럼 대학병원은 아니나 어느 정도 중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응급실에서 일하며 한편으로는 전원을 받고 다른 편으로는 전원을 보내는 입장이든 관계없이 '합리적인 이유를 지닌 매끄러운 전원'은 모든 응급의학과 의사가 바라는 방식이나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일단 밀고 들어가겠다'는 막무가내나 아무 연락없이 나타나 환자를 내려 놓고는 황급히 도망치듯 사라지는 일은 이제 많이 줄었고 일정 이상 중증도가 있는 환자의 경우 미리 전원 문의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상식으로 자라잡았으나 전원을 받든, 전원을 보내든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가 적지 않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심각한 급성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적은 환자는 대학병원으로 전원보냈고 대학병원 전원이 필요할 수도 있는 복막염 환자는 수용한 셈이다. 물론 첫번째 환자를 전원할 수 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