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의사의 판단
1.
레지던트 3년차 혹은 레지던트 4년차 무렵 달콤한 오프를 끝내고 출근한 아침, 밤새 당직으로 초췌한 표정의 아랫년차 레지던트가 내게 말했다.
"형, 밤새도록 심폐소생술 했어요."
아마도 아랫년차 레지던트는 내가 '수고했다'며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길 원했을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괴팍한 괴짜 혹은 미치광이 같은 똘아이로 손꼽히는 존재였으나 타인의 감정에 무심한 존재는 아니어서 아랫년차의 의도를 쉽게 파악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생했던 아랫년차에게 '그래, 수고했다'는 말을 먼저 건네고 '그런데 무슨 환자였어?'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밤새 심폐소생술이라니 무슨 환자냐?'고 건조하게 물었다.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였습니다. 혈색소(hemoglobin, 정상 범위는 12-16) 수치가 1.0이었어요. 그렇게 낮은 환자는 처음 봤습니다."
대동맥(aorta)은 심장과 바로 연결된 거대한 동맥이다. 일종의 펌프인 심장이 힘차게 내뿜은 혈액이 가장 먼저 도달하는 장기인 대동맥은 심장 위쪽에서 나와 머리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이내 아래로 방향을 틀어 흉부와 복부의 중심을 지나 양쪽 다리로 향하는 혈관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 머리와 양쪽 팔 그리고 위장관과 간, 신장, 비장 등 다양한 장기에 혈액을 공급하는 보다 작은 혈관들에 연결된다. 특별한 의학 지식없이 생각해도 이런 대동맥이 찢어지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대동맥은 심장이 뿜어내는 혈액의 센 압력에도 견딜 수 있으며 웬만해서는 찢어지지 않도록 질기고 탄력있는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판 증후군 같은 유전적 이상, 노화, 고혈압, 동맥 경화 같은 문제로 대동맥이 약화되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대동맥류(aortic aneurysm)가 만들어질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나 대동맥 파열(aortic rupture)로 악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대동맥류는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고 일정 크기 이상의 대동맥류는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야 하며 특히 대동맥 박리는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
아랫년차 레지던트의 말대로 혈색소가 1.0이었다면 대동맥 박리 초기가 아니라 대동맥 파열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진료시스템에 접속해서 환자의 CT를 살펴보았는데 예상대로 대동맥 파열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이미 치료 시기를 훌쩍 지나 응급 수술도 고려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환자가 맥박 있는 상태로 도착했어?"
아랫년차 레지던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인근의 중소병원에서 이송했는데 도착 당시 이미 의식, 자발 호흡, 맥박이 모두 없었다고 했다. 기관내삽관을 시행하고 중심정맥을 확보해서 대량의 수액을 공급하고 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을 투여하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하자 혈압이 측정되지는 않으나 심전도에는 미약하게 심장 리듬이 회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직선의 심전도가 나타났고 그래서 다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하면 역시 혈압은 측정되지 않으나 심장 리듬이 회복하는 것을 반복했다고 했다. 아랫년차 레지던트는 그런 식으로 환자를 붙들고 밤새 심폐소생술을 시행했고 아침에 가까워서야 최종적으로 사망선언했노라 말했다. 아무래도 아랫년차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응급의학과 의사로 의무를 다한 것'에 대한 칭찬을 예상한 듯 했다. 칭찬까지는 아니라도 '수고했다'는 따뜻한 한 마디는 기대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게 의미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해? 혈색소 1.0에 대동맥이 완전히 파열되었는데 심폐소생술해서 어쩌려고? 그래서 맥박이 회복될거라 생각했어? 설령 미약하게 회복되었다면 뭘할건데? 흉부외과에 연락해서 수술방에라도 밀어 넣을 생각이었어? 메디컬 드라마도 아니고 그런 상태의 환자가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어?"
지금 생각하면 아랫년차 레지던트에게 매우 미안하다. 의대생 시절부터 나름 친했고 그의 응급의학과 지원에는 나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숫자도 많지 않았고 병원에서 응급의학과에 대한 평판도 좋지 않아 좀더 따뜻하게 대하며 챙겨줄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열정적이고 일은 열심히 했으나 '나머지 병원 전체와 싸우려는 미치광이'란 표현이 어울리던 시절이라 나에게 그런 여유가 없었노라 변명해봐도 미안한 마음은 덜어지지 않는다. 그때도 분명히 아랫년차 레지던트에게 보다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는데...
"네가 밤새 회복할 수 없는 환자에게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다른 중환자가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그것도 처음부터 혈압이 낮거나 심각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아니라 처음에는 증상이 명확하지 않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놓치기 쉬운 환자였다면? 이번에는 운좋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매번 운이 좋을 수 있을까?"
아랫년차 레지던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앞서 말했듯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얘기했어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대동맥 박리가 진행되어 대동맥 파열에 가까운 상태라 출혈량이 엄청나며 혈색소가 1.0 밖에 되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해도 심전도의 심장 리듬만 잠깐 돌아올 뿐 맥박을 회복하지 못하는 환자는 소생 가능성이 없다. 임상의사로 일하다보면 '기적적인 회복'을 목격할 때도 있으나 그 '기적적인 회복'조차도 모든 상황에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기적적인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특정적인 상황이 있고 명백한 뇌사(Brain death)처럼 그런 기적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있는데 그때의 대동맥 파열 환자는 후자에 해당했다.
2.
요양병원에서 전원한 환자는 호흡곤란이 아주 심했다. 95% 이상이 정상 범위인 산소포화도가 60-70%를 넘지 못했다. 아직 의식은 비교적 명료했으나 양쪽 폐의 호흡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혈압 역시 70/40으로 심각하게 낮았다. 언제나 그랬듯 요양병원에서는 전원 문의를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환자를 보냈으나 다행히 중환자실에 자리가 있어 환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물론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어도 그런 상태의 환자를 다시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시킬 수는 없었다.
일단 환자는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 요양병원을 전전했고 이유는 심한 만성 폐질환 때문이었다. 과거에 우리 병원 호흡기내과에서 진료한 적도 있었는데 폐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 언제라도 심각한 호흡곤란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성 폐쇄성 폐질환(chronic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의 급성 악화는 천명음(wheezing) 및 호흡음 감소가 특징적으로 나타나지만 심한 저혈압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환자는 단순한 저혈압이 아니라 쇼크(shock)에 가까운 상태였는데 폐 병변으로 인한 쇼크는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 쇼크(septic shock d/t pneumonia)를 고려할 수 있으나 환자에게 그런 폐렴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동식 X-ray기계로 시행한 흉부 X-ray에서 기존의 만성 폐병변 외에도 새로운 병변이 확인되었으나 폐렴보다는 폐부종(pulmonary edema)에 가까운 변화였기 때문이다. 감염으로 폐에 염증이 발생하는 폐렴과 달리 폐부종은 폐에 습기와 물이 차는 질환으로 심장 기능이나 신장 기능이 급격히 감소하면 나타난다. 따라서 호흡곤란의 원인은 기존의 폐 질환이 아니라 새로운 심장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고 심장 문제라면 급성 심근경색부터 감별해야 했다.
그래서 즉시 심전도를 시행했다. 심전도 결과 분당 맥박수 110회 가량의 빈맥(tachcardia)과 함께 ST분절 상승(ST elevation), ST분절 하강(ST depression)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ST분절의 상승과 하강은 급성 심근경색(acute myocardial infarction)일 때 심전도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변화다. 다만 호흡곤란이 아주 심한 경우에도 ST분절 하강은 나타날 수 있고 빈맥이 심하면 명확하지 않은 ST분절상승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급성 심근경색이 아니라면 폐부종과 쇼크 상태에 가까운 심한 저혈압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즉시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했다. 그리고 환자에게 기관내삽관을 시행하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60-70%의 산소포화도로는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70/40 정도의 심각한 저혈압도 교정해야 해서 도파민(dopamine), 라식스(lasxis, 이뇨제), 500ml 가량의 수액을 동시에 투여했다. 인공호흡기를 연결하자 산소포화도는 90% 정도까지 회복하였으나 혈압은 80-90을 넘지 못했다.
초조한 가운데 심장내과 당직의사와 시혈관 조영술 팀을 기다리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사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 길게 느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심장내과 당직의사는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일반적으로 심장내과 당직의사와 심혈관 조영술 팀을 호출하면 20-30분 후에 시술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날 심장내과 당작의사는 1시간이 지난 후에야 도착해서 '환자를 심혈관 센터로 옮기라'고 얘기했다.
3.
예상대로 환자의 심혈관 조영술 결과는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다행히 혈전을 제거하고 막힌 혈관을 뚫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심혈관 조영술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후 중환자실에서 심정지가 찾아왔고 안타깝게도 환자는 회복하지 못했다.
애시당초 환자는 폐 상태가 매우 나빴다. 오랫동안 흡연하거나 폐결핵을 앓은 환자에서 자주 나타나는 정도의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 아니라 언제라도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는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급성 심근경색이 의심되나 환자에게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는 것이 얼마나 치료적으로 의미있을지 단정하기 어려웠다. 기존의 폐질환과 전반적인 건강 상태, 혈압 70/40의 심장성 쇼크(cardiogenic shock), 심한 폐부종, 인공호흡기를 연결해서 겨우 90%인 산소포화도를 감안하면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해도 환자의 회복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환자 상태를 감안하면 심혈관 조영술이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나는 '평소 건강 상태를 감안하면 회복 가능성이 높지 않으나 패혈증 쇼크가 아니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성 쇼크라서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할 의미가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심장내과 당작의사를 호출했다.
문제는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1시간 후에야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한 부분이다. 만약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환자의 기저 질환과 현재 상태를 감안했을때 급성 심근경색이 맞아도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고 통보했다면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임상의사로 수긍했을 것이다. 나 역시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하면서도 환자가 100% 급성 심근경색이라 확신하지는 못했고 또 심혈관 조영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환자가 회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그런 '임상의사의 냉정한 판단'으로 1시간 후에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게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면 아예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지 않고 중환자실로 입원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심장내과 당직의사는 다른 이유로 1시간 후에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급성 심근경색이 확실하면 심혈관 조영술을 빨리 시행할수록 좋다. 그러나 그 '무조건 빨리'라는 것은 약간 애매해서 우리병원은 지금까지 응급실에서 '심혈관 조영술이 필요하다'고 연락하면 20분, 늦어도 30분 이내에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심장내과 의사 대부분은 그 원칙을 지킨다. 그런데 유독 한 명만 요즘 그 원칙을 무너뜨리며 '가이드라인에는 1시간 30분 후에 시행하면 된다고 나옵니다'라는 기괴한 변명을 늘어 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가이드라인은 최악의 경우 그때까지는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지 1시간 30분 후에 시행해도 괜찮다는 문구는 없다)
과연 이런 심장내과 의사를 동료로 신뢰하며 응급실에서 함께 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