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를 방문하세요'
1.
오후 6시부터 시작한 주중 밤 근무는 다음 오전 9시에 끝난다. 그래서 아침 9시는 '이제 곧 퇴근'이란 기대와 함께 피곤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물론 오전 9시에 소위 '칼퇴근'이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 응급실이 예외적으로 조용한 상황을 제외하면 9시 칼퇴근을 위해서는 교대할 응급실 전담의사가 8시 30분에는 출근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8시 55분이 되어야 모습을 드러내고 지각할 때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2번의 지각을 제외하면 늘 6시부터 근무라면 5시 30분, 9시부터 근무라면 8시 30분에 출근했으니 곰곰히 따져보면 짜증나는 상황이나 그런 문제로 화내거나 항의하기에 나는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의사이며 응급의학과 전문의란 사람이 기껏 30분에서 1시간 일찍 집에 가겠다고 항의하거나 경영진에 보고하는 것이 시쳇말로 '쪼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대하는 응급실 전담의사가 8시 30분에 나타나도 내가 칼퇴근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상대보다 내가 지닌 괴팍함이 한몫하는데 나는 중환자 혹은 중증 질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애매한 환자는 인계하지 않고 직접 해결하고 퇴근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교대한 응급실 전담의사는 8시 45분에 출근했고 인계할 환자는 없었다. 오랜만에 칼퇴근이 가능한 상황이라 나는 퇴근하기 전 마지막으로 의무기록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9시 1분에 잔뜩 찌푸린 표정의 환자가 약간 허리를 굽히고 응급실에 걸어 들어왔다. '어디가 불편하세요?'라는 응급실 간호사의 질문에 환자는 '가슴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환자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의무기록 작성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근무 교대를 완료했는데 이상하게도 교대한 응급실 전담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낮 근무하는 선생님께 연락하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으나 왼쪽 가슴 통증이 명확한 환자를 모른 척 할 수 없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에게 향했다.
"가슴이 아프세요?"
내 말에 환자와 보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통증의 양상을 물었다. 그러자 환자는 왼쪽 가슴이 답답하고 쥐어짜듯 아프다고 말했다. 그때 간호사가 활력 징후 측정을 완료했는데 맥박이 110회로 다소 빨랐으나 혈압, 호흡수, 체온은 정상 범위였다. 나는 환자에게 왼쪽 어깨나 목, 위쪽 팔이 저리거나 아픈 증상이 동반되었는지 물었고 환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혹시 언제부터 통증이 있었습니까?"
질문하면서도 나는 당일 새벽 기껏해야 하루 전 저녁 쯤부터 증상이 나타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환자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환자는 1주일 전부터 증상이 있었다. 그리고 1주일 전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와 하루 전 두차례에 걸쳐 인근 병원 응급실을 방문했었다. 뿐만 아니라 환자는 인근 병원에서 5년 전 협심증(angina)으로 관상동맥에 스텐트(stent)를 삽입한 후 경구약을 복용하며 진료받는 상황이었다.
"그럼 그 병원 응급실에서는 어떤 검사를 시행했습니까?"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절박한 표정으로 긴 얘기를 시작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왼쪽 가슴의 쥐어짜는 통증을 느낀 첫째 날 협심증으로 치료받는 인근 병원 응급실을 방문했고 심전도와 혈액 검사, X-ray를 시행했다. 인근 병원 응급실 의료진은 검사 결과 모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설명하고 환자를 퇴원시켰다. 그러나 통증이 호전없이 지속하여 하루 전 다시 인근 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다. 이번에도 인근 병원 응급실 의료진은 심전도, 혈액검사, X-ray를 시행했고 검사 결과는 역시 정상 범위였다고 했다. 그래서 응급실 의료진은 환자를 퇴원시켰고 '심장내과 외래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심장내과 외래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환자에게 '2주 후에 오라'고 지시한 부분이다. 심전도와 혈액검사에 별다른 이상이 없고 1주일 간 통증이 지속되었으니 급성 심근경색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관상동맥 스텐트가 삽입된 환자에 통증이 지속되었다면 심근경색 단계는 아니라도 관상동맥에 새롭게 좁아진 부분이 생겼거나 이전에 시술한 스텐트가 좁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당장 응급으로 시행하지 않더라도 입원시켜 심혈관조영술을 진행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혈관확장제인 니트로그리세린을 설하(sublingual)로 투여하고 혈액검사와 흉부 X-ray를 처방했다. 니트로그리세린의 효과는 명확하지 않았고 흉부 X-ray에서 심비대(cardiomegaly)나 폐부종(pulmonary edema)은 관찰되지 않았다. 심장효소(cardiac enzyme)를 포함한 혈액검사 역시 정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자리를 비웠던 응급실 전담의사가 돌아왔다. 나는 환자를 인계하고 퇴근하느냐 혹은 혈액검사 결과를 지켜보고 직접 심장내과에 연락하느냐 고민했다. 동료 의사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나만 똑똑하고 유능하다 생각하지는 않으나 나는 가끔 편집증적 의심이 솟아올라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불편할 때가 있고 그 순간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기다려서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직접 심장내과에 연락해서 '당장 심혈관조영술이 필요하지는 않으나 협심증 악화 가능성 있어 입원하여 금일 오후나 익일 심혈관조영술이 필요합니다'는 얘기를 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몇 해 전 환자를 떠올렸다.
2.
환자는 한눈에도 불안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걸어왔다. 또래에 비해 큰 키에 마른 체형인 환자는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굽히고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응급실 침대에 털석 앉았다. 환자는 이내 침대에 누웠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보호자가 '머리가 아팠다'고 말했다.
신경학적 검사와 이학적 검사에서 두통 외 다른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혈압이 있어 꾸준히 경구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호흡수, 맥박, 체온은 정상 범위였으나 혈압이 180/100으로 높았다. 고령이며 이전에는 두통을 호소한 적이 없어 명확한 뇌출혈 증상은 없었으나 두부 CT를 시행했다. 다행히 CT에는 별다른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CT실에서 돌아온 후에도 혈압은 180/100에서 변함없었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15-20분이 지난 후에도 혈압이 높게 유지되는 것으로 미루어 단순한 편두통(migraine)보다 고혈압성 두통(hypertensive headache)일 가능성이 높아 혈압강하제인 라베신(labesin, 베타차단제의 일종) 20mg을 정맥 주사로 투여했다. 30분 후 환자의 혈압은 130/80으로 감소하고 두통은 호전되었다. 심장내과를 다니고 있는 환자라 다음날 외래 방문을 결정하고 퇴원시켰다.
그런데 이틀 후 밤 근무 때 환자는 다시 응급실을 찾아왔다. 이번에도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굽히고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고 두통을 호소했다. 역시 이학적 검사와 신경학적 검사에서는 두통 외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고 혈압은 170/90으로 측정되었다. 환자는 처음 응급실 진료를 본 다음 날 심장내과 외래에서 진료했는데 그날 밤에도 두통이 지속되어 응급실을 찾아 결국 3일 연속으로 응급실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이틀 전 두부 CT를 촬영했고 새로운 증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CT 촬영없이 라베신만 투여했고 30분이 지나자 혈압이 정상 범위로 떨어지면서 두통이 완화되었다. 나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다음날 심장외과 뿐만 아니라 신경과 외래로 다시 방문하도록 권유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환자가 또 응급실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굽히고 찌푸린 표정으로 걸어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119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 누운 상태였고 약간 저하된 의식 상태(drowsy mentality)에 뜻 모를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응급실 침대로 옮긴 직후에는 구토까지 보였다. 나는 보호자에게 열흘 전에 두부 CT를 시행해서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나 이번에는 증상이 달라 혈관조영을 포함한 두부 CT를 다시 시행해야 함을 설명했다. 자발성 뇌출혈이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CT 결과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spontaneous subarachnoid hemorrhage)이 확인되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신경외과당직의사와 중재술을 시행할 영상의학과 의사를 호출하고 보호자에게 환자의 질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3.
일주일에 걸쳐 2차례 인근 병원의 응급실을 방문하고 우리 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환자는 심장내과로 입원해서 그날 오후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했다. 심혈관조영술 결과 이전 스텐트를 삽입한 곳은 큰 문제 없으나 다른 곳에서 심하게 좁아진 새로운 병변이 확인되어 풍선확장술을 시행했다. 인근 병원 응급실 의료진의 판단처럼 2주 후 심장내과 외래로 방문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으나 심하게 좁아진 병변을 감안하면 그 사이에 완전히 막히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악화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물론 그렇다고 인근 병원 응급실 의료진의 판단이 틀렸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상의학의 세계에는 단 한 가지의 정답만 존재하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날 심장내과로 입원해서 심혈관조영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의 판단과 '급성 심근경색이 아니니 2주 후에 외래로 방문하세요'라고 지시한 인근 병원 응급실 의료진의 판단 모두 나름의 근거와 합리적 사고를 거쳤으므로 어디까지나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의료를 다수의 공급자가 서로 대체 가능하나 차별화된 상품을 공급하는 독점적 경쟁시장으로 분류한다.
다만 때때로 관점의 차이가 안타까운 결과를 불러올 때가 있다. 그리고 의사 역시 인간일 뿐이라 모든 상황을 완벽히 예측할 수는 없다. 고혈압이 조절되지 않아 두통을 호소하며 처음 시행한 두부 CT에서 별다른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고 혈압을 조절하면 증상이 호전되는 환자에게 무턱대로 혈관조영을 포함한 두부 CT나 Brain MRA를 처방하기는 어렵다. 그런 환자에게 꼭 향후 뇌출혈 가능성이 있는 뇌 동맥류(Brain aneurysm)가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것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쓰라린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