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완전한 소멸
1.
2차대전 초반 위기를 가까스로 수습한 윈스턴 처칠은 '끝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의 끝일 뿐이다'란 말을 남겼다. 갈리아 전기를 적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같은 강렬한 문구를 남긴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나의 반 생애(My early life)'와 2차대전 회고록을 비롯한 저술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위스턴 처칠 역시 문학적 재능이 넘치는 정치가였다. 그래서인지 '끝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의 끝일 뿐이다'와 비슷한 발언은 후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정치가도 '구시대의 막내가 될 것이냐, 새시대의 맏이가 될 것이냐' 같은 말을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나가는 시대의 막내이며 다가오는 시대의 맏이'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의 시대는 이른바 '팍스 로마'라 불리는 로마제국 절정기의 끄트머리였다. 5명의 현명한 황제-유능한 황제가 5명이나 연달아 배출된 이유는 황제 자리를 친자에게 물려주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입양해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이다-가 통치해서 '5현제 시대'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5현제의 마지막 황제다. 로마의 힘과 영광, 부가 절정에 도달했던 그 시절 브리튼섬 남부에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통과하고 달마티아와 그리스, 소아시아를 거쳐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까지,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에서 아틀라스 산맥을 따라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시리아의 안티오크까지 로마 시민권과 경비만 있으면 '나는 로마인이다'는 말만으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절정의 다음은 쇠락을 의미했고 이미 제국 구석구석에서 그런 징후가 보였다. 게르마니아 국경 너머에서는 야만족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유프라테스강 너머에는 오랜 앙숙인 파르티아가 건재했다. 외부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심각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덕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초강대국 로마의 황제이나 안락한 궁전과 번화한 대도시보다 변방의 거친 막사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빈틈없는 통치자일 뿐 아니라 유능한 장군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면서 독특하게도 철학자였다. 단순히 책 몇 권 읽은 '철학적 소양 있는 군주'가 아니라 네로 황제 시대 정치가인 세네카와 더불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후기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였다. 언뜻 생각하면 스토아 학파 철학자와 로마 황제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나 곰곰히 따져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 황제로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번영과 영광이 절정에 도착한 제국을 물려받았으나 이미 정점을 지나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드려는 단계였다. 제국의 쇠락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단순히 시간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 심지어 제국의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던 야만족조차 '로마제국은 영원하다'는 믿음에 의문을 품지 않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제국의 쇠락을 홀로 알아차린 현명한 황제가 기댈 곳은 철학 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그런 황제가 평안을 얻기에 적절했다.
물론 스토아 학파는 제논이 이끌던 초기와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후기에 제법 큰 차이가 존재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관적이지도 않고 일사분란하게 통일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나 세네카의 글이 오늘날 읽어도 세련되게 느껴지고 공감을 얻는 이유는 스토아 학파가 죽음과 소멸에 대해 지닌 공통적인 견해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는 모든 존재는 물질이며 아주 작은 성분이 모여 구성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신마저도 그렇게 아주 작은 성분이 모여 구성된 물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세와 영혼의 구원에 집착하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현대의 유물론적 무신론자와 비슷했고 내세와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지 않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 헌신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아직은 번영과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알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쇠락의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는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에게 스토아 학파보다 더 적절한 믿음은 없었다.
그런데 1800년 남짓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나 세네카 같은 스토아 학파 철학자처럼 죽음과 소멸에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가 마주하는 죽음과 소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느꼈던 '대제국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죽음과 소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
예순이나 일흔이 아니라 아흔에 가까운 나이의 환자는 언뜻 봐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주름진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앙상해진 팔은 조금만 힘줘도 벌벌 떨렸다. 가늘어진 다리는 깡마른 몸통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식만큼은 놀랍도록 명료했다. 본인의 이름과 나이, 자신이 찾은 장소, 오늘이 무슨 요일이며 대통령은 누군지 같은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기본적 지남력(orientation)이 정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맞이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같은 복잡한 문제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식이 명료하고 호흡곤란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2-3일 전부터 지속적으로 심한 설사가 있어 119 구급대를 통해 내원했는데 고혈압으로 경구약을 복용하고 있고 심근경색으로 치료받은 과거력이 있을 뿐 아니라 평소에도 크레아티닌(creatinie) 수치가 1.8-2.0을 오가며 사구체여과율(GFR, Glomerular Filtration Rate, 신장 기능을 나타내는 대표적 척도로 90-100 이상이 정상이며 30 이하는 투석을 고려해야 하는 심각한 신부전으로 판단한다)이 40-50 범위에 있는 만성 신장병 환자였다. 정상인에서도 심한 탈수는 신장 기능을 빠른 시간 내에 손상시키는 만큼 2-3일 간 심한 설사를 앓은 것을 감안하면 환자는 급성 신부전(acute renal failure)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덧붙여 체온은 정상 범위였으나 내원 당시 혈압이 80/50 밖에 되지 않았다.
과거력, 기저 질환, 지속적 설사, 낮은 혈압으로 고려할 때 패혈증 쇼크(septic shock)와 탈수로 인한 급성 신부전 모두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세프트리악손(ceftriaxone) 2g을 정맥 항생제로 처방하고 동시에 생리식염수 1000cc를 빠른 속도로 투여했다. 다행히 수액을 투여하자 혈압은 100/60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혈액검사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감염을 의미하는 C반응단백질(CRP, C-reactive protein, 0.5 이하가 정상 범위) 수치가 20 이상 증가했고 크레아티닌 수치는 4.5-5.0 사이였으며 사구체여과율은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예상대로 환자는 심한 장염으로 인한 패혈증과 탈수로 인한 급성 신부전이 동반된 상태였다. 다만 간농양이나 담낭염, 충수염 같은 질환에 대한 감별이 필요해서 복부 CT를 시행했다. 물론 급성 신부전이 발병한 상태라 조영제를 사용할 수 없어 조영제를 사용한 CT보다 얻는 정보가 제한적이었으나 CT 결과 간농양, 담낭염, 충수염 같은 질환이 아닌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정상 혈압을 회복하였으니 일반적인 사례라면 환자와 보호자에게 현재 진단명과 환자 상태, 예상되는 예후를 설명하고 중환자실로 입원시키면 응급실 치료가 일단락되나 환자에게는 의학적인 질환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환자는 가족이 없었다. 직계 가족이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가까운 친지도 전혀 없었다. 1주일에 두어번 찾아오는 요양보호사가 그의 유일한 정기적 대인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환자에게 다가가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로 음울하고 공포스런 내용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
"환자분의 진단명은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입니다. 패혈증은 세균이 한곳에 국한되지 않고 혈액을 타고 몸 전체에 독을 뿌리는 질환입니다. 급성 신부전은 문자 그대로 콩팥이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콩팥 그러니까 신장은 탈수되면 아주 빨리 망가지는데 환자분은 평소에도 신장이 썩 좋이 않았는데 이번에 며칠 동안 심한 설사로 탈수가 진행되어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 모두 사망 가능성이 높은 심각한 질환입니다. 중환자실로 입원해서 치료해야 하며 1-2일 후에도 급성 신부전이 호전되지 않으면 혈액 투석해야합니다. 혈액 투석이 무엇인지는 아시죠? 일주일에 2-3번씩 기계로 피를 걸러 넣는 분을 본 적 있으실 텐데요. 그리고 그렇게 혈액투석해도 꼭 회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환자분은 나이, 건강 상태, 지병을 고려하면 최선을 다해 치료해도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에서 회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번에 중환자실로 입원해서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회복해서 퇴원할 가능성보다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릅니다."
의식이 명료한 환자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그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하면 낫지 않겠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은 수술로 치료하는 질환이 아닙니다. 약물치료가 필요한 질환이고 급성 신부전은 호전이 없으면 수술이 아니라 혈액 투석이 필요합니다."
환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환자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얼굴이라 내가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수액과 항생제를 투여하고 현재 혈압은 정상 범위입니다. 아직까지 회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안정된 정도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며칠이 고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환자에게 '희망을 가지세요' 혹은 '힘내세요'란 말을 건네지 못했다.
3.
내가 언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 시절까지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신의 대한 믿음이 확고한 만큼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육체의 부활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맹목적으로 '아멘'을 외치는 부류는 아니었다. 때때로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의심 많고 권위에 삐딱한 타고난 반골이라 '의심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의심해야 진정한 믿음'이라 생각했고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될 무렵에는 영혼의 불멸도,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전 나는 신에 대한 믿음, 모든 것을 초월해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인격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이제 나는 '죽음이란 개인의 완전한 소멸'이라 믿는 무신론자다. 영혼과 내세는 자신의 완전한 소멸을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 생각하고 '우리 삶에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부여한 의미가 있으며 계획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 역시 우리 모두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지닐 수 밖에 없어 만들어진 믿음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이제 죽음은 내게 '완전한 소멸'을 의미해서 한없이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런 내가 응급의학과 의사로 비록 타인의 죽음이나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공간에서 일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유신론자 시절의 나는 이런 상황을 상상조차 못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동요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제 나도 고대 스토아 학파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