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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19. 2019

응급실 일기

1/4



1.
119 상황실에서 '심정지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인후염, 장염, 편두통 같은 경증 환자로 북적이던 휴일 오전 응급실의 공기가 완전히 다른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간호사들은 기관내삽관에 필요한 도구와 인공호흡기를 점검하고 환자가 도착하면 심전도 모니터를 부착해서 바로 심장 압박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나는 수술용 장갑을 끼고 초조하게 응급실의 구급차 전용 출입문을 바라봤다.

이윽고 번쩍이는 경광등 불빛과 함께 119 구급차가 멈추었다. 뒷문이 열리자 환자가 누운 이동식 침대가 내려졌다. 두 명의 구급대원이 환자 곁에서 심장 압박(cardiac compression)을 시행하고 있었다.

"며칠 전 여기서 퇴원했다고 합니다."

이동식 침대에 누운 환자는 다소 비만했고 여느 심정지 환자처럼 구급대원이 심장 압박을 할 때마다 축 늘어진 팔이 힘없이 들썩였다. 나는 재빨리 환자를 응급실 침대로 옮겼다. 간호사에게 심장 압박을 지속하도록 지시하고 신속하게 기관내삽관(endotracheal intubation)을 시행했다. 정맥주사로 에피네프린을 투여했고 도파만 지속 주입도 시작했다. 그러면서 환자의 의무기록을 살펴봤다. '며칠 전 여기서 퇴원했다'는 구급대원의 말대로 이틀 전 심장내과에서 퇴원한 환자였다. 환자의 병명은 비대성 심근병증(hypertrophic cardiomyopathy)이었는데 비전형적(atypical)이란 형용사가 달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심근경색(myocardial infarction) 같은 질환으로 손상을 입으면 심장은 커진다. 그런 경우를 확장성 심장병증(dilated cardiomyopathy)이라 부르고 흉부 X-ray에서 심장이 지나치게 커진 심비대(cardiomegaly)를 확인하는 것으로 쉽게 진단할 수 있다. 반면에 비대성 심근병증은 심장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심장 근육이 두꺼워 지는 것을 의미힌다. 심장 근육이 두꺼워지면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나치게 두꺼워진 심장 근육이 혈액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심장 마비를 일으키기도 한다. (경기력 향상을 목적으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을 사용하면 비대성 심근병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1980-1990년대 미국 프로레슬러 스타 가운데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환자는 심장 자체도 엄청나게 커졌고 그러면서도 확장성 심근병증이 아니라 비대성 심근병증으로 진단받은 특이한 사례였다. 이전에 촬영한 흉부 X-ray를 살펴보면 환자의 심장은 너무 커서 흉부 대부분은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 병력과 더불어 환자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감안하면 소생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환자는 20분에 걸친 심폐소생술에도 불구하고 심장 박동을 회복하지 못했다.

"2019년 0월 0일 오전 00시 00분 운명하셨습니다."

나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건조한 말투로 사망선언을 건넸다. 그 사망선언이 길고 긴 휴일 낮근무의 시작이었다.

2.
사망선언으로 심폐소생술이 끝나고 환자는 영안실에서 올라온 이동식 침대에 옮겨졌다. 환자를 태운 이동식 침대가 슬퍼하는 가족과 함께 사라지자 응급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똑같이 고열을 주증상으로 호소하나 입원 치료가 필요한 신우신염(acute pyleonephritis)  환자와 단순한 인후염 환자, 손가락이 찢어진 가벼운 열상 환자와 어깨 관절이 완전히 부러진 환자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면 정작 신우신염 환자와 어깨 관절 골절 환자는 고통을 참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인후염 환자와 가벼운 열상 환자는 자신부터 진료하지 않는다며 눈을 부라리고 보호자가 공격적인 태도로 '의사 어디있냐?'고 항의하는 '전형적인 휴일 응급실의 상황'이 펼쳐졌다.

그때 목에 수건을 두른 중년 남자가 엉거주춤 대단히 불편한 자세로 응급실에 들어왔다. 걸을 때는 당연하고 단순히 상체를 돌리는 것으로도 대단한 고통이 밀려 오는 듯 아주 어색한 동작으로 응급실 침대에 앉았는데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은 정상 범위였다.

"그게 말이요. 수건으로 등을 닦다가 담이 걸렸지 뭐요."

비오듯 흘리는 식은 땀은 단순히 '뭔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신호다. 그래서 심근경색 같은 심각한 질환에서도 관찰되나 요로 결석과 단순 장염에서도 나타나므로 그것만으로는 중증 질환을 의심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사람들이 '담 걸렸다'고 호소하는 염좌나 근육경련에서도 식은 땀은 충분히 흘릴 수 있다. 그런데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가 묘했다. 그는 명치 부분(epigastric area)의 통증과 함께 '등의 가운데 부분도 아주 아프다'고 말했다. 혈압 자체는 정상 범위에 있었고 지금가지 특별하 진단받은 만성 질환도 없었으나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심한 명치 통증과 그에 동반한 찌르는 듯한 등의 통증'은 대동맥 박리(aortic dissection)의 증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환자에게 모르핀(morphine, 아편 성분의 마약성 진통제) 5mg을 정맥주사로 투여하고 즉시 대동맥을 관찰할 수 있는 흉부 CT를 시행했다. 혈액검사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확인한 다음 시행할 수도 있으나 대동맥 박리도 초기에는 혈액 검사에 별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아 혈액 검사에 이상이 확인되면 이미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친 경우에 해당해서 나는 바로 CT를 시행했다.

안타깝게도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 가운데 최악의 경우'를 걱정한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혈액이 처음 도달하는 대동맥은 심장 위쪽에서 시작해서 목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아치 모양으로 휘어져 아래로 향하는데 환자는 흉부 대동맥 전부와 신장동맥 바로 윗 부분의 복부 대동맥까지 찢어지는 현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담이 걸렸다'는 환자의 말에 진통제만 처방하고 퇴원시키거나 혈액검사부터 시행하고서 별다른 이상이 없어 '내일 흉부외과 외래에 오세요'라고 말하고 귀가시켰다면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을 것이다. 나는 즉시 대동맥 박리에 대한 응급수술이 가능한 병원 두 곳에 연락했고 다행히 한 곳에서 수용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 환자를 전원했다.

3.
119 상황실에서 다시 '심정지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사실 119 상황실의 연락은 '심정지 환자 이송 중'이란 단편적인 정보 이상을 담고 있을 때가 드문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차장에 쓰러져 있는 환자를 행인이 발견해서 119에 신고했는데 응급실 도착 당시 자발 호흡과 맥박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심장 압박을 멈추지 않으면서 신속히 기관내삽관(endotracheal intubation)을 시행했는데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고 3분 만에 심장박동을 회복했다. 일반적으로 갑작스런 심정지의 가장 흔한 원인 두 가지는 심근경색과 뇌출혈이라 일단 뇌출혈부터 감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휴대용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는 뇌 CT를 시행했는데 CT 결과 심한 지주막하 출혈(subarachnoid hemorrhage)이 확인되었다.

지주막하 출혈은 외상으로도 생길 수 있으나 환자의 CT에서 확인된 형태는 부풀어 오른 뇌동맥(뇌 동맥류, Brain aneurysm)이 터져 발생하는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spontaneous subarachnoid hemorrhage)에 가까웠다. 그때 환자의 가족이 도착했다. 도착과 함께 흐느껴 울며 환자에게 달려드는 보호자를 제지하면서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환자에게 가서 흔들어 깨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황망스러운 마음은 이해합나디만 보호자께서 흥분하는 것이 환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단 심호흡부터 하시죠."

나는 보호자를 환자 꼍에서 진료용 컴퓨터 앞으로 데려왔다.

"환자는 주차장에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신고했고 119 구급대 도착 당시 호흡과 맥박 모두 없는 상태였습니다. 우리 병원 응급실에 도착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다행히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고 3분 후 심장 박동을 회복했습니다."

보호자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으나 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환자가 소생한 것은 아닙니다. 약물과 기계의 힘으로 그저 심장 박동만 되살렸을 뿐입니다. 심장 박동을 되살렸으니 심장 마비의 원인을 찾아야 했는데 일반적으로 갑작스런 심장 마비의 원인은 크게 심근경색과 뇌출혈입니다. 심근경색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 뇌출혈부터 감별하기 위해 뇌 CT를 시행했고 CT 결과 뇌출혈의 일종인 지주막하 출혈을 확인했습니다. 다만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은 아닙니다. 환자의 지주막하 출혈은 뇌에 있는 동맥이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서 발생하는 자발성 뇌출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은 터진 혈관을 혈관조영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습니다만 환자에게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보호자는 슬픔을 넘어 절망이 뭍어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뇌는 5분만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도 치명적인 손상을 받습니다. 이른바 저산소성 뇌손상(hypoxic brain injury)이라 부르는 문제인데 환자는 쓰러지는 것이 목격된 것이 아니라 주차장에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119 구급대가 현장에서 심장 압박을 시행했으나 우리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3분이 지나서야 심장 박동을 회복했습니다. 따라서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시간이 최소 15-20분은 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주막하 출혈을 해결하더라도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쉽게 말해 환자가 의식을 찾을 가능성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5%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지주막하 출혈에 대한 시술을 하지 않으면 환자는 100% 사망합니다. 그러나 시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후는 식물 인간 정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100% 사망, 적극적으로 치료해도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식물인간. 제아무리 의지가 굳고 침착한 인간도 한번에 무너져내리게 만들 내용이었으나 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 응급실 간호사들조차 잠깐 숨을 죽일 정도였다. 보호자는 손을 떨며 소리없이 울다가 '시술을 하겠다'고 대답했고 나는 신경외과 당직의사와 혈관조영술 팀을 호출했다.

4.
지주막하 뇌출혈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연결하고 뇌압강하제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약물을 처방하며 신경외과 당직의사와 혈관조영술 팀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동안 119 구급대가 또다른 중환자를 데려왔다. 근무시간마다 응급실 전담의사 1명과 간호사 4명이 일하는 크지 않은 응급실에 중환자를 연이어 데려오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119 구급대가 말한 궁색한 변명은 '이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였다. 그러나 사실은 2년 전 2주일 정도 심장내과에 입원했던 것이 환자가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은 전부였고 정작 환자가 응급실을 찾은 문제는 심장내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나치게 가늘어서 비현실적인 팔과 다리, 볼품없이 튀어나온 배, 오렌지 주스 색깔만큼이나 노란 눈, 환자는 누가 봐도 심한 간질환에 해당했다. 그저 '심한 간질환'이 아니라 사실상 간경화나 간암 말기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환자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것은 불과 3일 전이었다. 3일 전부터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환자의 의지가 아니라 몸 상태가 너무 나뼈져 도저히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체온과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으나 맥박이 지나치게 빠르고 혈압이 80/50으로 낮았다.

이른바 쇼크(shock) 상태였는데 원인은 다양했다. 우선적으로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가능성이 있었다. 간경화가 심해지면 간으로 가야할 혈액이 제대로 가지 못해 위와 식도의 정맥으로 역류하는데 그로 인해 위와 식도의 정맥이 부풀어 올라 위식도 정맥류(gastroesophageal varix)가 형성된다. 이런 위식도 정맥류는 아주 쉽게 파열되어 심각한 상부 위장관 출혈로 악화하는데 위내시경을 통해 지혈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다. 두번재로 간경화 말기에 이르러 간 기능 뿐 아니라 신장 기능까지 저하되는 간콩팥 증후군(hepato-renal syndrome)일 가능성도 있었다. 세번째로는 환자가 2년 전 우리병원 심장내과에 입원한 이유가 심방세동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급성 심근경색 같은 문제로 인한 심장성 쇼크(cardiogenic shock)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쇼크이 원인이 무엇이든 일단 환자의 상태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환자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의식 상태였고 호흡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생리식염수 1000cc를 빠른 속도로 정맥에 투여하면서 노르에피네프린을 승압제(inotropic agent, 혈압을 올리는 약물)로 처방했다. 그리고 심전도를 시행했는데 심전도에는 ST 분절 하강(ST depression)이 관찰되었다. 일반적으로 심근경색 초기에는 ST 분절 상승이 흔하고 시간이 흐르면 ST 분절 하강이 흔한데 환자의 ST 분절 하강은 꼭 심근경색이 원인이라 보기 어려웠다. 간콩팥 증후군 같은 문제로 다발성 장기부전이 발생해도 심장이 손상을 입어 ST 분절 하강이 심전도에서 관찰될 수 있다. 그래서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하는 대신 혈액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나는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가 나쁠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 결과는 그렇게 예상한 상태에서도 놀랄 수 밖에 없을 만큼 나빴다. 헤모글로빈 수치(이른바 빈혈 수치로 12-16이 정상이다)는 8로 환자의 상태를 감안하면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백혈구 수치가 32000이었다. 백혈구 수치가 4000-10000이 정상이며 감염이 진행될수록 상승하는 것을 감안하면 32000은 패혈증(sepsis)을 의심할 정도였다. 덧붙여 황달 수치(1-1.5 이하가 정상)는 10을 훌적 넘었으나 간효소수치(hepatic enzyme)는 정상 범위였다. 그것은 아주 나쁜 의미인데 쉽게 설명하면 황달 수치는 간 기능이 얼마나 감소하였는지를 나타내고 간효소수치는 현재 간세포가 얼마나 파괴되고 있는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달 수치는 아주 높으나 간효소수치는 정상범위인 결과는 '더 이상 파괴될 간세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파괴될 간세포가 없으니 간효소수치는 정상 범위이나 완전히 파괴된 간이 아무런 기능을 못해 황달수치는 엄청나게 높은 것이다. 그리고 신장 기능이 감소하면 상승하는 크레아티닌도 5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따라서 환자는 더 이상 파괴될 간세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간이 손상되어 콩팥 기능까지 함께 감소하는 간콩팥증후군에 해당했고 패혈증이나 다름없는 심한 감염까지 동반되었다. 예상대로 ST 분절 하강은 심근경색으로 인한 변화가 아니라 다발성 장기부전(multiple organ failure)으로 인한 심장 손상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열한 문제들은 가운데 하나만으로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질환이라 환자의 회복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나는 보호자를 불러 설명을 시작했는데 그 길고 암울한 말의 연속 가운데 보호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떡하든 살려주세요."

나는 짧은 숨을 내쉬고 보호자에게 말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의사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방치하지 않고 충분히 도움을 주면 회복할 수 있는 부류에 국한됩니다. 안타깝게도 환자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몇 개월 일찍 병원을 찾았다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환자는 당장 오늘 밤도 넘기기 어려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해서 중환자실로 환자를 입원시키면서 12시간 동안 이어진 휴일 낮근무가 끝났다.

5.
휴일 낮근무답게 중환자가 밀려오는 12시간이었다. 대학병원에서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겠으나 응급실 전담의사 1명과 간호사 4명이 한 근무조로 일하는 응급실에서는 만만하지 않은 일이다. 그 사이 사이 경증 환자 뿐 아니라 대퇴골 골절, 급성 충수염, 게실염, 신우신염처럼 입원이 필요한 환자도 끊이지 않았으니 '정신없이 바쁜 12시간'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런데 12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진료했던 4명의 중환자 가운데 실질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응급 수술을 위해 다른 병원으로 전원한 대동맥 박리 환자뿐이다. 심폐소생술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한 환자 뿐 아니라 지주막하 출혈 환자와 간질환 말기 환자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예상해도 1주일 안에 심장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우리 병원 응급실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진료하고 열정을 쏟아도 중환자 4명 가운데 1명에게 그나마 '의미있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겨우 1/4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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