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동료
1.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환자입니다. 혈압은 정상이고 구급차에서 한번 토했습니다. 토사물은 검은 색이지만 과산화수소에 반응은 없었습니다. 블루베리를 드셨다는데 아무래도 그거 같습니다."
환자를 태운 이동식 침대를 밀고 들어오며 119 구급대원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진료에서 정보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정보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정보를 선별하지 못하면 정보에 휘둘려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혹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정보를 수집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119 구급대원의 정보에는 문제가 있었다. 과산화수소(H2O2)는 소독약과 표백제로 사용되는 물질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상처에 투명한 액체를 부으면 쓰라린 통증과 함께 수많은 공기방울이 보글거리며 나타나는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액체가 과산화수소다. 그런데 과산화수소는 적혈구에 포함된 헤모글로빈(Hemoglobin)과도 반응한다. 그래서 범죄 현장에서 혈흔을 찾을 때도 사용한다. 119 구급대원이 검은 토사물에 과산화수소를 떨어뜨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경찰드라마에서 혈혼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액체는 단순한 과산화수소가 아니다. 과산화수소가 적혈구의 헤모글로빈과 반응해도 보글거리는 가스만 발생할 뿐이다. 경찰드라마에서 혈혼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물질은 루미놀과 과산화수소를 섞은 용액이다. 과산화수소가 혈혼의 헤모글로빈을 만나면 산소가 발생하고 그 산소가 루미놀과 반응하면 선명한 형광색이 나타난다. 그러니 119 구급대원이 환자의 검은 토사물에 과산화수소를 부어도 보글거리는 가스만 발생했을 테고 구급차에서 그걸 제대로 관찰하기 어려울 뿐 더러 그런 반응의 유무로 검은 토사물이 혈액이냐 아니냐는 것을 판단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토사물은 검은 색이지만 과산화수소에 반응은 없었습니다. 블루베리를 드셨다는데 아무래도 그거 같습니다'란 구급대원의 말은 정확하지 않고 신뢰할 수도 없는 정보다.
60대에 접어든 환자는 비슷한 연배의 평균보다 큰 체격이었다. 건장하나 비만하지는 않았고 특별한 기저 질환은 없었다. 의식은 명료하고 체온은 정상 범위였으나 혈압은 80/60으로 낮고 분당 맥박수는 110회로 다소 빨랐다. 몸을 가누기 힘든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식은 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일단 가장 가능성 높은 질환은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였다. 저혈량성 쇼크는 출혈이나 심한 탈수로 혈압이 감소하는 질환으로 환자의 경우 위궤양 출혈 같은 상부위장관 출혈(upper gastrointestinal bleeding, 식도와 위 그리고 십이지장 같은 부분에서 발생하는 출혈, 궤양이 주된 원인이나 만성 간질환이 있는 경우 위식도 정맥류도 감별해야 한다)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낮은 혈압과 명확하지 않은 어지러움, 식은 땀은 저혈량성 쇼크에서 자주 관찰되는 증상이며 덧붙여 환자는 양쪽 눈의 흰자위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띨 정도였는데 흰자위가 노르스름하면 황달, 창백하면 빈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이를 감안하면 심장성 쇼크(cardiogenic shock) 가능성도 확인해야 했다. 급성 심근경색 같은 질환에서도 어지러움과 식은 땀은 동반되고 '창백한 흰자위'는 그 기준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심전도를 시행하면서 기본적인 혈액검사를 처방했고 생리식염수 1000cc를 급속히 투여하도록 지시했다. 저혈량성 쇼크라면 수액 투여가 중요했고 심장성 쇼크라도 혈압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너무 많지 않은 범위에서 수액 투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심전도에는 분당 맥박수 110회의 빈맥 외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반면에 전체혈구계산(CBC, complete blood cell count, 백혈구와 적혈구 그리고 혈소판 같은 혈구의 수치를 측정하는 검사) 결과 헤모글로빈 수치가 5.4였다. 헤모글로빈(hemoglobin, 혈색소) 수치의 정상 범위가 12-16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 혈액의 1/3만 남은 심각한 빈혈 상태였다. 나는 수액 투여를 지속하면서 비타민 K를 근육주사로 투여하고 지혈제와 함께 양성자펌프차단제(proton pump inhibitor, 위산분비를 억제하는 항궤양약제)를 정맥주사로 처방했다.
이제는 소화기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할 차례였다. 저혈량성 쇼크의 원인이 상부위장관 출혈이 맞는지 확인해야할 뿐 아니라 출혈이 지속하고 있다면 지혈해야하기 때문이다. 소화기내과 당직의사는 나의 호출에 흔쾌히 응했다. 응급 위내시경을 준비하는 동안 대량의 수액을 투여하면서 농축적혈구(packed RBC) 수혈도 추가로 지시했다. 환자의 혈압은 90/60으로 다소 안정되었고 응급실에 도착하고 50분 후 응급 위내시경을 받을 수 있었다.
2.
이동식 침대에 누운 환자는 런닝셔츠와 파자마 차림이었다. 염색을 하지 않아 반쯤 하얀 머리카락과 탄력 없는 피부, 큰 키는 아니나 몸통에 비해 길어 보이는 팔과 다리 덕분에 그는 목각 인형처럼 느껴졌다. 며칠 동안 설사가 지속하여 내원했는데 혈압과 체온은 정상 범위였으나 맥박은 조금 빨랐다. 그런데 환자는 엄청나게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분당 호흡수가 30회는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정상적인 사람의 분당 호흡수는 12-20회 정도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호흡수가 증가할까? 당연히 산소 요구량이 증가하면 호흡수가 증가한다. 건강한 성인도 격렬히 운동하면 호흡수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폐렴이나 천식 같은 질환으로 한번의 호흡으로 공급할 수 있는 산소량이 감소해도 호흡수는 증가한다. 그런데 산소 요구량과 관계없는 문제로도 호흡수는 늘어날 수 있다. 다시말해 폐와 심장에 문제가 없고 '숨쉬는 것' 자체는 아주 원활히 진행되어도 호흡수가 정상 범위를 훌쩍 넘어버릴 때가 있다.
이른바 '대사성 산증(metabolic acidosis)'이 발생하면 호흡수는 증가한다. 인간의 혈액은 pH 7.35-7.45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심한 감염, 심한 출혈, 심한 탈수, 심한 고혈당 같은 상태가 지속하면 몸이 점점 산성화한다. 이런 상황을 '대사성 산증'이라 부른다. 인간의 몸은 항상 정상 범위를 유지하려는 항상성(homeostasis)이 있어 대사성 산증이 시작되면 어떡하든 낮아지는 pH를 끌어올리기 위해 산소 수치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호흡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그러면 혈액 내 산소수치는 증가하고 이산화탄소 수치는 감소하는데 산성을 띠는 이산화탄소가 감소했으니 일시적으로 대사성 산증을 상쇄할 수 있다. 이런 증상을 호흡성 알랄리증(respiratory alkalosis) 혹은 보상성 과호흡(compensatory hyperventilation)이라 부른다.
따라서 며칠 동안 설사가 지속된 환자가 센서로 확인한 산소 수치는 정상 범위인데 호흡수가 크게 증가되어 있다면 대사성 산증을 의심해야 한다. 특히 환자는 당뇨병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 고혈당은 대사성 산증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즉시 간이 혈당계로 환자의 혈당을 측정했는데 간이 혈당계로는 측정할 수가 없었다. 간이 혈당계로 측정할 수 있는 혈당의 한계치가 500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환자는 500 이상의 아주 심각한 고혈당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심정맥관(central venous line)을 삽입하겠습니다. 준비하세요."
심장과 바로 연결되는 상대정맥(superior vena cava)에 삽입하는 관이 중심정맥관이다. 말초정맥에 삽입하는 일반적인 정맥주사로는 대량의 수액과 다양한 약물을 신속하게 투여하기 어려워 그럴 경우 중심정맥관을 사용한다. 간이 혈당계의 측정 범위를 넘어선 고혈당과 크게 증가한 호흡수를 감안하면 환자는 당뇨병의 대표적인 급성 합병증이며 종종 치명적인 상황까지 치받는 당뇨병성 케톤산증(DKA, diabetic ketoacidosis)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량의 수액을 신속하게 투여하면서 저농도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당뇨병성 케톤산증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말초정맥보다 중심정맥을 확보하는 편이 유리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속하게 중심정맥관을 삽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탈수 상태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중심정맥관 삽입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중심정맥관을 통해 짧은 시간에 4000cc의 생리식염수를 투여하기로 결정하고 펌프를 사용해서 저농도 인슐린을 공급하도록 처방했다. 혈액검사 결과 환자의 혈중 pH는 6.8로 심각한 대사성 산증 상태였고 혈당은 1200이었으며 혈중 케톤 수치 역시 정상 범위를 훌쩍 넘었다. 심한 탈수와 대사성 산증으로 인해 신장 기능을 나타내는 크레아티닌(creatinine) 수치 역시 3.7로 크게 증가했으나 빠른 속도로 수액을 투여하자 소변량이 늘어나면서 환자는 점차 안정을 찾았다.
(탈수와 대사성 산증으로 인한 신장 손상은 대량의 수액을 투여하여 탈수와 대사성 산증을 교정하면 대부분 회복한다. 또 신장 기능이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가 소변량의 증가다.)
나는 중환자실 입원을 위해 내분비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했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호출을 받은 내분비내과 당직의사는 곧 응급실에 도착했고 보호자에게 입원장을 건넸다.
3.
임상의학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으나 응급의학과 의사에게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의사'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위의 두 사례 가운데 첫번째에서는 더욱 그렇다. 두번째 사례인 당뇨병성 케톤산증 환자는 내분비내과 의사가 이런저런 핑계로 입원시키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응급실에 두고 치료하면 된다. 보호자와 응급실 간호사들이 힘들겠으나 당뇨병성 케톤산증에서 회복할 때까지 환자를 응급실에서 치료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호흡기 치료가 필요한 폐렴 환자를 인공호흡기 치료가 끝날 때까지 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뇨병성 케톤산증 환자를 일반 병실에 입원할 수 있을 정도까지 담당하며 치료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응급 위내시경이 필요한 상부 위장관 출혈 환자는 다르다. 소화기내과 당직의사가 재빨리 시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환자는 사망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급성 심근경색 환자를 진료할 때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신속하게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환자는 회복할 수 없고 혈복강(hemoperitoneum, 장기 손상으로 복부 안에 피가 차는 질환)이나 장천공으로 인한 복막염(peritonitis d/t bowel perforation)에 걸린 환자는 일반외과 당직의사가 응급수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그런 환자들은 응급의학과 의사가 아무리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단하고 적절한 초기 조치를 취해도 해당 임상과에서 시술과 수술을 신속하게 진행하지 않으면 회복하기 어렵다.
그러니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의사, 그러니까 좋은 동료는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의사가 좋은 동료일까?
12년 전,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로 수련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범접하기 힘든 유능한 솜씨를 지닌 의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년차 레지던트도 분명히 의사인데 부끄럽게도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가지는 '명의에 대한 환상'을 지녔었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4년의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8년째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일하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범접하기 힘든 유능한 솜씨를 지닌 의사', 시쳇말로 '명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희귀하고 특수한 몇몇 시술이나 수술을 제외하면 '심각할 만큼 기술이 부족하고 무능한 의사'는 존재해도 '신의 손이라 불리는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평균에서 겨우 조금 더 낫거나 조금 부족할 다름이다. 오히려 그런 솜씨나 기술보다는 '임상의사로 판단력과 책임감'이 중요하다. 조금 나은 내시경 실력을 지녔다고 혹은 관상 동맥 깊숙이 '어려운 위치'에 자리한 혈전도 손쉽게 제거하는 실력을 지녔다고 거들먹거리며 이래저래 시간을 미루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야 나타나는 의사보다는 평균적인 솜씨를 지녔으나 환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신속하게 시술이나 수술을 시행하는 쪽이 확실히 더 좋은 의사이며 신뢰할 수 있는 동료다.
(또 앞서 말했듯 아주 특이하고 희귀한 시술과 수술을 제외하면 위내시경, 심혈관조영술, 일반적인 외과 수술에서 '신의 손'이라 불릴 만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의'란 개념 자체가 사람들이 만든 환상에 가깝다.)
그런데 반대로 나와 함께 일하는 다른 임상과 의사들에게 나는 어떤 동료일까? 과연 어떤 의사가 좋은 응급의학과 의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