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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Nov 30. 2019

응급실 일기

도덕적 해이


1.
이미 비어 있는 침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붐벼 붕대 두른 몇몇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응급실 밖에는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구급차가 연이어 도착한다. 의사와 간호사는 약간 찡그린 얼굴 혹은 찡그릴 힘조차 없어 밋밋한 표정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걸음으로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인다. 의사와 간호사가 내뱉는 낯선 의학용어,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의 목소리, 누가 주인인지 명확히 알기 힘든 울음소리, 훨체어와 이동식 침대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인공호흡기의 규칙적인 소음, 약병과 의료용 가위 같은 조그마한 의료기구가 부딪히는 소리,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 화나서 항의하는 목소리, 슬픔에 길게 탄식하는 한숨소리, 그 모두 응급실 특유의 음악을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소독용 알코올 냄새, 비릿한 피냄새와 청소용 락스에서 풍기는 자극적 냄새, 토사물과 대변에서 풍겨나는 큼큼한 냄새, 찌든 땀과 말라붙은 소변의 지린내까지 응급실만의 냄새도 있다. 그리고 그 모두 '혼란'이란 단어와 어울린다.

실제로 '응급실'이라 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도 '혼란'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응급실'과 '혼란'을 함께 떠올리는 상황은 바림직하지 않다. 응급실은 환자들의 다양상 증상을 진단해서 경증 질환과 중증 질환을 감별하고 적절한 조치를 신속하게 시행하는 곳이라 병원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질서있고 체계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응급실을 출입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 통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료진을 비롯한 병원직원의 응급실 출입도 통제하는 것이 원칙이나 환자마다 적게는 서너명, 많게는 십수명의 보호자가 드나드는 사례가 빈번했고 심지어 환자나 보호자가 아닌 외부인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 문제는 '신종플루'라 불리던 H1N1 독감 대유행을 지나면서도 고쳐지지 않았고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겨우 개선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일정 규모 이상 응급실에 외부인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우리 응급실도 마찬가지여서 응급실 출입문은 외부에서 열 수 없다. 119 구급대가 이송한 환자 혹은 의식저하나 호흡곤란 같은 심각한 증상이 아니면 절차에 따라 응급실 접수처를 거쳐야 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절차에 협조하는 것은 아니다. 경미한 증상에도 불구하고 응급실 접수처 직원에게 화내며 목소리 높이는 사람도 있고 밖에서 열리지 않는 응급실 문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힘껏 발길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런 무모함 혹은 배짱이 없으면 응급실 문이 열리길 기다려 몰래 들어와 막무가내로 진료를 요구하는데 그녀가 그랬다.

그날도 그녀는 응급실 접수처 직원이 다른 환자를 위해 응급실 출입문을 열자 은근슬척 응급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다가오며 다짜고짜 말했다.

"선생님, 어서 주사 한 대 주구려!"

약간 등이 굽고 조금 말랐으나 나이에 비해 튼튼해 보이는 체형, 역시 또래에 비해 빠르고 민첩한 걸음, 곱슬거리는 하얀 머리카락, 적당히 주름잡힌 얼굴, 그녀는 틀림없이 노인에 해당했으나 실제보다 5-10년 정도 젊어 보였다. 물론 차분하게 살펴보면 실제 나이를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나이에 비해 정정한 할머니'라 생각하며 그녀가 앞으로도 건강하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응급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OOO님, 응급실은 응급 환자를 진료하는 곳입니다. 주사를 달란다고 무조건 주지 않습니다. 일단 진찰부터 시작하고 진단에 따라 적절하게 조치하겠습니다. 응급실에서 약물을 투여하거나 검사를 진행할 질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내일 외래 진료를 예악해드리겠습니다."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옆에 있는 간호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간호사는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 따위를 측정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런게 어디있어! 오늘만 주사 한 대 달라니까. 내가 오죽하면 여기 왔겠어!"

나는 그녀가 응급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런 상황을 예상했다. 출근할 때 그녀가 병원 주변을 서성이는 것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병원 주변을 서성이다 갑자기 응급실에 들어와 '주사 한 대'를 요구하는 것은 며칠 혹은 몇 주, 몇 개월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응급실에 들어와 막무가내로 '주사 한 대'를 요구했다. 그녀가 외래를 방문해서 '주사 한 대'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까지 따지면 10년 남짓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우리 병원이 아니라 다른 병원에서 '주사 한 대'를 투여받은 것까지 따지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되짚어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에게는 '주사 한 대'가 필요한 질환이 없다. 젊은 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그녀는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 심지어 고혈압이나 당뇨병, 만성 신장병, 만성 폐쇄성 폐질환, 심부전 혹은 협심증 같은 만성 질환도 없다. 그녀는 늘 '속이 따갑고 견디지 못할 만큼 불편하니 주사 한 대 주라'고 요구하나 몇 차례 시행한 위내시경과 복부 CT에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녀의 증상은 육체적 문제(organic lesion)보다는 심리적 문제에 가까웠고 솔직히 말하면 '약물 의존증'에 해당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부탁하고 다음에는 불쌍한 표정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며 간청하다 갑자기 화내고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협박하고 그러다가 다시 '이번만 주사 한 대 주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걸고 타협을 시도하는 행동은 약물 의존증 환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OOO님, 벌서 몇 년 째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의 대답은 항상 같습니다. 진료해서 이상이 있으면 그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만약 응급실에서 조치할 이상이 관찰되지 않으면 그냥 귀가하셔야 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으나 진료해야 정확히 알 수 있으니 어서 간호사의 혈압 측정과 체온 측정에 협조하고 안내하는 침대에 누우세요."

이런 나의 말에 그녀는 앞서 말한 부탁, 간청, 협박, 타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물론 무엇을 선택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OOO님, 지난 몇 년 동안 경험을 통해 아시겠으나 제 대답은 같습니다. 진료하지 않고서 무조건 진통제 주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진료해서 진통제가 필요하면 처방하겠습니다. 또 검사가 필요하면 시행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환자가 원한다고 합당한 이유없이 진통제를 처방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응급실을 떠난다. '의사가 벼슬인 줄 아느냐',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저렇게 딱딱하니까 말단 응급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아들데리고 와서 병원에 본때를 보여주겠다', '응급실 의사는 부모도 없는 인간이냐'. 그녀의 상상력으로 동원할수 있는 모든 악담을 퍼붓고 사라지는데 놀랍게도 1-2시간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나타나 '선생님, 어서 주사 한 대 주구려!'란 말부터 반복한다.

'선생님, 어서 주사 한 대 주구려!'를 외치는 그녀 외에도 응급실 진료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는 적지 않다. 진통제나 안정제 같은 약물 의존증 외에도 단순히 '몸이 안 좋으니 수액을 달라', '마음이 불안하니 수액을 달라',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그냥 수액을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도 종종 있다. 놀랍게도 몇몇 환자는 그런 이유와 목적으로 진료받고도 본인이 직접 지불하는 진료비는 거의 없다.  

2.
'1984'와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에게는 단순히 '훌륭하다'는 표현을 넘어 '위대한 작가'란 지극히 상투적 표현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조지 오웰은 소설 뿐 아니라 에세이에도 아주 뛰어났다. 작가란 독특한 존재를 묘사한 '나는 왜 적는가?(Why I write?)' 같은 가볍고 개인적인 에세이부터 파시스트의 만행과 더불어 스탈린주의자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묵직한 논픽션인 '카탈루니아 찬가'까지 조지 오웰은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끈다.

조지 오웰의 그런 에세이 가운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은 개인적인 경험을 비교적 가벼운 문체로 얘기하며 시작하나 끝으로 갈수록 1920-1930년대 서유럽 빈민의 삶을 냉정하게 표현한다. 특히 영국의 빈민 구호소 생활을 묘사하는 대목은 몸서리칠 정도다. 샤워할 수 있으나 쾌적하지 않고 잠잘 수 있으나 편안하지 않으며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으나 음식 먹는 즐거움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이 빈민 구호소라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러면서 '왜 영국정부는 빈민 구호소를 개선하지 않을까?'라 묻고는 이내 '빈민 구호소의 생활이 안락하면 많은 사람이 애써 일하는 대신 빈민 구호소에서 사는 것을 선택할 것이며 그런 극단적 상황까지 치닫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빈민 구호소의 수용 인원을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조지 오웰이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의 위선을 신랄하게 조롱했던 사회주의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빈민 구호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매우 흥미롭다. 조지 오웰이 지적한 문제는 요즘 표현을 빌리면 '복지에 따르는 도덕적 해이'에 해당하는데 앞서 말했듯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에 해당하는 조지 오웰이 그런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한 부분은 예사롭지 않다. 따지고 보면 조지 오웰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긴 '1984'와 '동물농장' 역시 당시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유토피아라 생각하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지식인이라면 개인적 수준이든 혹은 소속 집단에 대한 비판이든 그런 자기 반성을 갖추어야 하나 조지 오웰처럼 단호하면서도 세련된 문장에 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1920-1930년대 영국의 복지제도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빈약한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은 '복지에 따른 도덕적 해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그런 도덕적 해이는 고대 로마에서 검투사 경기를 개최하고 빈민에게 빵을 배급한 이래 누구도 뽀죡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문제다. 앞서 언급한 '선생님, 어서 주사 한 대 주구려!'를 외치는 사례를 비롯해서 응급실 진료가 필요하지 않으나 빈번히 응급실을 방문하고 심지어 진료비도 거의 지불하지 않는 환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그런 '도덕적 해이'와 관련있다. 그런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진료하고 진료비를 거의 지불하지 않고도 처벌받지 않는 이유는 '의료 보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료보호 자체는 나쁘지 않고 오히려 꼭 필요한 제도다. 군대, 경찰, 법원 같은 기관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함께 상하수도, 전기, 대중교통, 교육 같은 분야는 무턱대고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는 영역, 이른바 공공재에 해당하고 의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통치력이 아주 미약하고 재정이 극도로 곤궁한 상황이 아니라면 국가가 적절히 통제하여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의 의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의료보호를 통해 취약계층에게 진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나 도덕적 해이를 피할 수는 없다. 사실상 자신이 직접 부담하는 비용이 거의 없으니 특별한 증상없이도 응급실을 찾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무분별한 병원 이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의료보호 환자도 응급에 해당하지 않는 증상으로 응급실을 찾으면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가 복통이나 두통처럼 응급에 해당하는 증상을 거짓으로 꾸며내기도 하고 응급에 해당하지 않는 증상으로 판정했을 때 불만을 지닌 환자가 난동부릴 것을 우려한 의사가 굳이 따지지 않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병원 입장에서는 응급에 해당하지 않는 환자에게 원칙적으로 대응했다가 '저 병원 응급실은 주사도 주지 않는다'고 소문나는 것을 싫어하기에 도덕적 해이에 빠진 의료보호 환자가 과도하게 응급실을 이용해도 제지할 방법은 마땅하지 않다.

3.
'선생님, 어서 주사 한 대 주구려!'라 외치던 그녀는 그날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응급실을 들러 원하는 진통제를 투여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우리 응급실에서도 내가 아닌 다른 의사를 만나면 진통제를 처방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 외에도 그런 식으로 진통제나 수액을 요구하는 환자는 적지 않다.

앞서 살펴봤듯 그들의 요구에는 '복지에 따른 도덕적 해이'란 문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원인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환자 뿐 아니라 의사에게도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지불하는 진료비가 거의 없으니 불필요한 응급실 이용을 지속하는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런 환자의 요구에 맞추어 진통제와 수액을 투여하고 나아가 역시 필요하지 않은 혈액 검사를 시행하도록 설득해서 수익을 올리려는 의사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까지 악의적이지 않더라도 '귀찮으니 그냥 처방하자', '굳이 내가 나서서 원칙을 따지고 설득할 필요가 없어'라고 판단하는 의사는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응급실에서 그런 환자들의 요구와 마주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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