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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Nov 29. 2019

응급실 일기

긴 하루

1.
응급실 근무의 가장 큰 매력은 예측 불가능에 있다. 물론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하다. 주말과 공휴일 낮근무는 바쁘기 마련이고 연속되는 휴일은 더 바쁘다. 특히 추석과 설날 그리고 5월 초와 10월 초에 종종 나타나는 황금연휴는 정말 정신없다. 반면에 날씨가 극단적이면 응급실은 조용하다. 폭염경보, 한파경보가 내리거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면 방문 환자가 급속히 줄어든다. 다만 그런 극단적인 날씨가 수그러드는 순간 환자가 밀어 닥친다.

(그래서 응급실 근무자끼리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유비무환', '우후죽순' 같은 고사성어를 주고 받는다. 비가 오면 환자가 적으나 비가 그치면 갑자기 많은 환자가 응급실을 방문한다는 뜻으로.)

그러나 대략적인 예측일 뿐이고 응급실에는 '평균' 혹은 '일반'을 벗어나는 상황이 빈번하다.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조용한 날이 있고 환자가 실새없이 밀어 닥치는 비오는 평일도 존재한다. 그날은 그런 측면에서 '전체 내원 환자눈 많지 않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츨 수 없는 휴일'에 해당했다.

2.
휴일 낮근무를 위해 응급실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다. 단순한 문학적 은유가 아니라 정말 공기의 냄새가 평소와 달랐다. 크게 역겹지는 않으나 비리면서 큼큼하고 퀴퀴한 냄새,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우나 한번 맡으면 잊어버리기 힘들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냄새, 바로 흑색변(melena)의 냄새였다. 그리고 냄새의 주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거뮈튀튀하면서도 묘하게 창백한 느낌을 주는 피부, 굵은 뼈대로 미루어 한때 건장했을 것이나 근육이 상당히 사라진 어깨와 몸통, 잔뜩 선 핏발로 섬뜩한 느낌을 주는 눈, 가볍게 떨리는 손, 4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나이로 판단할 수 있는 남자 환자가 흑색변의 주인일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흑색변은 상부 위장관 출혈의 전형적인 증상이며 간경화에 합병증으로 동반되는 위식도정맥류 출혈(gastroesophageal varix bleeding)이 상부 위장관 출혈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인데 그의 모습은 알콜성 간경화 환자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상부 위장관 출혈은 식도, 위, 십이지장의 출혈을 의미한다. 대장 같은 하부 위장관에 출혈이 있으면 선명한 붉은 피가 섞인 혈변이 나타나고 식도, 위, 십이지장 같은 상부 위장관에 출혈이 발생하면 짜장면 양념처럼 검은 변이 확인된다. 이렇게 상부 위장관 출혈이 있을때 흑색변이 나타나는 이유는 혈액에 함유된 헤모글로빈, 정확히는 철분 때문이다. 그래서 출혈이 없어도 철분제를 복용하면 흑색변이 나타날 수 있다.)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살펴본 환자의 기록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수년 전 소화기내과에서 알콜성 간경화로 진단받았으나 어쩌다 한번씩 외래로 방문했을 뿐 꾸준히 치료하지 않았다. 몇 달 전에는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여 입원 치료를 시작했으나 며칠 만에 치료를 거부하고 자의퇴원한 기록도 눈에 띄었다. 최근까지 매일 많은 양의 술을 마셨고 그날 새벽 1차례 토혈(hematemesis)과 흑색변(melena)이 있어 응급실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새벽부터 아침까지 혈압은 정상 범위였으나 혈색소(hemoglobin) 수치는 7.2에 불과했다. 정상범위가 12-16이고 8 이하에서 수혈을 고려하는 것을 감안하면 출혈량은 적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소화기내과 당직의사가 농축 적혈구(packed RBC) 3팩을 처방했고 이미 수혈도 완료된 상태였는데 그후 시행한 혈액검사에서도 혈색소 수치는 8.6이었다. 농축 적혈구 1팩을 수혈하면 혈색소 수치가 1만큼 증가해야 하는데 3팩을 수혈했으나 1.4-1.5 밖에 증가하지 않은 것은 수혈 후에도 출혈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의미했다. 그런데 새벽에 도착한 환자가 오전 9시까지 응급 위내시경을 시행하지 않고 응급실에 있는 이유가 의아했다. 응급 위내시경을 시행하고 중환자실로 입원하거나 그게 가능하지 않으면 권역별 응급의료센터로 전원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어려웠다. 동료 응급실 전담의사는 '소화기내과에서 보고 있는 환자라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고만 인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추측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일단 중환자실에 자리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1자리 밖에 남지 않았으나 중환자실에 빈 침대는 분명히 있었다. 소화기내과 당직의사가 부재한 것도 아니었다. 소화기내과 당직의사는 처음부터 환자에게 응급 위내시경을 권유했다. 그러나 환자는 응급 위내시경을 거부했고 아울러 권역별 응급의료센터로 전원하는 것도 강력히 거절했다. 거기에 보호자는 아침이 되어서야 연락된 상태였다. 결국 '환자가 협조하지 않고 보호자도 없음'이 응급실에 머무르게 된 이유인 듯 했다.

'소화기내과에서 보고 있는 환자라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고 얘기들었으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혈압은 정상 범위이나 맥박수가 분당 110회였다. 그런 경미한 빈맥(tachycardia)은 탈수나 저혈량(hypovolemia)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혈색소 수치가 8.6까지 증가해서 추가 수혈이 필요하지는 않아 생리식염수 투여를 시작했고 혈소판 수치가 2만으로 확인되어 혈소판 수혈을 추가로 처방했다. 아울러 환자에게 알콜 금단 섬망(alcohol withdrawal delirium, 알콜 의존증 환자가 1-2일 정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나타나는 착란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 티아민(thiamine, 알콜성 치매와 알콜 금단 섬망을 줄이기 위해 투여하는 비타민)을 처방했다.

그러나 못내 찜찜했다. 곧 간성 혼수(hepatic encephalopathy)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탄수화물과 달리 단백질과 지방에는 질소가 함유되어 소화할 때 암모니아가 만들어진다. 정상인의 경우 간에서 암모니아를 요소로 바꾸어 배설하므로 문제되지 않으나 간 기능이 떨어진 환자는 암모니아가 해독되지 않고 축척된다. 그로 인해 난폭한 행동과 의식 저하를 보이는 증상이 간성 혼수다. 간경화 환자가 '몸에 좋다'는 얘기에 단백질과 지방이 다량 함유된 보양식을 섭취하거나 민간 약초를 복용한 경우에 주로 나타나며 위장관 출혈 역시 원인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환자도 곧 간성 혼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는데 간성 혼수에 빠지면 협조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응급 위내시경을 시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응급 위내시경을 시행해야 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소화기내과 당직의사에게 '빨리 응급 위내시경을 해야한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중환자는 또 있었다. 간성 혼수에 빠지기 직전인 중년 남자 환자 옆에 하얀 머리카락이 가지런한 남자 환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토혈(hematemesis)이 문제였다. 20년 남짓한 나이 차이가 있으며 가지런한 하얀 머리카탁에서 볼 수 있듯 매일 음주량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위생 상태가 양호했으나 그도 알콜성 간경화에 해당했다. 다행히 옆자리의 중년 남자 환자보다 전반적인 상태가 양호했고 토혈과 흑색변이 있었으나 혈압은 안정적이고 헤모글로빈 수치도 11 정도로 크게 낮지 않았다. 그러나 혈액검사 결과 대사성 산증(metabolic acidosis)이 있고 간이 혈당계로 혈당을 측정할 수 없었다. 간이 혈당계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가 500 정도임을 감안하면 환자는 심각한 고혈당(70-110이 정상 혈당)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케톤(ketone) 검사를 추가로 시행했고 정상 범위보다 훨씬 높은 케톤 수치를 확인했다. 환자는 상부 위장관 출혈이 있을 뿐 아니라 당뇨병성 케톤산증(diabetic ketoacidosis)이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혈당이 지나치게 높은 상태가 지속하면 케톤이 만들어지면서 몸이 점점 산성화된다. 이런 당뇨병성 케톤산증은 당뇨병의 대표적인 급성 합병증이며 악화하면 의식저하와 급성 신부전이 나타난다. 또 방치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 대량의 수액을 투여하고 정맥주사로 저농도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당뇨병성 케토산증의 치료여서 나는 생리식염수를 2리터 가량 빠른 속도로 투여하도록 지시하고 저농도 인슐린 투여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번에는 젊은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 환자가 119 구급대를 통해 내원했는데 이번에도 주로 호소하는 증상은 토혈(hematemesis)이었다. 다행히 혈압과 체온, 맥박은 정상 범위였고 처음부터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구토한 후 마지막에 선명한 붉은 피가 조금 나왔다고 했다. 따라서 환자는 위식도정맥류 출혈이나 위궤양 출혈 같은 심각한 상부 위장관 출혈이 아니라 말로리-바이스 증후군(Mallory-Weiss syndrome)일 가능성이 높았다. 인간의 식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압력에는 대단히 강하나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압력에는 약하다. (음식물을 삼키는 방향을 생각하면 당안하다.) 그래서 심하게 토하면 식도 표면이 손상되어 출혈이 발생하는데 이 질환을 말로리-바이스 증후군이라 부르며 대부분은 심각한 상황으로 악화하지 않는다. 대학 신입생들이 진탕 술마시고 심하게 토하다가 마지막에 '피를 토했다'고 응급실로 달려오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환자가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 환자란 것이 문제였다. 당뇨병 환자의 경우 심한 구토의 원인이 단순한 위장장애가 아니라 심각한 고혈당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간이 혈당계로 혈당을 측정했는데 지나치게 높아 측정되지 않았다. 나는 정맥으로 인슐린을 소량 투여하고 생리식염수 1리터를 빠른 속도로 주입하면서 혈액 검사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550 정도의 고혈당이 확인되었으나 대사성 산증은 확인되지 않아 아직 당뇨병성 케톤산증 단계는 아니었다.

세 환자 모두 응급 위내시경이 필요해서 소화기내과 당직의사를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당뇨병성 케톤산증 환자는 3시간 후 대사성 산증이 사라지고 혈당이 400까지 감소했다. 말로리-바이스 증후군이 의심되는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 환자도 1시간 후에는 혈당이 300으로 감소했고 두 환자 모두 심각한 출혈이 지속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소화기내과 당직의사가 나타나 차례대로 응급 위내시경을 시행했다.

그러나 그 모두 '마무리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의 마무리'에 불과했다.

3.
응급실 원무과의 팩스를 통해 진료의뢰서 4장이 차례로 도착했다. 모두 같은 환자의 진료의뢰서였는데 내용은 달랐다. 첫번째 진료의뢰서에는 '외상성 지주막하 출혈 및 경막하 출혈이 있으나 응급 수술은 필요없고 상태가 악화하면 수술이 필요할 수 있음', 두번째 진료의뢰서에는 '다발성 늑골 골절이 있으나 혈흉(hemothorax)과 기흉(pneumothorax)은 없음', 세번째 진료의뢰서에는 '안면부 열상은 봉합하였으며 3-5일 후 봉합사 제거 요망합니다', 네번째 진료의뢰서에는 '골반 골절이 있으나 심하지 않고 골반 내 출혈은 확인되지 않습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종합하면 외상성 지주막하 출혈 및 경막하 출혈, 다발성 늑골 골절, 안면부 열상, 골반 골절이 있는 환자가 우리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인 진료의뢰와 완전히 달라 황당했다. 응급실 주임 간호사에게 '혹시 새벽에 연락 온 환자가 있었습니까?'고 묻자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없는 외상 환자의 전원 문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진료이뢰서의 환자는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 후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자 상황은 명확해졌다. 환자는 의식이 명료하고 혈압과 맥박 같은 생체 징후(vital sign)가 정상 범위였으며 이학적 검사 결과 복부 강직과 압통은 확인되지 않아 혈복강(hemoperitoneum, 복부 장기나 혈관 손상으로 복강에 피가 차는 증상)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이전 병원에서 시행한 두부 CT(Brain CT)를 확인한 결과 외상성 지주막하 출혈은 심하지 않았으나 경막하 출혈(subdural hemorrhage)은 양이 상당했다. 지금 당장 응급 수술은 필요하지 않으나 출혈량이 증가하면 수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했는데 중환자실의 빈 자리는 하나 뿐이며 새벽에 도착한 심한 토혈 환자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보호자들에게 우리 병원에서 수용할 수 없음을 얘기했다. 또 밤에 근무하던 응급실 전담의사가 연락받은 내용으로는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진료의뢰서와 CT 결과에 의하면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한 상태임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얘기하자 보호자 가운데 한 명이 '이전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했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대화를 지속하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전원 문의를 한 사람이 의료진이 아니었다. 전원문의를 한 사람은 보호자였다.

"전원문의, 특히 이런 환자의 전원 문의는 의료진이 해야 합니다. 그게 의료진의 의무에요. 그런데 왜 보호자가 했습니까?"

보호자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오늘이 휴일이라 전원 문의할 의료진이 없다고 해서요. 내일이 되면 의료진이 출근하나 전원 문의할 수 있는데 오늘은 휴일이라 보호자가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너무 황당해서 진료의뢰서의 병원을 확인했다. 진료의뢰서의 병원은 대학병원급이었다. 그러고 보니 종합해서 진료이뢰서를 작성하지 않고 신경외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성형외과에 해당하는 진료이뢰서가 각각 작성된 것도 이상했다. 그런 진료의뢰서는 응급실 인턴이나 응급의학과 1-2년차 레지던트가 각각 해당 임상과가 적어둔 응급실 진료기록을 그대로 복사해서 옮겨 적을 때 나타난다. 그러니까 감독 의무를 지닌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나태하고 그 아래 있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와 응급실 인턴은 잔머리가 발달한 경우에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화가 난다기 보다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참을 수 없었는데 어쨌든 일을 해결해야 했다. 나는 보호자들에게 중환자실이 없어 환자를 수용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권역별 외상센터에 연락했다. 다행히 권역별 외상센터에서는 환자를 수용할 수 있다고 답변했고 그렇게 한차례 해프닝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시간도 오후 5시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역시 아직 마무리는 아니었다.

4.
비교적 젊은 남자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응급실에 들어왔다. 아내로 보이는 보호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동행했으나 환자의 보행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어눌한 발음도 확인되지 않았고 혈압과 맥박, 체온은 정상 범위였다. 환자는 이전에도 가끔씩 두통이 있었으나 오늘은 1시간 전부터 아주 심한 두통이 나타났다고 호소했다. 환자와 보호자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보기 드물게 침착한 부류에 속했는데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질환 자체는 객관적이라도 통증은 지극히 주관적인 증상이다. 경미한 통증을 아주 심하게 호소하는 경우도 있으나 심한 통증을 무덤덤하게 참아내는 부류도 있다. 물론 혈압도 정상 범위이고 고혈압과 당뇨병 같은 기저질환 없이 비교적 건강한 남자였으나 나는 '혹시 통증이 시작하면서 목이 뻣뻣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환자에게 고개를 아래로 숙여보라 지시했는데 확실히 경부강직(neck stiffness)이 있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심한 두통, 이전에도 가끔씩 두통이 있었으나 완전히 다른 양상, 명확한 경부강직은 모두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spontaneous subarachnoid hemorrhage)에 해당하는 증상이다.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은 문자 그대로 외상없이 발생하는 뇌출혈로 대부분 뇌동맥류 파열(Brain aneurysm rupture)이 원인이다.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이 부분적으로 부풀어 올라 형성된 꽈리가 뇌동맥류이며 평소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으나 그 뇌동맥류가 파열되면 지주막하 출혈이 발생한다. 그런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은 출혈성 뇌졸중의 대표적인 원인이며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물론 두통에 경부강직이 동반되었다고 무조건 지주막하 출혈이라 단정할 수는 없으나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뇌혈관을 관찰할 수 있는 CT를 처방했다. 의식도 명료하고 혈압도 정상 범위였으나 지주막하 출혈이 있다면 빨리 알아차리기 위해 CT 촬영실에 동행했는데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화면을 시행하는 순간 낮게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지주막하 출혈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급히 응급실로 돌아와 신경외과 당직의사와 혈관조영술 팀을 호출했다. 지주막하 출혈은 앞서 말했듯 부풀어 오른 뇌동맥이 터진 질환이다. 그래서 터진 혈관을 신속히 지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예전에는 개두술(craniotomy, 두개골을 여는 수술)을 시행히여 직접 혈관이 터진 부분을 클립(clip)으로 집어야 했다. 당연히 두개골을 열고 터진 혈관을 직접 클립으로 집는 수술인만큼 만만치 않고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CT, MRI 같은 영상이 발달하고 혈관조영술이 발전하면서 심근경색 환자에서 대퇴동맥을 통해 삽입한 도구로 막힌 관상동맥을 뚫고 스텐트(stent)를 삽입하는 것처럼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에서도 대퇴동맥을 통해 삽입한 도구로 터진 뇌동맥류를 지혈하고 코일(coil)을 넣어 치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의식 상태가 양호한 환자에게 지주막하 출혈이 더 악화하기 전에 신속히 시술하면 개두술 없이도 회복할 수 있고 후유증도 훨씬 적다. 물론 모든 사례에서 혈관조영술이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자발성 지주막하 출혈 환자에게 혈관조영술을 시행할 때는 여의치 않을 경우 개두술을 시행할 준비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수술팀과 마취과에도 연락했다.

그런데 수술팀은 1시간 후에 준비가 완료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혈관조영술 팀도 그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혈관조영술부터 시행하고 그게 가능하지 않으면 개두술을 시행하는 것이니 혈관조영술은 즉시 시행할 수 있다면 지체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심근경색 환자를 주로 담당하던 혈관조영술 팀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응급실 주임간호사에게 전화기를 건네달라면서 크게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에요! 혈관조영술은 지금 당장해야지. 수술은 안 할 수도 있어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당장 준비하라고 하세요!"

다행히 내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까지 들렸고 혈관조영술 팀은 바로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시술을 진행할 신경외과 당직의사가 응급실에 들어왔다. 이전 상황을 모르는 그에게 나는 옅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혈관조영술은 이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다행히 혈관조영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덕분에 수술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제야 드디어 오후 9시가 되었고 길고 긴 낮근무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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