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짜주신 들기름이 똑 떨어졌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시는 바람에 병원에 들어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짜주신 들기름이다.
엄마가 시원찮아 진주네 김장김치와 들기름은 내가 죽을때까지 챙겨주겠다던 할머니의 그 들기름.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는 할머니 들기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릴 때마다 아깝고 귀하고 애틋하고 서글펐던 그 들기름...
마지막 들기름 한 병이 그렇게 동이 났다.
엄마랑 떨어져 할머니와 살던 시절,
나를 엄마처럼 키웠던 할머니는 틈만 나면 엄마 아빠도 모르는 내 어릴적 이야기들을 추억삼아 들려주곤 하셨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 여물 주던 이야기.
방앗간에서 떡을 맞춰 국민학교 1학년 첫 소풍을 갔던 이야기.
할아버지랑 글씨 공부 하던 이야기.
그리고 엄마가 없어 쉬이 잠들지 못하던 아가였을 때 할머니 귓볼을 뜯어져라 주무르며 겨우겨우 잠들었던 이야기까지...
자라면서 수십 번 수백 번은 들었던 이야기들이지만, 누군가 나에대해 그런 소소한 것들을 기억해주고 곱씹어주고 애정어린 언어로 추억해 주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고, 하나도 질리지 않게 다가왔다.
할머니... 나의 두번째 엄마, 이름도 어여쁜 기옥분 여사님은 2023년 11월, 영원히 좋은나라로 훌쩍 떠나가버리셨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도, 달마다 춘천 병원에 찾아가 수척해져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도, 진짜 할머니와 이별할 수도 있겠다는 실감은 잘 다가오지 않았었다.
막상 할머니 임종을 뵙고 장례식을 치르며 영원한 이별이란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살갗에 서늘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할머니는 모진 세월동안 6남매를 낳아 두 딸은 어려서 병으로 잃고 남은 4남매를 논밭을 일궈가며 키우시고, 여의치않은 자식들의 삶마저 나눠 짊어지고 손주들까지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할머니, 어떤 음식이든 뚝딱뚝딱 맛있게 만들어주시는 할머니, 손녀딸이랑 도란도란 수다떠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귀엽고 어여쁜 할머니셨다.
늘 아팠던 엄마가 없어지는 삶은, 어려서부터 많이 상상해봤지만, 할머니가 내 삶에서 없어지는 건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었다.
다 커서 시집가고 애엄마가 된 손주딸이랑 일주일에 두 세번 통화하며 한시간씩 수다를 나누었던 우리 할머니랑 이제 다시는 통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가 귓볼이 얼마나 아팠는데...
기분좋은 핀잔을 주시던 할머니의 귀여운 미소가 어른거린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연락처에 있는 '할머니' 석 자를 영원히 지우지 않겠노라 다짐해본다.
아직은 아주 천천히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중이다.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할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손주들 주겠다고 만드신 팔찌를 상자안에 고이 넣어놓고, 어떤날은 자신이 없어 꺼내보지 못하다가, 어느날은 용기내어 끌어안으며, 할머니와 남은 인사를 나누어본다.
가장 처음 순간, 가장 오랜 시간 서서히 녹아든 사랑은 그만큼 짙은 흔적을 남기고 삶을 만들고 인격을 형성한다.
나에게 할머니의 사랑은 오늘의 나를 만든 그 사랑이다
내 모든 사랑의 원형이다.
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다.
할머니와의 이별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지만, 함께했던 시간의 행복만큼, 마음속에 간직하고 영원히 보내드리는 과정도 나 혼자가 아닌 할머니와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나의 할머니를 이 공간에 이렇게 남겨드려보고 싶다.